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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그들은 정말 사랑했을까 “곰뼈인가?” “아니야. 사람뼈 같아.” “근데 사람 뼈치고는 좀 이상하지않아?” 1856년 여름 독일 뒤셀도르프 근처 네안더 계곡 위쪽의 펠트호프 석회암 동굴에서 채석한 돌을 고르고 있던 석공들이 웅성웅성댔다. 작업하던 삽날에 이상한 뼈들이 걸려나온 것이다. 형태로 보아서는 사람의 뼈 같은데 대퇴골이 너무 두껍고 굴곡이 져 있었다. 특히 이마에 엄청난 크기의 뼈가 튀어나와 있었다. 돌출이마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추측이 난무했다. 돌출이마라면 혹여 심각한 스트레스를 동반한 마음의 병을 앓았던 사람의 뼈인가. 복원된 네안데르탈인. 돌출이마와 두껍고 굴족진 대퇴골의 소유자이다. |전곡선사박물관 제공 ■1856년 네안더 계곡에서 생긴 일 하지만 채석공들을 비롯한 당대의 사람들은 이 ‘돌출이마’가 누구인지 깨닫..
260㎜ 신석기인의 신발 6세기 초중반 중국 양나라를 방문한 12개국 사신을 그린 ‘양직공도’를 살펴보면 각국의 다양한 문화를 가늠해볼 수 있다. 예컨대 가죽신을 신고 있는 백제 사신과 달리 왜국 사신은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서있다. 이를 두고 ‘미개한 왜국의 문화 수준’이라고 폄훼할 수도 있다. 스위스 취리히 인근 그라이펜제 호수 제방의 뻘층에서 확인된 5000년전 신석기시대 신발.|취리히칸톤(연합뉴스) 하지만 그것은 각 나라의 기후와 풍습을 고려하지 않은 너무 일방적인 생각이다. 날씨가 따뜻하고 습기가 많은 왜국의 경우 굳이 신발을 신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반면 겨울 날씨가 매서웠던 고구려에서는 “구걸해서 어머니를 공양했던 바보 온달이 너덜너덜한 옷에 ‘해진 신발(弊履)’이라도 반드시 신었다”( ‘열전·온달전’)는 기..
텐궁의 추락, 손오공의 소란인가 ‘대요천궁(大鬧天宮)’은 1960년대초 제작된 중국 최초의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손오공이 옥황상제가 다스리는 하늘궁전(天宮)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큰 소란을 일으켜(大鬧) 마침내 대승을 쟁취하고 개선하는 고대소설 의 1~7화를 각색한 것이다. 중국이 2011년 우주정거장을 쏘아올리며 ‘톈궁(天宮)1호’(사진)란 이름을 지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미국과 러시아가 양분해온 우주공간에 도전장을 내밀어 결국 우주의 지배자로 등극하겠다는 야심을 담고 있다. 옥황상제를 몰아낸 손오공처럼…. 사실 톈궁 1호는 우주실험실이라 표현하는 게 옳다. 길이 10.4m, 최대직경 3.35m에 무게는 8.5t에 불과하다.(사진) 우주인들이 중·장기로 체류해서 실험도, 관측도, 연구도 수행하는 진정한 의미의 우주정거장이 아니다..
선조는 왜 마부를 공신명부에 올렸을까 “…너는 낮은 신분으로서 임금의 어가와 세자의 출정에 말고삐를 짊어지는 공을 이뤘고…. 험한 일을 두루 겪으면서도 시종일관 마부의 역할을 다했으니….” 최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해외한국학자료센터가 일본 교토대(京都大) 부속도서관에서 찾아낸 이른바 ‘오연의 호성공신교서’ 중 한 대목이다. 호성공신교서는 1604년(선조 37년) 선조가 임진왜란 중에 임금(聖)을 의주까지 호종(扈)하는데 공을 세운 86명에게 내린 교서이다. 선조는 이때 무공(武)을 떨친(宣) 선무공신 18명과 1595년 이몽학의 난(亂)을 진압(淸)한 청난공신 5명에게도 작위를 내렸다. 그런데 86명의 호성공신 중에는 내시(24명)와 이마(마부·어가 담당) 6명, 의관(어의 허준 등) 2명, 별좌 및 사알(왕명 전달) 2명도 포함되었다. ..
