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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서소 주인이 사상 첫 신라 금관 발굴(1921년)을 주도했을까 한국의 대표 문화유산이라면 훈민정음(국보 70호), 금동반가사유상(국보 78·83호), 석굴암(국보 24호), 백제금동대향로(국보 287호)와 신라금관을 꼽을 겁니다. 금관 중에서는 1921년 발굴된 첫번째인 금관총 금관(국보 87호)을 으뜸으로 칠 겁니다. 하지만 이 금관총 발굴이 당시 경주에서 ‘대서방’ 주인이었던 일본인 비전문가가 주도한 ‘아마추어 발굴’이었다는 기막힌 사실을 아십니까. 또 사상 처음으로 금관이 모습을 드러내자 일본학계는 “우리(일본) 영토 안에서 처음 발견된…”이라고 흥분했답니다. 정말 통탄할 노릇이죠. ■아마추어가 3~4일만에 후딱 판 금관총 시간을 1921년으로 경주로 되돌려 볼까요. 경주 노서리 마을을 순찰하던 미야케 요산(三宅與三) 순사(경주 경찰서)의 눈에 3~4명의 아이..
오랑캐 황제 그림 확보하고, 사진속 사진서 광화문 문배도 찾고…국외소재 유물추적자들의 분투 문화재청 산하기관인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서 해외에 있는 문화재들을 추적해서 기증 혹은 구입 환수하는 케이스가 늘고 있다. 최근 정조 연간에 오랑캐 황제의 사냥모습을 그린 ‘호렵도’를 구입 환수했고, 설날 연휴에 광화문에 내건 황금갑옷을 입은 장군 그림을 그린 ‘문배도’ 역시 끈질긴 추적 끝에 복원된 것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끈질긴 추적으로 찾아내거나 복원한 문화유산들이다. ■오랑캐 황제의 사냥그림 ‘호렵도(胡獵圖)’라는 그림이 있다. 문자 그대로 오랑캐(胡)가 사냥(獵)하는 그림이다. 여기서 오랑캐라 함은 청나라(1616~1912)를 뜻하므로, 호렵도는 청나라 황제의 사냥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이 호렵도가 18세기 이후 조선에서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알다시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물웅덩이 속 금동대향로는 백제멸망 순간의 증거였다 1993년 10월26일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에서 이색적인 행사가 열립니다. 일본 규슈(九州) 미야자키현(宮崎縣) 난고손(南鄕村) 주민들이 이곳을 찾아와 제사를 지낸 겁니다. 뜬금없죠. 왜 남의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그것도 누구를 위해 제사를 지낸단 말입니까. ■일본 난고손 주민들의 고유제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다들 백제가 660년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했다고들 배웠겠죠. 그러나 백제는 3년을 더 버팁니다. 결국 663년 백제·왜 연합군이 나·당 연합군과 백강(금강?)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여 패하면서 거셌던 백제 부흥운동은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동북아의 운명을 건 이 국제전쟁은 1000척에 분승한 2만7000여 백제 부흥군·왜 연합군이 4차례 접전 끝에 완패하게 된 거죠. ..
‘4㎜의 반전매력’…1500년간 ‘흠결’ 숨긴 78호 반가사유상 “세상사가 힘들 때 찾아와 영혼까지 치유받고 간다”는 문화유산이 있다.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다. ‘반가사유’는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댄채 생각에 잠긴 자세를 가리킨다. 출가 전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고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부처의 출가전 이름) 태자를 조각한 상에서 유래했다. 6~7세기에 유행한 반가사유상은 30여 구 남아있는데, 그중 국보 78호와 83호가 으뜸이다. ■78호보다 83호? 물론 문화재, 그것도 국보의 우열을 가린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다. 그래도 피어나오는 객쩍은 질문 하나가 있다. 78호와 83호 중 딱 한 점을 꼽으라면 어떨까. 대체로는 78호보다는 83호를 선호할 것 같다. 무엇보다 83호가 일본의 국보 1호(조각부문)인 일본 고류지(광륭사·廣隆寺..
