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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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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기록에 나타난 명량해전의 진실 영화 이 요즘 히트를 치고 있다. 그렇다면 세계해전사에 빛나는 명량대첩을 옛 문헌들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영화 명량을 보기 전에, 혹은 본 후에 , , , , , , , 등에 나타난 명량해전의 기록들을 읽어보자. 간단히 말하자면 명량해전은 1597년(선조 30년)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10여 척의 전선으로 적함대 133척을 맞아 거둔 대첩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은 일본인 간첩 요시라의 이간질에 녹아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경질하고 원균을 기용한다. 그러나 원균은 왜적의 전술에 말려 대패하고 만다, 조선은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 강토는 또한번 왜적의 침략에 분탕질되고 만다. 1597년 8월 조선 조정은 권율 도원수 밑에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시킨다. 영화..
시진핑이 언급한 '인물탐구' “한국의 고대시인 허균의 시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속마음을 매번 밝게 비추고(肝膽每相照), 티없이 깨끗한 마음을 시린 달이 내려 비추네.(氷壺映寒月)’.” 7월 초, 한국을 국빈 방문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서울대 강연에서 한·중 친선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허균(1569~1618년)의 시를 인용했다. 시 주석은 그러면서 “이 시구는 바로 중국과 한국의 친선과 우의를 상징하는 것”이라 했다. 이 시는 허균이 정유재란 때 명나라 지원군의 일원으로 파견됐다가(1597년) 귀국하던 오명제에게 보낸 ‘송별시’이다. 허균의 송별시, 즉 ‘참군 오자어(오명제의 호) 대형이 중국 조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送吳參軍子魚大兄還天朝)’를 더 보자. 중국의 3대 음악가로 꼽히는 정율성. 전라도 광주..
끔찍했던 1592년 4월 15일 1731년(영조 7년),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은 경악할만한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동래성 수축을 위해 땅을 파다가 임진왜란 때 묻힌 것으로 보이는 백골들을 다수 발견한 것이다. 숫자는 최소 12명이었다. 포환(砲丸)과 화살촉들이 백골의 사이에 띠를 이뤘다. 당시 정언섭이 건립한 ‘임진망전유해지총(壬辰亡戰遺骸之塚)’의 비문을 보라. “전후에 발굴된 유골 수는 대개 열둘이지만 이는 특별히 그 형체와 해골이 완연한 것이고, 그 잔해의 조각조각이 떨어져 부스러진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에 숙연해진 정언섭은 백골들을 수습한 뒤 비문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제전(祭田)을 설치했다. 정언섭은 이에 그치지 않고 향교에 넘겨 해마다 유생들에게 그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동래성에서 확인된 20대 ..
'정몽주으리', 포은은 '의리!'의 조상이다. “간신 정몽주가…정권을 잡고서 전하(태조 이성계)를 도모하려 하다가 (1392년) 4월 4일 참형을 당했는데….”( 1392년 12월 16일조) 조선의 개국공신 조준이 올린 상소문이다. 조준은 포은 정몽주를 ‘간신’이라 일컫고 있다. 당연했으리라. 정몽주야말로 역성혁명의 최대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정몽주는 조준의 언급대로 태조 이성계를 죽이려고까지 했으니까…. 개성 선죽동 정몽주의 집터에 있는 숭양서원, 1573년(선조 6) 개성유수 남응운이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고 서경덕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개성 선죽교 위쪽 정몽주의 집터에 서원을 세우고 문충당(文忠堂)이라 했다. ■이성계에겐 '양정(兩鄭)'이 있었다 원래 정몽주와 이성계의 관계는 도타웠다. 1364년 2월 정몽주는 이성계를 처음 만..
판다 외교와 코끼리 외교 ‘판다외교가 재개됐다?’ 최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한국을 국빈 방문하면서 판다 한 쌍을 도입하기로 햇다. 지난해 6월 중국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 때 체결한 양해각서에 따라 기증된 따오기에 이어 두번째 동물외교이다. 중국이 이른바 ‘판다외교’를 펼친 예는 많다. 1941년 12월 중국 국민당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부인인 쑹메이링(宋美齡)이 미국 뉴욕 브롱크스 동물원에 한쌍을 기증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반일전선 구축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보낸 미국 정부를 향한 감사의 표시였다. 이후 국민당 정부가 무너지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대륙을 석구너한 이후에도 판다는 외교사절의 역할을 톡톡해 해냈다. 예컨대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의 역사적인 중국방문 때였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는 연회장 ..
고지쟁탈전에 흘린 젊은 넋들의 피 “정말 저기가 비무장지대가 맞나.” 강원 철원 홍원리 평화전망대에 오를 때마다 색다른 느낌을 갖는다. 비무장지대란 높고 깊은 산악지대, 즉 사람들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게 일반상식인데…. 그러나 철원은 해발 220~330미터 위 용암대지에 펼쳐진 드넓은 평원이다. 당장이라도 논에 들어가 농사를 짓고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평야를 품에 안고 있는 저편 고지와 능선의 이름, 그리고 사연을 알게 되면 나른한 평온이 깨진다. 전망대에서 맨 왼쪽에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백마고지다. 이곳에서는 1952년 10월6일부터 백마고지를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수 만 명의 인명피해를 주고받은 뒤 마침내 한국군 9사단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백마고지는 지금 민간인들은 갈 수 없는 남방한계선 ..
비무장지대엔 지하만리장성이 있다 “포격전이 한창일 때 F-80 제트전투 폭격기 편대가 나타나 공산군 진지에 네이팜탄을 쏟아부었다. 활활 타오느는 화염, 그리고 푸른 하늘 높이 뭉클 솟아오르는 소형 원자운 같은 버섯형 흑연. 유엔군은 공산군 진지 아래 병사들이 전부 불타 없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30분이 지나자 전멸했어야 할 공산군 진지에서 박격포가 날아왔다.” 1952년 불모고지 전투를 취재한 일본기자가 본국에 타전한 기사내용이다. 일본기자는 미군 장교의 말을 인용하면서 “산의 정상에서 20미터 쯤 내려온 공산군의 지하진지를 네이팜 탄이 완전히 불태울 수 없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대체 공산군 진지에 어떤 장치가 있었기에 이토록 철옹성이었을까. 아니면 이 지역에 만리장성이라도 구축했단 말인가. 그랬다. 정말로 중국군은 이른..
이승만과 김일성의 '합작 다리'를 아시나요 1950년 12월 30일 오전 11시. 기관사 한준기씨가 수색 차량기지를 출발했다. 개성역까지 가서 군수물자가 실린 화차를 달고 오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그러나 개성역에 도착하자 다른 명령이 떨어졌다. 북한 기관차를 인계받고는 다시 평양까지 올라가라는 지시였다. 하지만 31일 오전 1시. 열차가 황해도 평산 한포역에 도착하자 다시 급박한 소식이 들렸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후퇴가 불가피해지자 “다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한준기 기관사는 후진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후진으로 개성역에서 간 한씨는 다시 화차 25량을 끌고 파주 장단역에 닿았다. 31일 밤 10시쯤이었다. “기차를 멈추고, 기관차 승무원은 기차에서 내려 대기하라.” 남과 북이 시차를 두고 건설한 승일교. 북의 김일성이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