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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영조 부자는 왜 노인대접을 받으려 생떼를 썼을까 “주상(숙종)께서 기로신 10명을 초대하시어 종일토록 즐겼는데 5차례에 걸쳐 5잔씩 술을 마시도록 했다. 5번째 잔은 ‘사기로소(賜耆老所·기로소에 하사한다) 네 글자가 새겨진 큰 은술잔으로 마시게 했다. 기로신들은 주상의 명을 사양하지 못해 만취했다.” 1719년(숙종 45년) 4월18일 59세가 된 숙종 임금(1661~1720, 재위 1674~1720)이 기로소에 입소한 기념으로 기로신(70세 이상의 정 2품 이상의 문신) 10명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였다. 눈병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았던 숙종은 “병든 몸이 궁전에 오르니…여러 관리 모여있고…이 연회는 본시 높이려는 뜻에서 나왔으니 가득한 술잔에 자주 손이 간들 어떠리”라는 시를 지었다. 이날의 연회 내용을 첩자로 만든 것이 바로 ‘기사계첩’이다. 에 ..
개로왕의 가묘인가, 제단인가…30년째 베일에 싸인 송산리 고분 석축 비명횡사한 개로왕을 위한 허묘일까, 제단일까, 아니면 석탑일까. 30년전 발굴조사 후 그 성격을 두고 설왕설래했던 유적이 있다. 무령왕릉으로 유명한 공주 송산리 고분군 정상부에 존재하는 3단 석축시설이다. 이곳은 1988년 고지자기 탐사와 이에 따른 발굴조사로 확인된 유구이다. 이를 두고 다양한 주장들이 오갔다.공주 송산리고분군 정상부에서 확인도니 3단 석축시설. 30년전 확인된 유구지만 적석총인지, 제단인지, 석탑인지 그 성격을 두고 논쟁을 벌여왔다. 올해 성격 규명을 위한 전면조사를 벌였지만 매장주체부를 확인하지 못했다. |문화재청 제공 먼저 돌로 쌓은 이 구조물이 특별한 시설을 갖추지 않았지만 구조적으로 서울 석촌동 2호·4호분 등의 적석총과 비슷한 것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웅진백제 시절 ..
'통일의 유전자'를고려에서 찾는다-고려건국 1100주년 특별전 “태조가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했다. 즉위 조서에서 ‘임금과 신하는 물과 물고기처럼 즐거워하고(魚水之歡)이며 태평시대의 경사(晏淸之慶)를 도우리니 나라의 뭇 백성은 마땅히 내 뜻을 알도록 하라’고 했다.”( )은제 주전자와 그릇받침. 개성 부근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인다. 1935년 미국 보스턴 박물관이 구입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918년 6월(음력) 태조 왕건이 고려의 건국을 만천하에 알렸다. 동북아는 당나라가 멸망하고(907년) 이른바 5대10국 시대(907~960)라는 혼란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 시기 고려는 외세의 지원없이 자력으로 후삼국을 합쳤고, 곧 멸망한(926년) 발해의 유민까지 받아들인 진정한 통일을 이뤘다. 태조 왕건이 하늘의 뜻을 받아들였다는 뜻..
크리스마스 선물, 7000년전 고래사냥의 시원이 된 반구대 암각화 “저기 무슨 그림일까.” 지금으로부터 48년전인 1970년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24일, 문명대 교수가 이끄는 동국대 박물관 조사단이 울산 울주군 언양읍 일대의 불교유적을 조사하고 있었다. 조사단은 특히 천전리와 대곡리 일대의 계곡에서 원효대사가 양지의 도움을 받아 과 등을 저술했다는 반고사터를 찾고 있었다. 반고사터로 추정되는 반구대 마을에는 절터는 물론 정몽주의 유배를 기념하는 사당터도 있었다. 1965년 건설된 사연댐 때문에 마을 대부분은 물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강가의 절벽엔 조선의 선비들이 시회(詩會)를 열고 그 기념으로 새긴 한시와, ‘나 여기 다녀갔소’를 알린 사람의 낙서, 그리고 학과 같은 그림들이 남아있었다. 울산대 반구대암각화유적보존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입체화한 반구대 암각화 실측도..
