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의 역사 (362) 썸네일형 리스트형 원고지 6장으로 배우는 팔만대장경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하자 수행자들은 시쳇말로 ‘멘붕’에 빠졌다. “잔소리꾼이 죽었으니 이제 해방이다. 우린 이제 마음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외치는 젊은 수행자도 있었다. 이 소리를 들은 부처님 사후 교단을 이끌어 갈 제자들이 깜짝 놀랐다. 이들은 서둘러 라자가하 성 교외의 바위굴에서 비상대책회의를 열었다. 생전에 부처님이 설파한 가르침을 정리하고 제대로 전할 책무가 있었다. 회의에서 부처님의 최측근이던 아난 존자가 ‘내가 들은 바는 이와같다(如是我聞)’고 부처님에게 들은 설법을 암송했다. 핵심 제자들이 아난의 증언이 진정으로 부처님 말씀인지 검증했다. 그리고 500명의 비구가 검증된 부처님의 설법을 한 목소리로 외웠다. 이것이 경장(經藏)이다. 교단의 계율(생활규범)인 율장(律藏)도 제정했고, ‘경과 .. 미적분 '통곡의 벽', 배워야 하는 이유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세상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같은 강이라도 같은 물 속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하지 못했다. ‘참의 실제는 변하지 않기에 변화를 과학으로 취급하기는 불가능하다’는 플라톤의 철학은 오랫동안 인간의 관념을 지배해왔다. 그러나 변화무쌍한 만물의 이치를 왜 설명할 수 없는가. 가령 허공에 던진 공이나 발사된 로켓은 시시각각으로 속도가 변하며 난다. 1666년 무렵 영국의 아이작 뉴턴(사진)과 1674년 독일의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가 거의 동시에 인류사를 바꾼 사건을 일으킨다. ‘미적분학의 발견’이다. 이후 100여 년 간 영국과 대륙의 학파가 가세, 뜨거운 원조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논쟁은 무.. '여성 안중근' 남자현 선생 아시나요. 광복 7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만 35년간 굴종의 역사를 견뎌온 우리네 어르신들의 고단했던 삶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니다. 이번 주 주제는 '여자 안중근, 독립투사 남자현 선생의 삶'입니다. 19살에 의병전쟁에서 남편을 잃고 47살에 만주망명을 결행했으며, 3번이나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썼던 남자현 선생이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남자현 선생은 61살이라는 나이로 중국거지 변장을 한 뒤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의 일본전권대사(부토 노부요시)를 죽이려다가 그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 때 선생은 37년 전 의병전쟁에서 전사한 남편의 피묻은 적삼을 입고 있었습니다.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남자현 선생을 기리며 팟케스트를 들어주십시요. 미리 썼던 기사내용을 팟캐스트에서.. 히로히토는 '항복연설' 하지 않았다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하코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고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토록 했다. 대저 제국 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공영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자 함은 황조황종의 유범(遺範)으로서 짐은 이를 삼가 제쳐두지 않았다. 일찍이 미·영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락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었다. 그런데 교전한 지 이미 4년이 지나 짐의 육해군 장병의 용전, 짐의 백관유사(百官有司 조정의 많은 관리)의 여정(勵精), 짐의 일억중서(일본신민)의 봉공 등 각각 최선을 다했음에도 전국(戰局)이.. 루시 여인을 만지는 오바마 1974년 11월30일, 미국의 고인류학자 도널드 요한슨은 에티오피아 하다르 인근의 아와시 강가를 탐사하고 있었다. 느낌이 좋았다. 요한슨은 섭씨 43도의 무더위를 뚫고 샅샅이 뒤진 끝에 강비탈에 박혀있는 수백개의 화석을 보았다. “믿을 수 없어. 이건 호미니드(사람과 사람 가까운 종)가 분명해!” 정신없이 수습해보니 한 개체 분의 40%에 이르는 엄청난 화석이었다. 발굴단은 그날 밤 맥주를 마시며 자축연을 즐겼다. 그때 카세트테이프에서 비틀스의 ‘루시 인 더 스카이 위드 다이아몬드(Lucy in the Sky with Diamonds)’가 흘러나왔다. 누군가 화석의 주인공에게 ‘루시’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분석결과 화석의 주인공은 지금부터 320만년 전에 살았던 여성으로 추정됐다. 골반과 엉치뼈를 분.. 김무성 대표의 큰절이 왜 과공비례인가 “그야말로 상상에서나 나올 기묘한(peculiarly fanciful) 모습이었다.” 1883년 9월 18일 미국 뉴욕 23번가 피브스 에버뉴 호텔 1층 대연회장에서 역사적인 행사가 열렸다. 조·미 수호조약 체결(1882년 5월22일)과 외교관계수립(1883년 5월13일)을 기념하여 조선정부가 파견한 사절단(보빙사) 일행의 국서제정식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말하자면 고종황제의 국서를 채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행사였다. 미국 당시 미국언론은 정사 민영익, 부사 홍영식 등 11명으로 구성된 보빙사 일행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하고 있었다. “조선보빙사의 옷은 오페라 합창단에 등장하는 고위 성직자의 옷차림과 비슷했다. 높고 검은 원추형 모자를 쓰는데 마치 알프스 산맥의 농부가 쓰고 있던 모자와 흡사했다.. 소인배와 군자 사이, 삼전도 비문 논쟁 “황제가 우리나라(조선)에서 화친을 무너뜨렸다고 해서 혁연(赫然)히 노해서~곧바로 정벌에 나서~우리나라 임금(인조)과 신하의 죄는 더욱 피할 길이 없다.” 높이가 395㎝, 너비 140㎝에 달하는 삼전도비, 즉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에 새겨진 비문은 쓰라린 역사의 상징이다. 비문을 쓴 이는 병자호란 당시 도승지와 예문관제학을 역임한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1595~1674년)이다. 이경석이 현종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궤장. 일흔살 이상의 명망 높은 노신에게 내리는 최고의 상급이다. 그러면 이 ‘치욕의 비문’을 쓴 이경석 역시 ‘치욕의 인물’인가. 그가 찬술한 이 삼전도비문은 그가 죽은 지 30~40년이 지난 뒤부터 벌어지는 노·소론 간 치열한 이념논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 참에 이경석이 .. 황성옛터와 궁예옛터 강원도 철원 평화전망대에 오를 때마다 필자는 왠지 ‘센티멘탈’해진다. 나즈막한 전망대 앞으로 펼쳐진 드넓은 평원의 이름은 풍천원이다. 그렇다. 저곳은 1100년 전인 905년 풍운아 궁예가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태봉국의 도성터이다.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면서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세계를 꿈꿨던 궁예였다. 그렇지만 궁예의 꿈은 불과 13년 만에 물거품이 된다.(918년) 철원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궁예의 태봉국 도성터. 휴전선(군사분계선)이 도성터를 딱 반으로 가르고 있다. “사졸들과 고락을 함께 해 인심을 얻었지만…나중엔 가혹한 정치로…궁궐만 크게 지어 원망과 비난을 자초했다”( 등)는 것이다. 왕건세력에 의해 축출된 궁예는 굶주림에 보리이삭을 몰래 끓여먹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김부식.. 이전 1 ··· 24 25 26 27 28 29 30 ··· 4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