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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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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이 충성서약에 목맨 이유 “우리들 일을 같이 한 사람들은 임금을 섬기고, 친구를 신의로 사귀고, 부귀와 이익을 다투지 말며, 다른 자의 이간을 듣고 의심을 품지 말며, 과실은 바로잡고, 환란이 있으면 서로 구원해 줄 것입니다.” 왕씨의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1392년 7월 17일)한 지 두 달이 지난 뒤인 9월 28일, 정도전과 배극렴 등 개국 공신들이 총출동했다. 태조 이성계를 향한 충성서약식에 참가하기 위함이었다. 개국 공신들은 “처음과 끝이 같도록 충성을 바치겠다”면서 “자손 대대로 이 맹약을 지키지 않으면 반드시 신(神)이 벌을 내릴 것”이라 재차 다짐했다. 조선시대 공신들의 충성서약을 받던 회맹터. 지금의 청와대 북쪽에 있었다고 한다. ■“배신자는 대대로 복수할 것이다” 그러나 “공신 간 절대 반목하지 않겠다”..
억울한 여인을 죽인 세종의 잘못된 판결 “무릇 화간(和姦)은 장 80대, 남편이 있으면 장 90대이다. 조간(勺姦·여자를 유괴한 뒤 간음)은 장 100대이고, 강간한 자는 교수형(絞刑)에 처한다. 강간미수죄는 장 100대에 유배(流) 3000리에 처한다.”(·‘형률·범간조(犯奸條)’) 1637년 명나라가 제정한 이다. 조선도 이 에 따라 성범죄나 성희롱을 엄단했다. 보기에도 무시무시하다. 강간범은 교수형에 처하고 미수범이라도 장 100대에 유배 3000리의 처벌을 받았다니…. 욕정을 함부로 발산했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성범죄는 끊이지 않았다. 1404년(태종 4년) 사노(私奴) 실구지 형제와 그들의 처남인 박질이 능지처사의 혹독한 처벌을 받는다. 주인집 딸을 집단 성폭행한 죄였다. 피해자(내은이)는 손발이 묶인 채 밤새..
'굴러온 돌(백제)'과 '박힌 돌(마한)' 마한의 입장에서 보면 백제의 창시자인 온조는 굴러온 돌이자, 배은망덕한 사람이다. 온조가 누구인가. 비류와 함께 고구려 추모왕(주몽)의 서자가 아니던가. 무슨 사연인가. 북부여의 주몽은 북부여 태자인 주몽이 북부여 태자 대소에게 쫓겨 졸본부여로 망명한다. 주몽은 졸본부여의 재력가(연타발)의 딸로서 아들을 둘(비류와 온조) 둔 미망인(소서노)과 결혼한다. 소서노는 가산을 털어 재혼한 남편(주몽)의 창업(고구려)을 도왔다. 주몽은 비류와 온조를 자기 아들로 여겼다. 비류와 온조 중 한사람이 다음 왕위를 이어갈 것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꿈에도 생각못한 것이 있었다. 북부여에 주몽의 친아들이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공주 수촌리에서 확인된 금동관모(왼쪽)과 이번에 경기 화성에서 발견된 금동관모의 흔적..
목숨 걸고 역린을 건드려라 “내가 사심을 버리고 의견을 물은지 한 달이 지났다. 그런데도 어느 누구도 진언하는 자가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역린(逆鱗)을 건드릴까 두려워하는 것인가.” 1491년(성종 22년) 1월 6일, 성종이 답답하다는 듯 화를 냈다. 재변이 잇달아 “내가 부덕한 탓이니 어느 누구라도 나서 무슨 말이라도 직언을 해달라”고 했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종은 “대체 내가 언급할 가치도 없는 임금으로 생각하느냐”고 다그쳤다. “다시 한번 고한다. 재앙을 만나서 나의 부덕함과 부족함을 듣고자 하니 기탄없이 직언해주기 바란다.” 그 후 4년 뒤인 1495년(연산군 1년), 대간이 간언(바른 말)을 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자 사헌부와 사간원 등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대간이 잘못을 논한 것은 바로 공론입니다. ..