'자유인의 땅' 카자흐스탄과 신라는 대체 무슨 관계였을까 1928년 카자흐스탄 보로보에의 공사장에서 정체불명의 유물편이 출토됐다. 당시 전문가들은 뭔지는 모르지만 장신구의 한 부분일 것이라 판단했다. 그뿐이었다. 그로부터 65년 후인 1973년 이역만리 경주 계림로에서 벌인 미추왕릉지구 정화사업 도중 성인 남자 2명이 나란히 묻힌 무덤(14호분)이 확인됐다. 오른쪽 남자는 큰 칼을 차고 있었는데, 왼쪽 남자는 길이 36㎝의 황금보검을 달고 있었다. 경주 계림로에서 확인된 황금보검 장식과 카자흐스탄 보로보에에서 출토된 보검 장식. 세부 문양은 다소 다르지만 기본 모티브는 흡사하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그런데 일본학자들인 아나자와 와코우(穴擇和光)와 마노메 슌이치(馬目順一) 등으로부터 계림로 출토 황금 보검의 사진을 받아본 러시아 학자인 A.K. 암브로즈는 무릎을..
'해동의 요순' 세종은 왜 짜증과 불통의 대마왕이 되었나 (가)“너희는 설총은 옳다 하면서 내가 한 일은 그르다 하는 이유가 뭐냐.” “이 따위가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저속한 선비다.” “내가 너희에게 처음부터 죄주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보자보자 하니 안되겠다. 죄를 벗기 힘들겠구나.” 감정적인 언사로 일관하고 있는 발언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그러나 이것은 새발의 피다. (나)“대소신료들이 떼지어 날 겁박하는 것이냐” “난 어진 임금이 아니다. 부덕한 임금이라 마음대로 한다” “내가 세 살 먹은 아이들을 달래는 것 같구나.” “너희가 정승이냐” “친형제 같은 원로대신도 날 친견하지 않는다. 너희가 무슨 물건이기에 날 보려고 하는가.” “정승 1000명이 나와 말해봐라. 그래도 난 굽히지 않는다.” “분명한 일은 임금 독단으로..
백제판 '포스코' 제철소, 충주 칠금동에서 확인됐다 충북 충주 칠금동이 백제시대 ‘포스코’였음을 입증해주는 제련로가 9기나 쏟아져 나왔다.칠금동 제철유적을 조사중인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는 21일 올해 3차발굴에서 3~4세기에 제작된 제련로 9기를 추가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번에 충주 칠금동 제철유적에서 확인된 제련로 중 하나. 이곳에서는 총 20기의 제련로가 발견됐다. 3~4세기 백제시대 '포스코'라 할 수 있는 제철공장이 확인된 것이다.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제공 한지선 중원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칠금동 유적이 명실상부 국내에서 단위면적당 최대 유적이었음을 다시금 확인했다”면서 “밀집도로 보면 칠금동은 요즘의 포스코를 연상시킬만큼 대단위 제련공장이 있었던 곳이라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제련로는 철광석을 녹여 철을 만드는 가마이다.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는..
비격진천뢰, 일본군을 '공포'에 빠뜨린 비밀병기 개발자 이장손을 아시나요 “1592년(선조 25년) 9월1일 박진이 비격진천뢰를 성안으로 발사했다. 왜적은 떨어진 비격진천뢰를 앞다퉈 구경하다가 포탄이 터졌다. 소리가 진동했고, 별처럼 퍼진 쇠조각에 맞은 20여명에 즉사했다. 놀란 왜군이 이튿날 경주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경상좌병사 박진(?~1597)이 비격진천뢰를 써서 경주성을 탈환했다는 실록기사다. 비격진천뢰가 임진왜란 때 왜적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조선의 비밀병기였음을 알려주는 기사다. 그러나 현전하는 실물자료는 5점 안팎에 불과했다. 전북 고창 무장현 관아의 무기고에서 11발의 비격진천뢰가 발굴됐다. 비격진천뢰는 1591년(선조 24년) 군기시 화포장 이장손이 개발한 최첨단 무기였다. |호남문화재연구원 제공 ■11발이나 쏟아진 비격진천뢰 그러던 차에 이번에 전북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