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375) 썸네일형 리스트형 '적국의 수괴, '적의 장교'를 도륙하겠다고 선언한 이봉창 윤봉길 의사 선서문 “나는 적성(赤誠·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서울의 제과점 점원, 만주의 운전견습생 및 철도원,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철공소 직공, 잡역부, 날품팔이 등을 가리지 않고 일본인 행세를 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가 있었다. 바로 이봉창(1900~1932년) 의사였다. 이봉창 의사의 선서문. ‘적국의 수괴(일왕 히로히토)를 도륙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하오리(일본식 남자옷)에 게다짝까지 질질 끌고다니는 이봉창이 상하이 임정 건물을 출입하자 사람들은 “백범 선생은 왜놈 행색의 저런 자를 그냥 두느냐”고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나 백범 김구 선생은 기노시타 쇼조(木下昌.. 명사수 정조가 정약용에게 '지옥 훈련 캠프 입소'를 명한 까닭 50발중 49발 명중이 모두 10차례. 한번은 100발 쏘아 98발 명중…. 이것은 이순신 장군이나 태조 이성계의 활솜씨가 아니다. 문체반정을 주창한 문예군주라는 정조 임금의 활쏘기 솜씨이다. 정조의 활쏘기 점수가 다름아닌 에 아주 자세히 기록됐으니 거짓은 아닐 것이다. 을 보면 정조는 1792년(정조 16년) 10~12월 사이 춘당대에 출근하다시피 해서 활쏘기 행사를 벌인다. 왜 유달리 이무렵에 집중된 것일까. 정조는 “과인이 활쏘기를 원체 좋아했고 그것이 가문의 법도여서 젊은 시절에는 즐겼지만 최근 10~20년 사이에는 거의 하지 않았다”면서 “그러나 1792년 10월12일부터 다시 시작했다”고 밝혔다. 을 보면 10월에는 32발(17일)~47발(26일)이던 것이 30일 49발이 된 이후 가히 신궁의.. "'철의 왕국'이 가야가 아니다. 신라였다" 이번주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223회의 주제는 ‘철의 왕국은 어디었나’입니다. 이미 새해 초에 지면 기사로는 소개했는데요. 이번에 팟캐스트 용으로 재정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는 ‘가야=철의 왕국’의 지위가 확고했는데요. 그 근거는 3세기 역사서인 ‘동이전·한조’의 ‘나라(國)에서 철(鐵)이 생산된다(出)’는 기사였습니다. “그렇게 생산된 철을 한(韓·마한)과 ‘예(濊)’, 왜(倭)가 수입해갔고, 또 2군(낙랑·대방군)에도 공급했다”는 내용도 들어있습니다. 특히 “시장에서 중국의 돈을 사용하듯 모두 철을 거래수단으로 삼는다”는 내용은 ‘철의 왕국’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기록으로 여겨졌죠 3세기 중국 역사가 진수가 편찬한 '위지 동이전 한조'. '철이 생산되는 나라'를 헷갈리게 서술했다.,.. 상감청자 바닥에서 확인된 비밀문양. 국화형 꽃무늬 국보 상감청자 사발의 바닥에서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꽃무늬가 컴퓨터 단층촬영(CT)으로 드러났다.국립중앙박물관은 고려건국 1100주년을 맞아 기획한 특별전(대고려-찬란한 도전)에 전시중인 국보 제115호 청자 상감 국화넝쿨무늬 완(碗·사발)을 CT 촬영한 결과 바닥에서 국화형태의 꽃무늬를 확인했다고 밝혔다.사발 밑바닥에 새겨져있던 꽃무늬 상감. 바닥에 고여있던 유약층 때문에 육안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 이번 CT촬영 덕분에 확인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분석결과 그릇 내부(0.53㎜)와 외부(0.40㎜) 유약층 두께는 비슷하지만 바닥으로 내려갈수록 두꺼워지고(1.00㎜), 내부 바닥에는 아예 유약층이 고여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이영범 보존과학부 학예연구사는 “청자 사발 바닥에 고여있던 유약층 때문에 가려.. 