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167) 썸네일형 리스트형 ‘헤어스타일 보니’…“백제금동대향로 5악사는 여성 전문 악단이었다” 위대한 발견은 어느날 불쑥 예고없이 찾아온 손님 같습니다. 그러나 곱씹어보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1971년 7월5일 송산리 6호분 배수로 공사중 인부의 삽날에 부딪친 것은 다름아닌 무령왕릉의 모서리 벽돌이었죠. 무령왕릉 발굴의 이면에는 소름돋는 에피소드가 있답니다. 일제강점기 공주 지역을 돌며 마구잡이로 파헤친 공주고보 교사 가루베 지온(輕部慈恩·1897~1970)의 이야기인데요. 그 가루베가 1931~33년 사이에 송산리 6호분을 무단 발굴했습니다. 그런데 가루베는 ‘송산리 6호분=무령왕릉’으로 오판했답니다. 6호분 바로 뒤에 구릉(진짜 무령왕릉)을 6호분의 수호신(현무)로 여겨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가루베가 이 진짜 무령왕릉을 멋대로 파헤쳤다면 .. 대체 '사경'이 뭐길래…화장실 갔다오면 '향수 목욕' 해야 했을까 “‘사경(寫經)’ 제작 전에 대소변을 보거나 누워 자거나 식사를 한 경우 향수로 목욕한 뒤 작업장에 들어가야 한다…” ‘사경’은 불경을 베껴 쓴 ‘경전’인데요. 754년(신라 경덕왕 13)에 제작된 가장 오래된 사경(·국보)에는 작업장에 들어가기 전에 치러야 할 경건한 의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초장부터 이상하죠. 이런 규정이라면 화장실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었겠네요. 또하나 인용할만한 기사가 에 있더군요. 유학자 최승로(927~989)가 982년(성종1) 올린 ‘시무28조’ 중 한 대목인데요. “신라 말 사경과 불상 모두 금·은을 사용해서 사치가 도를 넘었고 마침내 멸망에 이르렀습니다…그 관습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반드시 그 폐단을 혁파해야 합니다.” 최승로의 언급이 심상치 않죠. ‘사경 제작’을 신.. 남근형·구구단·신세한탄·가요·망부가…백제 '빅5' 목간 열전 종이가 발명(혹은 개량 또는 완성)된 것은 기원후 105년 무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종이는 오랫동안 폭넓게 쓰이지는 못했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듯 나무(혹은 대나무)를 활용한 목간(혹은 죽간)이 보편적인 서사자료였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책(冊)’이라는 한자는 목(죽)간을 매단 모습의 상형문자에서 비롯됐죠. ‘전(典)’자는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이죠. 사실 경제성과 내구성 측면에서 목(죽)간은 종이에 견줘 몇 수는 위였습니다. 왜냐. 목간은 주로 습기가 많은 우물이나 연못, 저수지, 배수지 같은 곳에서 집중 출토됩니다. 나무는 산소가 차단된 물 속에서 좀처럼 부식하지 않기 때문에 수백 수천년 동안 보존될 수 있거든요. ■‘구구단·남근형’ 목간의 정체 해방 이후 지금까지 확인된 삼국~.. 김부식도 천대했던 가야, 유네스코가 세계유산 대접해준 이유는? “1000년 전 김부식이 천대했던 ‘가야’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며칠전 한국의 ‘가야고분군’이 제45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7개 가야고분군은 유곡리 및 두락리(전북 남원)·지산동(경북 고령)·대성동(경남 김해)·말이산(경남 함안)·교동 및 송현동(경남 창녕)·송학동(경남 고성)·옥전(경남 합천) 고분군입니다. 유네스코는 “주변국과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독특한 체계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OUV)가 인정된다”고 평가했습니다. ■천덕꾸러기에서 백조로? 이 대목에서 저는 웃음이 나왔습니다. 생각해보십시요... 