첨성대는 결국 '피사의 사탑'이 되는가 “별기에 ‘선덕왕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축조했다(別記云是王代鍊石築瞻星臺)’는 기록이 있다.”( ‘선덕여왕 지기삼사’) 에 기록된 633년(선덕여왕 2년)의 첨성대 축조기사이다. 참으로 소락(疏略)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첨성대’가 ‘별(星)을 관찰하는(瞻) 건축물(臺)’이라는 이름이므로 천문대였음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후대의 기록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리지’와 ‘경주부’ 등을 보자. “첨성대는 선덕여왕이 쌓았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방형(方形)이고, 아래는 원형이다. 높이가 19척5촌, 둘레가 21척6촌, 아래의 둘레가 35척 7촌이다. 가운데를 통하게 하여 사람이 가운데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첨성대는 833년(선덕여왕 2년) 별(星)을 관측하는(瞻) 건축물(臺)의 이름으로 ..
조선판 '세월호' 참사와 태종의 '사과' 1656년(효종 7년) 8월27일, 전라도 해안에서 엄청난 사고가 일어났다. 전라도 해안에서 실시한 대규모 군사훈련에 참가한 전함들이 거센 비바람에 휘말려 떠내려 가거나 침몰한 것이다. 금성·영암·무장·함평·강진·부안·진도 등에서 출동한 배들이었다. 문제는 이 사고로 죽은 병사들이 1000여 명이나 됐다는 것이다. 진도군수 이태형도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사고는 전남 우수사 이익달이 저지른 전형적인 인재(人災)였다. 즉 이익달이 “풍랑 때문에 바다로 나가서는 안된다”는 경험많은 부하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훈련을 강행했다가 참변을 부른 것이다. 효종은 “보고를 듣고 서글퍼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다”며 “이익달 등 관련자들을 엄중 문초하라”고 지시했다. 조선시대 조운선을 복원한 모양. 을 근거로 만들었다. 태..
'신라-당나라' 연승 바둑 최강전 바둑을 일컫는 말은 여러가지다. ‘난가(爛柯)의 전설’(“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지 모른다”)에 등장하는 ‘신선놀음’이 바로 바둑을 지칭힌다. 또 ‘손으로 나누는 대화’라 해서 ‘수담(手談)’, ‘앉아서 은둔한다’는 뜻의 ‘좌은(坐隱)’, 흑돌과 백돌을 의미하는 ‘오로(烏鷺·까마귀와 해오라기)’ 등…. 땅은 모나고 하늘은 둥글다는 지방천원(地方天圓)에서 유래된 ‘방원(方圓)’, 근심을 잊게 한다는 것에서 ‘망우(忘憂)’ 등의 이름도 있다. 경주 분황사 출토 통일신라시대 바둑판 모양 전돌. 가로 세로 각각 15줄을 넣었다. 길이 42cm, 너비 43cm. ■바둑의 기원 그런 바둑의 기원은 4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요임금의 고사이다. 요 임금에게는 단주(丹朱)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변이 없..
조선 외교관 피살사건의 전모 일본을 방문한 조선사절단 가운데 ‘계미사행단’이 있다. 계미년인 1763년(영조 39년)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온 사절단을 일컫는 말이다. 이 계미사행단은 사절단장(정사)인 조엄(1719~1777)이 대마도에 들러 고구마 종자를 들여온 것으로 유명하다. 고구마는 대표적인 구황작물이다. 좋지않은 기상조건에서도 수확할 수 있기 때문에 굶주린 백성들의 배를 채울 신기한 작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엄이 이끈 계미사행의 으뜸인 공이 고구마 최초도입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계미사행단의 일본방문은 우여곡절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여정이었으니…. 무엇보다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조선외교관이 일본인에게 피살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조선외교관 살인사건의 내막을 한번 풀어보자. 1763년 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