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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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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m 산수화에 그린 360명의 삶…200년전 조선의 ‘진경 풍속화’였다 요 몇년 사이 제가 본 국립중앙박물관의 대작 가운데 눈에 띈 작품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2020년 11월 공개된 ‘세한도’였는데요. 따지고보면 ‘세한도’(가로 70.4㎝×세로 23.9㎝)는 ‘작품이 뛰어나다’는 의미의 ‘대작’인 것은 분명하지만 ‘규모가 크다’는 뜻의 ‘대작’은 아니죠. 그러나 중국(16명)과 한국(4명)의 문사 20명이 달아놓은 감상평, 즉 시쳇말로 댓글 덕분에 작품도, 규모도 엄청난 대작이 되었습니다. 댓글까지 포함하면 전체 길이가 15m(가로 1469.5㎝×세로 33.5)에 달하거든요. ■실감컨텐츠로 8m 대작 산수화를… 그러나 순수 작품의 크기만 친다면 역시 그 해(2020년 7월)에 전시된 ‘강산무진도’가 압도적이죠. 조선후기의 대표화가인 이인문(1745~?)의 작품인데요. 작..
“오징어게임은 가라! 오백나한 납신다!”…호주도 열광한 ‘볼매’ 얼굴 ‘오징어게임은 비켜라-한국의 다음 주자는 나한이다.’(시드니모닝헤럴드) 지난해 12월부터 호주 시드니 파워하우스 박물관에서 열린 한국 관련 전시회가 누적관람객 23만명을 돌파하는 인기를 끌며 막을 내렸는데요. 국립춘천박물관이 소장한 고려시대 나한 석조상 50여점을 출품한 ‘창령사터 오백나한’ 전시입니다. ‘오징어게임은 가라-나한이 납신다’는 제목을 단 호주 일간지인 ‘시드니모닝헤럴드’는 “나한전은 2022년 가장 아름다운 전시중 하나”라고 소개했는데요. 신문은 “병약한 아내가 산비탈을 지나기만하면 몸이 좋아져서 이곳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절을 짓다가 오백나한상을 발견했다”는 비하인드스토리까지 소개하면서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나한상이 코로나로 지친 호주 관객들에게 힐링의 시간을 선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1500년전 무덤에 묻힌 개(犬)는?…신라인의 반려견, 가야인의 경비견 경남 창녕 화왕산(758m)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교동·송현동 고분군에는 모두 300여기의 무덤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가야연맹체 중 비화가야 지도자의 후예가 묻힌 고분군이죠. 그런데 이곳 창녕은 물론 고령·함안·김해·성주 등은 일제강점기부터 무단발굴과 도굴의 무대였습니다. 일제가 ‘가야지역에 존재했다’는 임나일본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거죠.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369~562년 사이 야마토(大和) 정권이 한반도 남부지역에 임나일본부라는 관청을 세워 200여년간 지배했다는 학설이죠. “남조선은 내궁가(內宮家·209년 일본이 신라정벌 후 설치했다는 관청)를 둔 곳이고, 조정의 직할지가 되어 일본의 영토가 된 일이 있다. 한국병합은 임나일본부의 부활이니….”( 1915년 7월24일) 하지만 ..
임금이 ‘궁궐 현판 쓴다’하면 “전하가 연예인이냐”고 욕먹었다 조선시대 관원들의 공무수행 공간이었던 창덕궁 궐내각사에는 약간 특별한 ‘현판’이 걸려있었습니다. 1725년 대은원이라는 전각을 수리한 내역을 새긴 건데요. 그런데 수리공사를 지휘한 것도 내시이요, 현판의 글을 지은 것도 내시이고, 글씨를 쓴 것도 내시였습니다. 아마 내시들이 머물렀던 건물이니 내시들이 수리공사의 모든 책임을 진 거죠. 그러나 내시가 궁궐 전각의 현판을 썼다는 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사례였죠. ■“초심을 잃으면 안됩니다” 현판은 왕조의 상징물이고, 그 상징물의 간판이죠. 국왕의 글씨 혹은 당대 최고 명필들의 글씨를 받아 장인들이 정교하게 새겼고, 화려한 문양과 조각으로 장식했습니다. 이중 왕과 왕세자의 글과 글씨가 상당수 남아있는데요. 현판에는 특별히 작은 글씨로 어필(御筆·임금의 글씨), ..