충무공이 찬 '큰 칼'은 '국보 장검'인가, '사라진 쌍룡검'인가, 아니면… 얼마전 ‘이순신 장검’(2점)이 국보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이 뉴스를 접하는 여러분들은 학창시절 배웠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시를 떠올렸을 겁니다. ‘한산섬 달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閑山島月明夜上戍樓)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撫大刀深愁時)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何處一聲羌笛更添愁)’ 삼척동자도 다 알 법한 ‘한산도가’ 입니다. 심화학습에 들어간다면 ‘한산도 야음(夜吟·밤에 읊다)’이란 시도 있죠. ‘넓은 바다에 가을 햇빛 저무는데(水國秋光暮) 추위에 놀란 기러기 떼 높이 나는구나.(驚寒안陣高) 근심스런 마음에 잠 못 이루는 밤(憂心輾轉夜) 새벽달은 활과 칼을 비추도다.(殘月照弓刀)’ 두 시에는 국운을 건 결전을 앞두고 밤잠을 이루지 못한 충무공의 노심초사가.. '칠(七)'자 기와에 '묻지마' 사적지정…'1500년 국제화약고였으니까'' 겨우 ‘칠(七)’라고 찍힌 명문 기와 조각이 나왔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덕분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2002년 1월) 산성이 있습니다. 경기 파주 적성 중성산(해발 148m)에 조성된 칠중성입니다. 변변한 발굴조사 한번 없었습니다. 1982~2022년 사이 6차례에 걸쳐 지표 및 정밀지표조사를 벌이는데 그쳤습니다. 다만 2000년 정밀지표조사 때 성 주변에서 수습된 유물 중 ‘칠(七)’명 기와조각이 나온게 눈길을 끌었습니다. 한데 문화재위원회는 “더이상 볼 것도 없다. 향후 발굴조사 할 필요도 없다. 곧바로 사적으로 지정하자”는 결론을 내렸답니다. ‘칠’자 명문 기와조각 1점 나왔다고 ‘묻지마 사적 지정’을 했다는 얘기인가요. 경솔한 결정이 아니었을까요. 꼭 그렇게만 볼 수 없습니다. 사실 ‘발굴조사’.. 왜군이 도굴·훼손한 조선왕릉…‘이릉의 치욕, 결코 잊지마라' 최근 조선왕릉과 관련해서 반가운 소식이 하나 들려왔습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40기의 왕릉 중에서 유일한 비공개릉이던 서삼릉의 효릉을 9월8일부터 일반에 개방한다는 겁니다. 효릉은 조선의 12대 왕인 인종(1515~1545, 재위 1544~1545)과 부인(인성왕후 박씨·1514~1578)의 무덤인데요. 비공개의 이유가 있습니다. 서삼릉의 다른 왕릉과 달리 효릉에 들어가려면 국내 농가에 젖소 종자를 공급하는 젖소개량사업소를 거쳐야 했거든요. 그래서 방역 문제가 걸려있어서 일반인의 출입이 곤란했답니다. 이번에 젖소개량사업소를 거치지 않는 관람로를 따로 마련해서 그 문제를 해결한거고요. ■정치적으로 조성된 서삼릉 서삼릉은 인종 부부의 ‘효릉’ 외에도 인종 친어머니 장경왕후(1.. '와르르 멸망한 발해'…"백두산 화산폭발이 방아쇠 당겼다" “오시(낮 12시쯤) 함경도 부령부와 경성부에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때때로 황적색의 불꽃 연기와 같으면서 비린내가 가득…마치 화로 가운데 있는 듯 뜨거워 견딜 수 없었다. 4경(다음날 새벽 3시 무렵) 후에야 사라졌다.” 1702년 5월20일자가 전한 6일전(14일) 백두산 화산 분화 소식입니다. “아침이 되니 (화산)재가 눈처럼 흩어져 내려 1치(3㎝) 정도 쌓였는데…강변의 여러 고을도 모두 그러했다….” 이 기록을 토대로 ‘1702년 백두산 분화의 강도와 화산재의 규모’를 검토한 논문(윤성효·이정현, ‘백두산 화산의 1702년 강하화산재 기록에 대한 화산학적 해석’, 2011)이 있는데요. 부령부와 경성부는 백두산에서 각각 똑같이 139㎞ 떨어진 곳(부령부는 동쪽, 경성부는 동남쪽)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전 1 2 3 4 5 6 ··· 2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