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의 역사 (341) 썸네일형 리스트형 거세된 남성 환관…그들을 위한 변명 “천하의 권세를 가진 첫번째는 태감 위충현이고, 둘째는 객씨이고, 셋째가 황상(황제)이다.’라고…” 1624년(인조 2년) 명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온 홍익한의 사행일기()는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명나라 백성들이 환관 위충현과 그의 내연녀(객씨)의 위세가 황제(명 희종)을 능가했음을 수근거렸다는 것이다. 과연 그랬다. 위충현(?~1627)은 희종의 유모였던 객(客)씨와 사통한 뒤 명나라 국정을 쥐락펴락했단다. 청나라 시대 환관의 사진. 어릴 적부터 거세한 환관은 음석이 여자다워지고 모습 또한 여성스러워졌다고 한다. ■구천구백세! 어떻게 환관이 남성을 회복했느냐고? 위충현은 어린 아이의 뇌(腦)를 생으로 씹어먹고는 양도(陽道)를 회복했다고 한다. 위충현은 안팎의 대전을 손아귀에 넣고 자신을 호위.. ‘♡(♥)’의 역사-심장이 하나인 까닭은 “심장은 9개의 문이 달린 연꽃이다.” 고대 인도의 성전(聖典) 가운데 하나인 가 표현한 심장이다. 심장을 세우면 연꽃 봉우리처럼 생겼고, 모두 9개의 구멍(혈관)이 있음을 안 것이다. “목 아래 배꼽 위에 자리한 심장은 아래를 향한 연꽃같다. 심장은 신의 거처임을 깨달으라. 심장 끝에는 섬세한 신경이 있다. 여기서 만물의 존재가 성립한다. 중심에는 위대한 불이 있어 사방으로 퍼져가며 여기저기서 타오른다. 이 불길 가운데 지고의 존재가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람을 미라로 만들 때 심장 만은 방부처리하여 미라 속에 넣었다. 반면 뇌는 “쓸모없다”면서 버렸다. 다른 장기들은 단지에 담아 미라의 옆에 놓았다. 심판의 날에 죽은 자를 위해 증언해 줄 심장을 고이 보존하려는 뜻이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심장.. 사형장 풍경…인간백정의 역사 “옛날 요임금은 천하를 다스릴 때 한 사람 죽이고 두 사람에게만 형벌을 내렸는 데도 천하가 잘 다스려졌다.”( ‘서(書)’) “순임금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삼가야한다. 삼가야한다. 형벌을 행할 때는 가엾게 여겨야 한다.(欽哉欽哉 惟刑之恤哉)’”( ‘오제본기’) 백성들이 고복격양가를 불렀다는 요순시대의 이야기다. 한마디로 형벌을 가볍게 해야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후대의 군주들도 요순을 따르려 무진 애를 썼다. 예컨대 한나라 효문제는 사람의 몸을 훼손하는 이른바 육형(肉刑)을 없애면서(기원전 168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김윤보의 에 묘사된 조선시대 참형 모습.참형은 사지를 찢어죽이는 능지처참에 이어 두번째로 혹독한 형벌이었다. “육형이 있어도 간악함이 멈추지 않으니 그 잘못은 어디에 있는.. 광해군의 절규…나랏일이 한심하다 “요즘 조선인들은 큰소리만 치고 있다. 반드시 그 큰소리 때문에 나랏일을 망칠 것이다.” 1621년, 광해군이 장탄식한다. 국제정세는 급박했다. 명나라는 요동 전투에서 신흥강국 후금에 의해 줄줄이 패해 존망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공론은 후금을 오랑캐 나라로 폄훼하면서 다쓰러져 가는 명나라 편이었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절묘한 등거리 외교로 균형을 잡아온 광해군으로서는 이같은 공론이 한심했다. “명나라 장수들이 줄줄이 적(후금)에게 항복하고 있다. 심지어 요동사람들이 명나라 장수를 포박해서 후금군에 넘겼다고 한다. 중국의 형세가 이처럼 급급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인심은 큰소리만 치고….” 화가 김윤겸이 그린 청나라 병사 그림인 '호병도'. 