중국이 한반도로 쫓아낸 ‘악귀와 재앙’, 그것은 미세먼지 “섣달그믐부터 정월대보름까지 폭죽의 관습에 따라 딱총(紙統·종이폭죽)으로 귀신을 쫓는다. 포탄소리보다 웅장한 굉음이 아침까지 끊이지 않는다.” 1791년(정조 16년) 연경(북경)을 방문한 김정중의 이 전한 중국의 세시풍속이다. 특히 “부잣집은 천은(순은) 300~400냥짜리 호화딱총을 산다”면서 폭죽에 거금을 쓰는 중국인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폭죽놀이의 유래는 뿌리깊다. 6세기 인물인 종름의 는 “춘절(음력 1월1일)만 되면 나타나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괴수 산조가 싫어하는 빛과 폭발소리를 내려고 대나무를 태웠다”고 했다. ‘폭죽(爆竹)’ 단어가 그래서 나왔다. 중국 뿐이 아니었다. 우리네 세시풍속에도 섣달 그믐이 되면 폭죽을 터뜨리고, 대문에 복숭아 나무를 꽂아 악귀과 재앙을 쫓아내는 전통이 있..
어느새 문화재가 된 온돌, 그 따끈한 아랫목 “고구려인들은 겨울에 긴 구들 아래 불을 지펴 방을 덥힌다”는 의 기록처럼 온돌은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였다. 그렇기에 세계적인 대영백과사전에도 떡하니 ‘ONDOL’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고고학 자료를 봐도 청동기~옥저~고구려~발해를 이어온 구들이 온돌(溫突)로 표기된 것은 만고의 성군인 조선조 세종 시절이었다. 즉 세종은 “1425년(세종 7년) 성균관 학생들이 습질(濕疾·아토피 같은 피부병)에 걸리는 일이 많으니 (기숙사에) 온돌과 목욕탕을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발해영역인 러시아 체르냐치노에서 확인된 온돌 유구. 과연 습기가 차기 쉬운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긍휼히 여긴 성군의 마음씨다. 그런데 세종의 지시에는 또하나의 코드가 숨어있다. 바로 온돌 문화의 특징을 설파하고 있다. 사실 같은 ..
일제는 왜 낙랑과 가야 발굴에 혈안이 됐을까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1500~5000점 가량의 낙랑유물이 소장돼있다. 아직 유물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를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이 대량의 낙랑유물이 일제시대 때 집중 발굴됐다는 점이다. 그 뿐이 아니다. 박물관에는 3만8000여 장의 유리건판사진이 있다. 이 또한 일본의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 등이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찍어놓은 민속·인물·고고학 자료들이다. 1931년 평남 대동군 남정리 낙랑고분 발굴현장. 일제는 한국역사의 타율성 정체성을 밝혀내기 위해 낙랑고분을 집중 조사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대화혼을 심어줘야” 그 가운데는 전국 각지의 남녀 신체 측정 사진까지 포함돼 있다. 나치가 골상학까지 연구해서 유태인들을 ‘더러운 피가 흐르는 종족’으로 치부하여 멸종을 시도한 것을 떠올리면 ..
시황제, 위안스카이, 시쩌둥 황제의 원조는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다. 초대황제라는 뜻에서 시(始)자를 붙였고, 이후 ‘2세, 3세, 4세…’ 등의 만세까지 이어질 것이라 장담했다. 하늘의 권능을 받은 황제이니 쉽게 얼굴을 내비치지 않고 그저 징조만 느끼게 하면 된다는 신비주의 컨셉트를 내세워 ‘짐(朕·조짐)’이라 했다. 급기야 불로장생의 미몽에 사로잡혀 술사를 시켜 불로초를 구해오도록 했다. 그러나 6국을 멸한(기원전 221년) 시황제의 진나라는 단 15년만(기원전 206년)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후 2100여년이 지난 1912년 쑨원(孫文)에 이어 중화민국 대총통에 오른 위안스카이(袁世凱·사진)도 만만치 않았다. 위안스카이는 “황제가 될 사주와 관상”이라는 술사의 말을 철썩같이 믿었다. 중국의 개헌투표용지. 소수민족을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