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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본식 무덤이 영산강에 있을까-나주 복암리(중) 1996년 영산강 유역에 자리잡은 나주 복암리 3호분의 발굴성과는 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럴 만했다. 3m에 가까운 대형옹관이 잇달아 출토되고(26기), 금동신발과 장식대도, 은제관식 등 영산강 유역과 백제·일본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으니 말이다. 어디 유물만이랴. “3호분 한 분구에서 41기나 되는 다양한 무덤들이 나왔지. 목관묘-옹관묘-석곽옹관묘-수혈식석곽묘-횡구식석곽묘-횡혈식석곽묘, 뭐 이런 식으로 줄줄이 나왔어…. 어때요. 옛 사람들이 후손들을 생각해서 타임캡슐을 묻어둔 것 같지 않아?”(고고학자 조유전 선생) 그러고 보니 옹관의 생김새가 마치 캡슐 같기도 하다. 맞장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함평 신덕고분. 영산강 유역에는 5세기 말부터 약 50년간 이런 일..
혼용무도, 혼군인가, 용군인가, 폭군인가 해마다 이맘때만 되면 전세계적으로 발표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다사다난 했던 한 해를 정리해서 한글자나 한단어, 한문장으로 축약해서 발표하는 ‘올해의 단어들’입니다. 우리의 경우엔 교수신문이 한 글자가 아니라 사자성어로 한 해를 정리하는데 올해는 ‘혼용무도(昏庸無道)’가 꼽혔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어리석고 무능한 지도자가 무도한 정치를 했다는 뜻입니다. 너무 혹독한 평가가 아닐까요? 아니면 그런 평가를 당연히 받아야 했을까요. 팟 캐스트에서 ‘혼군과 용군, 그리고 폭군, 아니면 성군과 현군, 명군의 이야기’들을 들어보시고 평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61회 주제는 ‘혼용무도, 혼군과 용군 사이…’입니다. 문란한 지도자의 종류도 한가지가 아니다. 폭군, 혼군(昏君 혹은 暗君), 용군(..
고대사의 블랙박스 열렸다-나주 복암리(상) 1995년이었다. 전남 나주시는 영산강 중류, 즉 나주 다시면 너른 들에 자리잡고 있는 복암리 고분군(당시 전라남도 기념물 136호)에 대한 정비복원을 계획했다. 특히 이 가운데 3호분은 어느 종가의 선산이었는데, 주변 경작으로 계속 분구가 유실되어 나가자 복원계획을 세운 것이다. 기초조사는 전남대 박물관이 맡았다. “그때까지는 3호분을 비롯해 4기의 고분이 남아 있었어요.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칠조산(七造山)이라고 했어요. 분구(봉분)가 7개가 있었다는 얘긴데, 3기는 1960~70년대 경지정리로 삭평된 상태였죠.”(임영진 전남대 교수) 복암리 고분군 발굴모습 ■ ‘처녀분이다!’ 그 해 11월27일부터 한 달간 실시된 당시의 조사(1, 2, 3호분)는 말 그대로 정비복원을 위한 기초조사였다. 정식발굴이..
대통령 수명이 짧다고? 새빨간 거짓말 “잦은 흉년 때문에 노심초사하느라 수염이 하얗게 셌다.” 1699년 숙종 임금이 어의에게 업무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의 병을 얻었다고 토로했다. 정조는 1799년 “백성과 조정이 염려되어 밤마다 침상을 맴도느라 늙고 지쳐간다”고 괴로워했다. 당선직후인 2009년의 오바마 대통령(왼쪽)과 2015년 오바마 대통령. 주름과 흰머리가 확연히 드러나 보인다. 1425년 병세가 위중했던 세종은 만일의 흉사에 대비해 관까지 미리 짜놓고 명나라 사신단을 맞이했다. 죽음을 무릅쓴 외교였던 것이다. ‘만기친람’이라는 말도 임금이 하루에 처리해야 할 일이 만가지(萬機)라 해서 나온 것이다. 하버드 의대 아누팜 제나 교수팀은 “1722~2015년 사이 선거에서 승리한 17개국 지도자(대통령·총리) 279명과 낙선한 261명을 ..