죄책감에 빠진 '백,제,왕,창'…0.08mm 초정밀 예술 쏟아냈다 제가 가본 문화재 발굴 현장 중에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곳이 있는데요. 2007년 10월 24일 부여 왕흥사터 발굴유물을 실견했을 때입니다. 절정기 백제예술의 정수를 보면서 넋을 잃었답니다. 과연 어떤 발굴이었는지 시간을 15년 전으로 돌려보겠습니다. 발표 2주 전인 10월10일이었습니다. 왕흥사 목탑터를 조사중이던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사단원들의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습니다. 목탑터 초석의 사리구멍을 막은 돌뚜껑(25㎝×15㎝×7㎝)이 노출되었는데요.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열자 흙탕물이 가득했답니다. 대나무칼로 조심스레 흙을 제거하자 글자들이 한자 한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백, 제, 왕, 창’ ‘정(丁), 유(酉), 년(年), 2월(二月), 25일(十五日)’. 이 목탑의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명문이 분명..
어전에서 방귀뀐 얘기까지…2억7420만자 실록·승정원일기의 X파일 저는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다가 포복절도할 기사를 보았습니다. 1601년(선조 34) 3월25일자인데요. 임금(선조)이 편전에서 왕세자(광해군)가 입시한 가운데 침을 맞았다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약방제조 김명원(1534~1602)·유근(1549~1627)·윤돈(1551~1612) 등이 있었구요. 우리가 잘 아는 허준(1539~1615)과 이공기·김영국(생몰년 미상), 허임(1570~1647) 등 어의와 침의 등도 총출동 했죠. 아무래도 임금을 치료하는 자리이니만큼 무겁고도 심각한 분위기였겠죠. ■어전에서 감히 방귀를? 그런데 실록기사 중에 ‘유근’이라는 분의 이름 뒤에 작은 글씨로 쓰여진 기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유근(임금의 지척에서 감히 방귀를 뀌었으니 이는 위인이 경솔한 소치이다.(咫尺..
형제간 알력 극심했다…실록이 밝힌 양녕대군 폐위, 세종 즉위의 전모 양녕대군(이제·1394~1462)과 관련해서 가장 인구에 회자된 이야기는 두 동생(효령대군·충녕대군)과의 일화일 겁니다. “옛날 양녕대군은 태종의 뜻이 충녕(이도·1397~1450)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미친 척했다. 어느날 야밤에 효령(이보·1396~1486)의 집을 찾아가 효령에게 귓속말을 하고 돌아왔다. 다음날 새벽 효령 역시 불가에 입문했다.”( 1603년 3월 9일) 야사모음집은 은 “뒤늦게 깨달음을 얻은 효령이 절간으로 뛰어가 북 하나를 하루종일 두들겼다. 지금도 부드럽고 늘어진 것을 ‘효령대군 북가죽’이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또 하나의 유명한 일화는 양녕대군이 “살아서는 왕(세종)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효령대군)의 형이 될 것이니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 1446년 4월23일자)이..
부러진 대롱옥 맞춰보니…백제판 '사랑과 영혼'의 약속이었네 2003년 9월이었습니다. 충남 공주 의당면 수촌리에서 농공단지 조성을 위한 사전 발굴조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조사는 1구역(1000평), 2구역(300평)으로 나누었는데요. 그런데 먼저 발굴한 1지역의 흙무덤에서 뜻밖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한국식 세형동검과 꺾창, 창, 도끼, 조각칼 등 청동기 세트가 노출된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이어 실시된 2구역 조사에서는 불과 300평 남짓한 구릉 한편에서 고분 6기가 노출되었는데요. 거기서 금동관 2점과, 금동신발 3켤레, 중국제 흑갈유도자기 3점, 중국제 청자 2점, 금동허리띠 2점, 환두대도 및 대도 2점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언론에서 ‘무령왕릉(1971년) 이후 최대 발굴’이라고 대서특필할 만 했습니다. 농공단지 터는 하룻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