이승만은 망가진 ‘미인 석탑’을 보고 노발대발했다 “대체 저게 어찌 된 것이요.” 1957년 9월 한국을 방문한 월남(베트남)의 고 딘 디엠 대통령과 경복궁 내 경회루 산책에 나선 이승만대통령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다. 산산조각 난채 방치된 흉물스러운 탑 한 기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외국정상과 함께 보았으니 얼마나 큰 망신인가. 이승만 대통령의 노기가 하늘을 찌르자 부랴부랴 방치된 탑의 복원에 나섰다. 한국전쟁 때의 폭격 유탄에 맞아 무려 1만2000조각으로 산산조각난 지광국사탑(국보 제101호). 이후 여러차례 복원 수리 과정을 겪었다.|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문제의 탑은 바로 원주 지광국사탑(국보 제101호)이었다. 원주 부론면을 떠나 서울-일본 오사카를 거쳐 원래의 자리인 원주로 가지못한채 서울 경복궁 한편에 서있다가 한국전쟁 때인 19.. 요절한 조선의 마지막 공주가 남긴 친필글씨 “이 전각은 우리 영고(寧考·정조)께서 자궁(慈宮·혜경궁 홍씨)을 효도로 받들고자 세우신 바요, 우리 자궁께서는 우리 자전(慈殿·효의왕후)께 내리셔서 소자(小子·순조)가 효도로 모실 수 있도록 해주신 전각이다. 우리 영고께서 자경이라고 이름을 내리셨으니 지금에 이르러 더욱 부합하고 드러남이 크도다.”“나 소자(小子), 지식이 부족하여 자덕(慈德)의 지극히 어지심을 찬양하지 뭇하오며…그러나 정성에 있고 글에 있지 아니하니…오직 있는 그대로 기록할 따름이니라…자교(慈敎·어머니의 가르침)을 받들어 삼가 기록하노라.”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온공주의 친필 글씨. 덕온공주는 공주라는 신분임에도 궁체를 능숙하게 썼다. 덕온공주는 숨겨진 한글명필이었다.|문화재청 제공조선의 마지막 공주인 덕온공주(1822~1844)의 .. '국왕 비서실장' 황희의 인사농단…“못참겠다” 익명서 올린 재상들 “이조를 담당하는 지신사(도승지) 황희는…자기와 친한 인물을 임금(태종)께 여러번 칭찬해서 벼슬에 임명하니 재상들이 매우 싫어했다. 좌·우의정이 천거한 인물들을 배척하고 자기 사람을 임명한 것이다.”1408년(태종 8년) 2월4일 기사이다. 요약하자면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장격인 지신사(이하 도승지) 황희(1363~1452)가 인사전횡을 휘둘러 재상들마저 ‘패싱’했다는 것이다. 기사내용을 뜯어보면 매우 흥미롭다.. 1534년(중종 29년) 농암 이현보가 도승지 남세진 등 승정원 동료들과의 모임을 기념해 그린 그림이다. 지금의 대통령비서실과 같은 승정원은 단순히 왕의 명령만 출납하는 역할에 만족하지 않았다. 실학자 안정복이 말했듯이 ‘승정원은 왕의 출납을 맡아 옳은 것은 아뢰고, 부당한 것은 거부했으니’ 그.. 고려의 장인 '동똥'이 제작한 개성 만월대 기와 ‘동똥이, 혜문 스님, 성광 스님….’ 2007~2015년 사이 남북공동조사단이 7차에 걸쳐 개성 만월대에서 발굴한 명문자료는 240점 정도이다. 그중 수키와(86점)와 암키와(133점), 수막새(11점), 암막새(1점) 등 제작지와 제작자를 나타내는 명문기와가 대부분이다.이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명문은 기와제작자 중 한사람인 듯한 ‘동똥(冬 叱밑에 同)’의 존재이다. 2015년 남북공동 조사단의 개성 만월대 제 7차발굴에서 찾아낸 명문기와. 월개요에서 ‘동똥’이라는 기와장인이 제작한 기와라는 의미이다. 사진은 글자를 도드라지게 처리한 모습. 전경효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주무관은 지난 10일 경주에서 열리는 ‘신라왕경과 고려 개경’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논문(‘신라 월성과 고려궁성 출토유물의 명문비교’)에.. 이전 1 ··· 59 60 61 62 63 64 65 ··· 17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