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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는 왜 통일왕국을 이루지 못한걸까…중앙박물관 특별전서 알아보는 이유 ‘공존과 화합’. 가야는 고대 한반도 남부에서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의 틈바구니에서도 520여년간 둥지를 틀고 살았던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부식(1075~1151)이 편찬한 에 포함되지 않는 등 상대적으로 홀대를 받아왔다. 지금까지도 동아시아의 기항지로서 번영을 누렸던 가락국(금관가야)이 왜 주변의 가야소국을 정치적으로 통합하지 않고 5가야 등의 연맹체에 만족했는지는 수수께끼라 할 수 있다.말탄 무사모양 뿔잔. 철의 나라 가야의 힘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국립경주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러한 가야 역사의 핵심을 ‘공존과 화합’으로 개념 정리하면서 3일부터 내년 3월1일까지 가야 역사와 문화를 재인식하기 위한 특별전 ‘가야본성-칼과 현’을 연다. 이번 전시는 2017년 6월 “소홀히 여겼던 가..
고무대야, 양동이에서 삼립빵봉지까지…무자비한 가야고분 도굴 흔적 ‘빨간 고무대야와 고무양동이, 그리고 삼립빵 봉지까지….’ 28일 경남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군 내에서 도굴의 화를 입지않은 63호분 덮개돌 개방행사를 현장취재하던 기자의 눈을 찌푸리게 한 장면이 있었다.제비뽑기로 TV 기자들을 위한 공개가 시작돼 신문기자들은 차례를 기다리던 차에 63호분 위에 조성된 39호분 발굴성과를 양숙자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으로부터 듣고 있었다. 5세기 후반 무덤으로 보이는 39호분은 교동·송현동 고분 250여기 중 세번째로 규모가 큰 무덤이다.창녕 교동 송현동 고분군 중 39호분애서 눈에 띈 빨간 고무대야와 고무양동이….무자비한 도굴으 흔적이다.창녕|이기환 선임기자 450~500년 사이 가야연맹의 소국 중 하나인 비화가야를 다스린 39호분의 주인공은 약 50년 가량 ..
1500년 만에 뜯어낸 미도굴 가야고분…유물이 와르르 지난달 20일 경남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군 중에서 63호분의 덮개돌을 확인한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발굴단원의 심장이 떨렸다. 무덤을 밀봉한 점질토, 그리고 그 점질토를 걷어내자 길이 2m의 평평한 돌 7개가 무덤을 덮고 있었다. 어떤 도굴구덩이도 보이지 않았다. 짐작은 했지만 과연 1500년 이상 도굴의 화를 입지않은 싱싱한 고분이 분명했다.28일 현장공개한 창녕 교동 송현동 고분 63호분 모습. 덮개돌을 들어올리자 토기류와 무구류, 피장자와 순장자 공간이 드러났다. 1500년만에 드러난 생생한 현장이다. 창녕|권도현 기자 “우선 휴대폰으로 무덤 내부를 들여다 봅시다.” 7개의 덮개돌 사이를 메워놓은 잔돌들을 걷어내자 틈이 생겼고, 그 틈 사이로 휴대폰을 밀어넣어 사진을 연신 찍어댔다.“무덤 안은 어두웠..
고종 내외가 '피겨스케이팅' 관람한 경복궁 향원정에서 온돌구조 확인 “1894년 겨울 꽁꽁 얼어붙은 향원정 연못에 서양 외교관 부부들이 모였다. 날달린 구두를 신고 지친다는 ‘빙족희(氷足戱)’가 무엇인지 궁금해한 고종이 시범을 보여달라고 청한 것이다.”이것은 조선을 방문한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이 경복궁 향원정에서 벌어진 빙족희, 즉 피겨스케이트 시범을 소개한 기록()이다. 이때 고종과 ‘빙족희’를 관람하던 명성황후(1851~1895)가 남긴 촌평이 자못 재미있다. “남녀가 손을 잡았다 놓았다 하는 게 꼭 사당패와 색주가들 같구나.”향원정 해체 복원 중 발굴된 온돌구조, 일반적으로 장바닥 전체에 여러 줄의 고래를 놓아 방 전체를 데우는 방식과 달리 향원정 온돌구조는 가장자리에만 난방이 되는 독특한 구조이다,|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그렇지만..
