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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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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인의 발자국…그가 남긴 메시지 1999년 8월 풍납토성 성벽을 발굴 중이던 국립문화재연구소 발굴단은 뜻밖의 흔적을 발견했다. 성벽을 쌓는 과정에서 누군가 뻘층에 남긴 발자국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양생 중인 콘크리트에 실수로 찍힌 발자국이었다. 이 발자국의 연대는 기원후 200년 쯤으로 추정됐다. 백제는 최소한 2차례 이상에 걸쳐 풍납토성을 완성했는데, 발자국이 찍힌 곳의 연대측정 결과 기원후 200년 쯤으로 측정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발자국은 최소한 1800년 전 백제인의 발자국인 셈이다. 발자국의 크기는 폭 12㎝, 길이 36㎝ 정도됐다. 주인공의 발자국은 뻘을 밟으면서 약간 밀려 실제의 발 크기보다 크게 나온 것이리라. 한성백제의 도성으로 지목된 풍납토성의 성벽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백제인의 발자국. 1800년 전 쯤 성을 쌓..
전모…베이징 원인 실종사건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이다.’ 1650년 무렵, 영국 국교회의 제임스 어셔 대주교는 아주 흥미로운 계산을 해낸다. 성경의 인물들을 토대로 천지창조일을 역산한 결과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이라는 아주 구체적인 날짜를 지목한 것이다. 유럽인들은 이후 이 날짜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날’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로부터 꼭 206년이 지난 1856년, 독일 뒤셀도르프 인근의 네안더 골짜기 석회암 동굴에서 이상한 화석이 발견됐다. 채석공들의 삽에서 골반뼈와 눈 위 부분이 뚜렷하게 튀어나온 머리뼈를 비롯, 상당량의 뼈들이 걸려나온 것이다. 사람 같지만, 오늘날의 사람과는 전혀 다른 ‘돌출이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상상할 수 없었다.(네안더 골짜기에서 확인된 고인류라는 뜻에서 네안데르탈인..
중국어에 능통했던 이순신 가문 “중국말을 10년 배워도 중국현지에 두어 달 다녀온 사람만도 못합니다. 사역원에서는 마지못해 한어(중국말)을 한다해도 평상시에는 늘 우리 말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1442년(세종 24년) 사역원 제조 신개가 답답하다는 듯 아뢴다. 요컨대 중국어 교육이 잘못 되었으니 교육방식을 파격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역원 내에서는 공사를 의논하거나 밥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할 때 무조건 중국어를 쓰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이를 어기는 생도는 그 때마다 매질을 가하도록 하소서.” 신개는 그러면서 “만약 이를 지키지 못하는 자에게는 무거운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간언한다. 명나라 사신인 예겸(倪謙)과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1418~1456), 신숙주(1417~1475), 정인지(1396~1478) ..
어느 임금의 절규, '정신병이다. 나 좀 살려주라!' “마음의 병이 있습니다. 재앙이 오겠습니까.(有疾心 唯有害)” 은(상)나라 반경~무정 시대(기원전 1300~1192년)의 갑골문에 나오는 흥미로운 내용이다. 갑골문은 은(상)의 임금이 정사를 펼칠 때 미리 점을 친 뒤 그 내용을 거북껍질이나 소 어깨뼈에 새겨넣은 것이다. 이 갑골문에 표현된 ‘심질(心疾)’은 ‘지나치게 마음을 쓰거나 괴로움을 당해 생긴 질환(思慮煩多 心勞生疾)’( ‘소공’ 조)를 일컫는다. 그러니까 이 갑골문은 이미 3000년 전 표현된 ‘마음의 병’ 혹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호소한 기록인 것이다. 다른 갑골문에는 “대왕의 마음이 화평할까요?(王心若)”라고 묻는 내용도 있다. 대체 군주의 자리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점까지 쳐서 ‘마음의 병’ 혹은 ‘스트레스’를 다스리려고 했을까, 뭐 그..
옛 기록에 나타난 명량해전의 진실 영화 이 요즘 히트를 치고 있다. 그렇다면 세계해전사에 빛나는 명량대첩을 옛 문헌들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영화 명량을 보기 전에, 혹은 본 후에 , , , , , , , 등에 나타난 명량해전의 기록들을 읽어보자. 간단히 말하자면 명량해전은 1597년(선조 30년)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10여 척의 전선으로 적함대 133척을 맞아 거둔 대첩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은 일본인 간첩 요시라의 이간질에 녹아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경질하고 원균을 기용한다. 그러나 원균은 왜적의 전술에 말려 대패하고 만다, 조선은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 강토는 또한번 왜적의 침략에 분탕질되고 만다. 1597년 8월 조선 조정은 권율 도원수 밑에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시킨다. 영화..
시진핑이 언급한 '인물탐구' “한국의 고대시인 허균의 시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속마음을 매번 밝게 비추고(肝膽每相照), 티없이 깨끗한 마음을 시린 달이 내려 비추네.(氷壺映寒月)’.” 7월 초, 한국을 국빈 방문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서울대 강연에서 한·중 친선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허균(1569~1618년)의 시를 인용했다. 시 주석은 그러면서 “이 시구는 바로 중국과 한국의 친선과 우의를 상징하는 것”이라 했다. 이 시는 허균이 정유재란 때 명나라 지원군의 일원으로 파견됐다가(1597년) 귀국하던 오명제에게 보낸 ‘송별시’이다. 허균의 송별시, 즉 ‘참군 오자어(오명제의 호) 대형이 중국 조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送吳參軍子魚大兄還天朝)’를 더 보자. 중국의 3대 음악가로 꼽히는 정율성. 전라도 광주..
끔찍했던 1592년 4월 15일 1731년(영조 7년),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은 경악할만한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동래성 수축을 위해 땅을 파다가 임진왜란 때 묻힌 것으로 보이는 백골들을 다수 발견한 것이다. 숫자는 최소 12명이었다. 포환(砲丸)과 화살촉들이 백골의 사이에 띠를 이뤘다. 당시 정언섭이 건립한 ‘임진망전유해지총(壬辰亡戰遺骸之塚)’의 비문을 보라. “전후에 발굴된 유골 수는 대개 열둘이지만 이는 특별히 그 형체와 해골이 완연한 것이고, 그 잔해의 조각조각이 떨어져 부스러진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에 숙연해진 정언섭은 백골들을 수습한 뒤 비문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제전(祭田)을 설치했다. 정언섭은 이에 그치지 않고 향교에 넘겨 해마다 유생들에게 그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동래성에서 확인된 20대 ..
'정몽주으리', 포은은 '의리!'의 조상이다. “간신 정몽주가…정권을 잡고서 전하(태조 이성계)를 도모하려 하다가 (1392년) 4월 4일 참형을 당했는데….”( 1392년 12월 16일조) 조선의 개국공신 조준이 올린 상소문이다. 조준은 포은 정몽주를 ‘간신’이라 일컫고 있다. 당연했으리라. 정몽주야말로 역성혁명의 최대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정몽주는 조준의 언급대로 태조 이성계를 죽이려고까지 했으니까…. 개성 선죽동 정몽주의 집터에 있는 숭양서원, 1573년(선조 6) 개성유수 남응운이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고 서경덕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개성 선죽교 위쪽 정몽주의 집터에 서원을 세우고 문충당(文忠堂)이라 했다. ■이성계에겐 '양정(兩鄭)'이 있었다 원래 정몽주와 이성계의 관계는 도타웠다. 1364년 2월 정몽주는 이성계를 처음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