광해군은 다 쓰러져가던 명나라를 맹목적으로.. '조선판' 4대강 공사…태안 운하 “암초 때문에 격렬한 파도와 세찬 여울이 휘몰아친다. 안흥정 아래 물길이 열 물과 충돌하고, 암초 때문에 위험하므로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있다.”() 송나라 서긍은 충남 태안 마도 인근 해역의 험난한 물길을 두고 “매우 기괴한 모습이라 뭐라 표현할 수 없다”고 혀를 내둘렀다. 이 뿐인가. “옛날엔 난행량(難行梁)이라 했다. 바닷물이 험해 조운선이 누차 침몰했으므로, 사람들이 그 이름을 싫어해서 안흥량(安興梁)으로 고쳤다.”() 얼마나 험했으면, 배가 지나기(行) 어려운(難) 해역이라 ‘난행량’이라 했다가 편(安)하고 흥(興)하라는 염원을 담아 ‘안흥량’으로 고쳤다는 것인가. 안흥량의 암초지대. 나라곳간을 채울 조운선은 반드시 태안반도 인근 해역인 안흥량을 통과해야 했지만 배가 침몰되는 해난사고가 잇따랐다.. 금동대향로에 숨겨진 백제 멸망의 비화 1993년 10월 26일 부여 능산리 고분에서 색다른 행사가 열렸다. 일본 규슈지방의 미야자키현 난가손(南鄕村) 사람들이 백제왕을 상징하는 신체를 모셔와 제사를 지낸 것이다. 일본인들이 왜 백제왕의 신체를 모셔온 것일까. 사연은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기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3년 뒤 백제 부흥군과 왜 연합군이 나·당연합군과 백강(금강)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1000척에 분승한 2만7000여 백제 부흥군·왜 연합군은 4차례 접전 끝에 완패하고 만다. 백제부흥군은 완전히 멸망한다. 이 전투 후 백제왕·귀족들 가운데 상당수가 일본 나라를 거쳐 규슈로 망명한다. 이 망명 대열에 백제 마지막왕인 의자왕의 서(庶) 왕자 41명 가운데 한사람인 정가왕 일족이 포함돼 있었다. 정가왕 일가가 .. 한국인의 조상은 서양인이다? “이건 제가 한번 해볼게요.” 1962년 3월 하순, 충북 제천 황석리 고인돌(기원전 6세기) 발굴현장. 28살 신참 고고학자였던 이난영(국립박물관 학예연구사)은 선배인 김정기 학예연구관을 졸랐다. 그 때까지 계획된 12기를 모두 발굴한 상황. 단 하나 남은 게 바로 상석부분이 파괴된 채 흙에 파묻혀있던 고인돌 1기(13호)였다. 너무도 빈약한 고인돌이었기에 신참 고고학자가 한번 욕심을 내본 것이었다. “깨진 것 같은데 한번 해보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그런데 조심스럽게 흙을 파던 신참 고고학자의 손 끝에 뭔가가 걸렸다. 석관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석관을 파헤치자 놀랄 만한 유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기골이 장대한 사람의 뼈였다. 오른팔은 배에, 왼팔은 가슴에 대고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사진을 .. '욕실 속' 마릴린 먼로의 자태-광고로 본 50년 전 그 날 ‘장0자(18) 속히 돌아오라. 모든 것 해결됐다. 그이와 언니는 너를 찾아 헤매고 있다.’ 경향신문 1964년 11월 7일에 ‘한 줄 광고’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개구쟁이 시절 이런 광고를 패러디 해서 “000야, 빨리 돌아오라. 아버지 바지(혹은 빤쓰) 줄여놨다”는 등의 농지거리를 나누며 실없이 낄낄 댔던 기억이 새롭다. 돌이켜보면 유치찬란한 농담인데, 무엇이 그렇게 우스웠는지 참…. ‘한 줄 광고’를 더 살펴보니 30대 여인의 구혼광고가 눈에 띈다. ‘재혼, 가옥 고급 둘, 건실 남 원함.’ 1964년 11월 6일 경향신문에 게재된 마릴린 몬로 주연의 영화 '나이아가라' 영화광고. "바스-룸 속에서의 몬로-염자(艶姿)!', 즉 목욕탕 속에서 빛나는 몬로의 농염한 자태를 선전하고 있다. '미성년자.. 이전 1 ··· 25 26 27 28 29 30 31 ··· 4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