지구는 끝내 지옥별 금성의 운명을 따를건가 얼마전 일본의 금성 탐사선이 금성 궤도에 진입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 보도를 계기로 천의 얼굴을 가진 금성 이야기에 흠뻑 빠져보겠습니다. 금성은 낭만적인 별이 아닙니다. ‘천관서’를 보면 “금성이 낮에 나타나면 변란이 일어나 백성들이 유랑한다”고 했습니다. 정말로 변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종종 금성이 대낮에 나타나거나 금성일식 혹은 금성월식이 일어났습니다. 금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면 조정에 난리가 났습니다. 신하들은 “임금이 부덕한 탓”으로 돌렸습니다. 조선 중후기 문신 조익(1579~1655)은 “임금을 향한 백성들의 원망이 금성의 주현 같은 천문의 이변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했습니다. ‘백성의 원망을 풀어주면 자연히 하늘의 노여움도 풀릴 것’이니 임금은 몸과 마음을 되돌아 반성하면서 선정을..
2000년전 동북아의 교역중심지-해남 군곡리 1983년 3월 어느 날. 황도훈이라는 해남의 향토사학자가 있었다. 해남문화원장을 지내면서 고향 땅을 답사하는 것을 여생의 일로 삼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군곡리 마을을 지나던 황씨의 눈길이 멈췄다. 무슨 옹관 같은 유물이 눈에 띈 것이었다. 게다가 불에 탄 흔적도 있었다. ■ 2300년 전 음식물 쓰레기장 ‘이건 야철지 아닌가.’ 독학으로 고고학을 배우던 그의 눈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는 행장을 꾸려 서울로 올라가 서울신문사를 찾았다. “회사 논설위원 중에 해남 사람이 있었는데, 황도훈씨와 친구였지. 그 인연으로 우리 신문을 찾아온 거지요.”(황규호 전 서울신문 기자) 황 기자는 즉시 황도훈과 함께 해남으로 내려갔다. 최성락 목포대 교수와도 연락이 닿아 함께 군곡리 현장으로 달려갔..
기황후, '고려판 한류' 열풍의 주역 < “공녀로 뽑혀 원나라로 끌려가는 날 옷자락을 부여잡고 끌다가 엎어집니다. 울부짖다가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스스로 목을 매 죽는 자도 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원나라의 간섭이 극에 달했던 1335년이었습니다. 이곡(李穀·1298~1351)이 상소문을 올려 원나라가 강제로 뽑아가는 공녀(貢女)들의 피맺힌 사연을 호소했습니다. 말 그대로 ‘공물(貢物)’로 끌려가는 여인이었으니 얼마나 비극적입니까. 끌려간 소녀들의 상당수는 고된 노동과 성적인 학대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한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1333년 14살의 나이로 끌려간 기씨 소녀가 바로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소녀의 첫 직책은 원 황제 순제(재위 1333~1372)의 차와 음료를 주관하는 궁녀였습니다. 소녀는 단번에 황제의 넋을..
마릴린 먼로와 플레이보이 앨프레드 킨제이의 , 즉 킨제이 보고서는 1948년 출간 두 달 만에 20만부 이상 팔렸다. 일리노이대 재학생이던 22살 청년 휴 헤프너에게도 충격적이었다. 청도교적인 가정에서 자랐고, 여자친구와도 임신이 두려워 실제 성교를 번번이 포기해야 했던 ‘불타는 청춘’이 아니었던가. 그는 “킨제이는 성에 대해 우리가 위선자라는 것, 그것으로 많은 상처를 받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고 회고했다. 졸업후 고교 동창생과의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았던 헤프너는 포르노 파티나 외도 같은 성적인 모험주의로 끓어오르는 열망을 풀었다. 그것만으로 허전함을 채울 수 없었다. 헤프너는 자신의 열정과 상상력을 표현할 매체를 창간하기로 결심한다. 주제는 ‘섹스’였다. 이름도 ‘스태그파티(stagparty·남자만을 위한 파티)’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