꿈 속에까지 나타난 '충주 고구려비'…"영락 7년(397년) 명문 읽어냈다" ‘영락7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 1979년 충북 중원(충주)에서 발견된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205호)는 고구려 광개토대왕 시대에 세운 제2의 광개토대왕비라는 근거자료가 제시됐다.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충주고구려비 발견 40주년을 맞아 지난 22일 동북아역사재단 대회의실에서 열린 고구려비 학술회의 발표문(‘충주 고구려비 판독문 재검토’)애서 “충주 고구려비문을 최첨단 기법, 즉 3D 스캐닝 데이터와 RTI 촬영으로 판독한 결과 맨 첫머리 제액에서 ‘397년(광개토대왕 영락 7년)’을 의미하는 연호(영락 7년) 등 8자를 읽어냈다”고 밝혔다. 고광의 연구위원이 읽어낸 글자들. 영락 7년, 즉 397년 광개토대왕 7년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동북아역사재단 제공■대박사는 안오고 소박사..
이항복 할아버지가 6살 손주에게 써준 천자문의 뜻 “정미년(1607년) 4월에 손자 시중에게 써준다. 오십 먹은 노인이 땀을 닦고 고통을 참으며 쓴 것이니 함부로 다뤄서 이 노인의 뜻을 저버리지 말지어다(丁未首夏 書與孫兒時中 五十老人 揮汗忍苦 毋擲牝以孤是意).”백사 이항복(1556~1618)은 ‘오성과 한음(이덕형·1561~1613)’ 설화로 유명한 분이다. 한음과 함께 실무능력이 탁월한 관료학자로 당색에 치우치지 않고 나라의 안위를 생각한 진정한 재상으로 알려졌다. 백사 이항복이 52살 때 6살 짜리 손자에게 직접 써준. 할아버지의 손주 사랑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그런 백사가 52살 때 6살 손자(이시중·1602~1657)에게 손수 써준 이 있다. 백사는 이 천자문을 써준 뒤에 “50살 노인이 힘들게 쓴 것이니 할아비의 뜻을 저..
'가공인물 아니다' 선화공주를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이유 필자는 10년 전인 2009년 1월 19일에 벌어진 ‘난리법석’을 잊을 수 없다. ‘미륵사, 선화공주와 무관하다’ ‘백제 무왕의 왕후 사택씨가 창건’ ‘서동요 설화 재검토 필요’ 등이 신문 제목으로 쏟아진 날이니 말이다. 그럴 만도 했다. 그 날 ‘미륵사지 서석탑(국보 제11호)의 해체 보수과정에서 석탑의 조성 이력을 밝히는 명문 금제사리봉안기가 확인됐다’는 제목으로 전해진 전북 익산 미륵사발 발굴자료는 두 눈을 의심케했다.“백제 왕후인…좌평 사택적덕의 딸이…깨끗한 재물을 희사해서 가람을 세우시고…기해년(639년) 정월 29일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2009년 미륵사 서탑에서 나온 명문사리기. 서탑을 조성한 이가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자 백제왕후인 ‘사택씨’였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에 등장하는 ‘서동..
연암 박지원도, 추가 김정희도 울고갈 '시서화 삼절' 자하 신위는 누구인가 “송나라 시가 소동파를 으뜸으로 삼는다면 우리 한국의 시는 마땅히 신자하(자하 신위·1769~1847)를 으뜸으로 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문(文)은 연암(박지원·1737~1805)에게서 망했고 시는 자하에게서 망했고, 글씨는 추사(김정희·1786~1856)에게서 망했다.”자하 신위와 아들 명준·명연 등 삼부자가 합작한 두루마리 작품 .|국립중앙박물관 제공이 모두 19세기 시·서·화 삼절이라 일컬어졌던 자하 신위를 두고 한 말이다. 뭐 첫번째 인용문은 자하의 시를 첫손가락으로 쳐준다는 뜻이지만 두번째 인용문, 즉 '문'은 연암에게서, '시'는 자하에게서, 글씨는 추사에게서 망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이 세사람이 각각 시·서·화에서 너무나 엄청난 성취를 이뤘기 대문에 후학들이 더 발전시킬 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