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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맹사성 투톱'을 죽을 때까지 부려먹은 세종의 용병술 “맹사성의 사람됨이 종용하고 간편하다. 선비를 예절로 예우하는 것은 천성에서 우러나왔다. 벼슬하는 선비로서 비록 계급이 얕은 자라도 뵙기를 청하면 반드시 관대를 갖추고 대문 밖에 나와 맞아들였다. 이어 손님을 상좌에 앉히고, 물러갈 때에도 역시 몸을 구부리고 손을 모으고서 가는 것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손님이 말에 올라앉은 후에라야 돌아서 문으로 들어갔다.”( 1438년 10월4일) ■‘배려심 갑 예절 남’ 재상님 청백리의 대명사이자 재상의 롤모델로 통하는 고불 맹사성(1360~1438)이 죽은 뒤 의 사관이 남긴 졸기(부음기사)이다. 교지연구가 김문웅씨가 공개한 ‘맹사성 왕지’. 1427년(세종 9년) 맹사성을 우의정에 임명한다는 임명장이다. 맹사성 이름 옆에 찍힌 확인점이 뚜렷하다. 맹사성은 이후 8..
'안사람의병단' 이끈 여성독립투사 윤희순의 의병가, 문화재 된다 “아무리 외놈(왜놈)들이 강성한들 우리들도 뭉쳐지면 외놈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 사랑 모를소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없이 소용있냐. 우리도 의병하러 나가보세. 의병대를 도와주세…”구한말 시아버지(유홍석 의병장)을 따라 독립운동에 나선 여성의병장 윤희순 선생(1860~1935)이 지은 의병가 ‘안사람 의병가’ 가사의 일부이다. 시아버지인 유홍석 의병장이 짓고 윤희순 선생이 필사해서 보급했다는 ‘안사람 의병가 노래’도 남아 있다. “…내집없는 의병대들 뒷바라지 하여보세. 우리들도 뭉쳐지면 나라찾기 운동이요, 왜놈들을 잡는거니 의복버선 손질하여 만져주세. 의병들이 오시거든 따뜻하게 안윽하게 만져주세…”라는 가사다. 윤희순의 중 ‘오랑캐들아 경고한다’는 주제의 격문. ‘조선의 안사람들도 의병..
'광대 얼굴의 보물 부처님, 어찌 복원 하오리까 ‘광대 불상’. 전북 익산 삼기면 연동리에 있는 석불사 법당엔 아주 희한하게 생긴 불상이 턱하니 자리잡고 있다. 신성한 법당 안에 모셨으니 꼬집어 말하기는 좀 ‘거시기’ 하지만 솔직하게 표현하면 전혀 불상 답지않은 얼굴생김새를 갖고 있다. 까놓고 말하면 우스꽝스러운 광대 분장을 한 불상 같은 첫느낌이다. 인자하거나 아니면 엄숙한 부처나 보살의 얼굴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이전 이 절의 주지스님 얼굴을 새긴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 정도다.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 좌상. 7세기 전반에 제작된 백제 시대 최대의 3차원 환조석불로 유명하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목이 달아났고 누군가가 새로운 불두를 얹어놓았다. 하지만 인자하거나 엄숙한 부처상도 아니고 '백제의 미소'를 구현하지도 않은 ‘광대 형상’의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
"쌍둥이 불상이었다", CT촬영으로 100년만에 물증 잡은 '오쿠라' 유물의 반출범죄 구한말 조선에 진출한 일본 실업가 중에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1837~1928)라는 인물이 있다. 1873년 일본에서 다이세이(大成)라는 회사를 차린 오쿠라는 청일전쟁 때 무기와 군수물자를 팔아 거부가 된 인물이다. 그래서 ‘죽음의 상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던 오쿠라는 구한말 부산으로 진출하여 고리대금업과 무역업을 겸하기 시작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중인 ‘건칠보살좌상’. 1915년 이왕가박물관이 일본인 골동상에게 사들인 유물이다. 그런데 이 유물과 짝을 이룬 보살좌상은 일본으로 반출됐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그런 오쿠라는 구한 말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백주대낮까지도 인부들을 끌고 다니며 조선의 고분을 도굴해서 1000여 점이 넘는 문화재를 일본으로 빼돌린 것으로 악명이 높다. 오쿠라가..