‘# 十’…경주서 발견된 광개토대왕 유물에 새겨진 비밀코드 1933년 4월 3일이었습니다. 경주 노서리에 살던 주민이 호박을 심다가 장신구 10여점을 발견했습니다. 즉각 신고가 이뤄졌고, 총독부 박물관은 발굴전문가로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1907~2011)를 급파합니다. 발굴결과 순금제 목걸이 33점과 곡옥·관옥·환옥 달린 목걸이, 순금제 귀고리 등 수십 여 점의 유물을 수습했습니다. 는 4월9일부터 20일과 21일까지 ‘고고학상 중대자료 희대의 귀고리 장식 발견’ 등의 제목으로 대서특필했습니다. 아리미쓰는 유물이 발굴한 곳을 노서리 140호분에 딸린 무덤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발굴은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한국-일본-미국 합작발굴 1945년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은 현해탄을 건너 귀국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해방후 국립박물관장이 된 김재원 박사(1909~1..
숭례문, 교과서와 공문서에서 ‘국보 1호’ 꼬리 60년만에 뗀다 국보 1호 숭례문, 보물 1호 흥인지문, 사적 1호 포석정…. 문화재의 서열화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은 문화재 지정번호 제도가 60년 만에 개선된다. 기존의 지정번호는 ‘내부관리용’으로만 활용된다. 이에따라 각종 고문서와 교과서 등에서 ‘국보 1호 숭례문’은 ‘국보 숭례문’으로, 보물 1호 흥인지문은 ‘보물 흥인지문’으로, 사적 1호 포석정은 ‘사적 포석정’으로 표현이 바뀐다. 문화재청은 최근 문화재 지정번호의 개선을 골자로 한 올해 주요업무계획을 발표했다. 김현모 문화재청장은 “문화재 지정번호로 문화재가 서열화되고 있는 일부 인식을 개선하고자 관리번호로 운영하고, 비지정문화재까지 포함한 보호체계를 새롭게 마련할 방침”이라고 배경을 밝혔다. 개선안에 따르면 문화재 지정번호는 완전 폐지되지는 않는다. 문화..
세종은 왜 큰아버지 정종에게 "정통성 없다" 낙인 찍었을까 조선을 다스린 임금 27분 가운데 무려 262년간이나 ‘임금’ 대접을 받지못한 분이 계신다는 거 아십니까.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44곳 중 40곳) 중에 폐위된 연산군(10대·1494~1506)·광해군(15대·1608~1623)묘와 함께 그 임금 부부의 능(후릉)이 빠졌답니다. 그거야 그 부부의 능이 북한 땅(개성)에 묻혀있으니 불가피하다 칩시다. 태조의 정부인이자 태종의 친어머니인 신의왕후 한씨(1337~1391)도 황해도 개풍에 묻혀있어서 제외되었으니 말입니다. ■아들이 15명이나 되었는데… 아니 그런데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대왕 조차도 그 분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답니다. 대체 어떤 분이기에 세종대왕에게도 인정받지 못했을까요. 자초지종을 풀어봅시다. 그 문제의 임금이 바..
백제의 '리즈' 시절을 웅변하는 석촌동 고분…100m 연접분의 정체는 “어, 이거 웬 구멍이야?” 2015년 5월, 서울 송파구 석촌동 고분군(사적 243호)을 관리하던 이가 이른바 석촌동 1호분의 북쪽 잔디광장에서 직경 25㎝의 동공을 발견했다. 순간 머리카락이 바싹 섰다. 고분군 밑으로 백제고분로 지하차도가 관통하고 있는데다 그 밑에서는 지하철 9호선 공사가 한창이었다. 도굴 가능성 뿐 아니라 당시 석촌호수 주변에서 심심찮게 나타나던 싱크홀일 수도 있었다. ■100m나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접분 한성백제박물관 조사팀의 시굴 결과 동공은 지하수 확보를 위해 팠다가 사적공원 지정 후 폐기된 우물터가 함몰되면서 발생한 것으로 파악됐다. 그런데 조사과정에서 의미심장한 현상을 목격했다. 관정 벽면에서 인위적인 석축열과 점토성토층이 드러난 것이다. 본격 발굴하자 깜짝 놀랄만한 유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