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1372) 썸네일형 리스트형 시진핑 어록과 마오쩌둥 어록 “마오(毛) 주석의 책을 읽고, 마오 주석의 명령에 따르고, 마오 주석의 지시대로 행동하며, 마오 주석의 훌륭한 전사가 되자.” 1960년 9월 14일 린뱌오(林彪) 중국 군사부장은 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 ‘마오쩌둥(毛澤東) 개인숭배’를 선동했다. 린뱌오는 “옳은 것은 유물론이고, 마오 사상”이라면서 “마오 동지 저서의 학습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습득하는 지름길”이라고 역설했다. 린뱌오는 1961년 5월부터 인민해방군 기관지(해방군보)에 연재한 마오쩌둥의 어록을 골라 (1964년)을 출판했다. 문화대형멱 당시 홍위병들이 마오쩌둥의 라이벌인 류사오치(유소기) 국가주석을 향해 빨간 마오쩌둥 어록을 흔들며 조롱하고 있다. 1966년 8월 18일 한 여중생이 마오의 팔에 홍위병 완장을 끼워주면서 문화대혁명의 본.. 독일 청년 페히터와 북한 병사의 탈출기 “살려주세요!” 1962년 8월 17일 동독의 18살 청년 페테 페히터가 친구 헬무트 쿨바이크와 함께 탈출을 시도하였다. 둘은 장벽 인근의 목공소 건물 속에 숨어있다가 창문을 통해 ‘죽음의 띠(Death Strip·동독이 만들어놓은 무인지대)’로 뛰어내렸다. 두사람은 ‘죽음의 띠’ 구역을 가로질러 철조망이 설치된 2m 벽을 넘어설 찰나였다. 뒤늦게 알아차린 동독 경비병들이 마구 총을 쏘아댔다. 쿨바이크는 철조망을 통과했지만 페히터는 그만 마지막 순간 엉덩이에 총을 맞고 말았다. 서베를린 시민들은 이 탈출 장면을 목격하고 있었다. 페히터는 동독의 ‘죽음의 띠’ 구역으로 떨어져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동독 경비병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서독 경찰이 피를 흘리며 울부짖는 페히터에게 붕대를 던졌다.. 공자김치, 뇌물김치, 곤쟁이김치…김치열전 “무신년(1608년) 이후 잡채상서니 침채정승이니 하는 말들이 세상에 나돌았다. 이는 잡채나 침채를 상납해서 총애를 얻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신흠(1566~1628)의 에는 ‘잡채상서(雜菜尙書)’니, ‘침채정승(沈菜政丞)’이라는 말이 나온다. 즉 임금인 광해군에게 채소모듬음식인 잡채와 침채, 즉 김치를 뇌물로 상납해서 장관(상서) 혹은 재상이 되었다는 얘기다. 김치가 얼마나 귀한 대접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공자가 인상 쓰면서 먹은 김치 김치의 원형이 절임채소라면 공자도 김치를 먹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진나라의 여불위가 펴낸 ‘우합(遇合)’조에 그 사연이 등장한다. “주나라 문왕이 창포저를 매우 좋아했다. 그 말을 들은 공자는 얼굴을 찌푸려가며 (창포저를) 먹었는데 3년이 .. 남한산성은 결코 함락당하지 않았다 남한산성하면 우리들의 뇌리에 치욕의 산성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조선 인조가 오랑캐 나라인 청 태종(太宗)의 대군에 밀려 남한산성으로 피했다가 결국 무릎을 꿇고 항복한 곳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한산성을 찾는 사람들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심지어 무너진 산성의 석축 벽이라도 보수할라치면 “뭐가 자랑이라고 아까운 세금을 들여 보수하느냐”면서 거세게 항의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남한산성에서 45일간이나 항전하던 인조가 왜 삼전도(三田渡)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했을까 한번쯤 곰곰 되씹어볼 필요가 있다. 남한산성에서 발굴딘 한성백제 시기의 장란형 항아리. 남한산성은 한성백제 도읍인 위례성(풍납토성)의 배후에서 백제를 수호하는 진산이자 성산의 역할을 했다. ■비상시에 대비한 요새 남.. 