독일은 왜 불법반출 문화재를 돌려줄까 ‘아니 뭐 이런 유물 가지고….’ 오는 3월19일 독일 로텐바움 세계문화예술 박물관(이하 로텐바움 박물관·옛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에서 열리는 ‘한국 문화재 반환식’ 소식을 접하면 우선 ‘너무 오버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가 나올 법하다. 그도 그럴 것이 로텐바움 박물관과 함부르크 주정부는 물론이고 독일 연방정부까지 나서 반환결정을 내린 유물이 ‘고작’ 조선시대 문인석 1쌍(2기)이기 때문이다.독일 함부르크 로텐바움 박물관이 소장중인 조선시대 문인석. 1983년 독일인이 서울 인사동 골동상에서 구입한 뒤 불법반출한 것임이 뒤늦게 드러났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문인석은 고려·조선시기 능묘 앞에 세우던 문관 모습의 석인상이다. 유몽인(1559~1623)의 은 “조상의 묘 앞에 석인상을 세우는 이유는 공양..
'993년' 고려청자의 기준점이 된 '순화명' 항아리, 국보로 거듭난다 “건주의 차, 촉의 비단, 정요(定窯·송나라 때 정주에서 만든 자기)의 백자, 절강의 칠기, 고려 비색(청자). 오의 종이, 낙양의 꽃은 천하제일이다.”(洛陽花建州茶 高麗秘色此天下第一). 남송(1127~1279)의 인물인 태평노인은 에서 고려청자의 신비로운 빛깔(비색)을 당대 으뜸으로 꼽았다. 1123년(인종 원년) 200여년의 사절단을 이끌고 고려를 방문한 서긍(1091~1153) 역시 “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하는데, 근래에 들어 제작 기술이 정교해져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고 극찬했다.‘순화4년명’ 항아리. 고려 태조 왕건을 비롯한 선대 임금들의 제사를 위해 건립한 태묘(太廟)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제작된 왕실 제기(祭器)였다.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이렇듯 고려청자를 포..
'연봉 1000원으로는 턱도 없고 중국 간섭도 심하지만…' 이상재 선생의 다짐 “~빨리 부는 바람 같으니 날개 가진 새라도 못따르겠네.” 육당 최남선의 ‘경부철도가’(1908년) 가사처럼 철도는 개화기 근대 문명의 상징이었다. 증기를 뿜으며 씩씩거리고 달리는 육중한 몸체의 열차가 얼마나 빨리 달렸으면 ‘바람처럼 달려 날개 가진 새도 따를 수없다’고 했을까. 철도 역사의 효시는 1899년 9월 일본측이 완공하여 가영업을 개시한 인천~영등포간의 경인선이었다. ■‘바람보다 빠른 철도’의 역사 사실 구한말 조선 내에서의 철도부설권은 열강의 먹잇감이었다. 서구는 주로 경제적인 이유로, 일본은 대륙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철도부설권을 따려고 이전투구를 벌였다. 지금까지는 미국인 제임스 모스가 1896년 조선정부로부터 부설허가권을 취득했지만 자금난에 빠져 일본측에 170만원에 허가권을 팔아넘긴..
황현의 절명시와 한용운의 추모시, 105년만에 공개되는 사연 “어지러운 세상에 떠밀려 백발의 나이에 이르도록(亂離滾到白頭年) 몇번이나 목숨을 끊으려다가 이루지 못했네.(幾合捐生却未然) 이제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으니(今日眞成無可奈) 바람 앞 가물거리는 촛불 푸른 하늘 비추누나.(輝輝風燭照蒼天)… 새 짐승 슬피울고 바다와 산도 시름거리니((鳥獸哀鳴海岳嚬) 무궁화 세상은 다 망하고 말았네.(槿花世界已沈淪) 가을 등불 아래 책덮고 역사를 돌이켜보니(秋燈掩卷懷千古) 글 아는 사람 구실 어렵기만 하구나.(難作人間識字人)”매천 황현 선생의 ‘절명시’. 죽음으로 경술국치에 항거한 매천 선생의 칠언절구 한시이다. 이번에 처음 공개된다.|매천 황현 선생 후손 소장 우국지사이자 시인인 매천 황현(1855~1910) 선생이 1910년 경술국치를 맞아 식음을 전폐하다가 자결하면서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