북한 병사의 기생충. 1960~70년대의 기억 기생충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parasite)는 ‘다른 이의 음식상을 빼앗아먹는 사람’이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됐다. 다른 사람이나 동물의 영양분을 쪽쪽 빨아먹고 산다는 얌체 습성이 부각되는데다 그 생김새마저 혐오스러우니 ‘기피생물’의 지탄을 받았다. 오죽하면 지금까지도 ‘이 기생충 같은~’이라는 유구한 세월동안 전해내려왔겠는가. 사람 몸속의 회충은 하루에 20만개의 알을 낳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의식주 가운데 옷도, 잠자리도, 먹을 것도 해결되는 판이니 오로지 ‘생산’에만 전념할 뿐이다. 1963년 10월 9살 짜리 여아에게서 1063마리의 회충이 나왔다는 기사. 그런 탓인지 회충의 몸 대부분이 생식기로 채워져있다. ‘얌통머리 없는’ 미물이 아닐 수 없다. 1931년 5월 12일 신문기사를 보.. 죽고 못산 '평생 베프' 겸재와 사천의 필살 '콜라보' “너와 나는 합쳐야 왕망천이 될텐데(爾我合爲王輞天) 그림 날고 시(詩) 떨어지니 양편이 다 허둥대네.(畵飛詩墜兩翩翩) 돌아가는 나귀 벌써 멀어졌지만 아직까지는 보이는구나.(歸驢己遠猶堪望) 강서에 지는 저 노을 원망스레 바라보네.(초愴江西落照川)” 얼핏 보면 먼 길을 떠나보내는 님을 배웅하는 연인의 이별시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첫머리의 ‘너’를 ‘자네’로 돌려 번역하면 단순한 남녀 간의 이별시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시에 등장하는 왕망천은 당나라 대시인이자 문인화의 창시자인 왕유(699~759)의 별장이 있었던 곳이다. 왕망천은 곧 왕유를 지칭한다. 그런데 소동파(1037~1101)는 시와 그림이 모두 능한 왕유를 일컬어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 겸재의 인왕제색도는 임종을 앞둔 '베프'를 위한 작품인가 겸재 정선(1676~1759)과 사천 이병연(1671~1751)의 브로맨스는 필설로 다할 수 없다. 그러다보니 겸재의 작품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인왕제색도’를 둘러싼 논쟁도 흥미진진하다. 겸재의 75살 작품인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는 한여름 소나기가 내린 뒤의 인왕산 풍경을 그린 것이다. ‘금강전도’와 함께 겸재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국보(제216호)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미술사학자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등은 이 그림을 겸재가 위독한 지경에 빠진 절친 사천의 임박한 죽음을 애도하려고 그린 작품이라고 해석했다. 겸재의 대표작인 ‘인왕제색도’. 몇몇 미술사학자들은 겸재가 임종을 앞둔 평생지기 사천(이병연)을 위해 그린 작품이라고 해석한다. 이 그림은 소나기 내린 뒤의 인왕산 모습을 그린 것인데, .. 시(習)황제와 하루 황제 명·청 시대 궁궐인 자금성(紫禁城)은 서양에서 ‘금지된 도시(Forbidden City)’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리 잘된 번역이 아니다. 출입금지를 뜻하는 금(禁)자와, 도시(City)로 번역된 성(城)자만 강조되었을 뿐이다. 서양인들의 눈이 ‘자(紫)’자가 지닌 심오한 동양의 사고체계를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에 그려진 자미원. 천황을 중심으로 각 별들이 호위하고 있는 모습이다. |출처|이학동의 ‘북경성 자금성의 형성원리’, 제9권 2호, 2009 고대 동양에서는 하늘의 별을 삼원(三垣)과 28수(二十八宿) 등으로 구분했다. 북극성 주변의 별자리를 나눈 삼원은 ‘천상열차분야지도’에도 표시된 자미원(紫微垣)·태미원(太微垣)·천시원(天市垣)이다. 이 중 북극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별자리가 .. 이전 1 ··· 77 78 79 80 81 82 83 ··· 17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