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1360) 썸네일형 리스트형 '드라이브 스루(Drive-Thru) 조문'과 손편지 조문 “상주를 알면 조문하고 죽은 사람을 알면 애도한다.” 동양의 예법서인 는 조문(弔問)과 애도(哀悼)의 차이를 명확하게 구분했다. 원나라 시대의 학자 진호는 “조문은 “조문은 예의를 갖추어 위문하는 것이고, 애도는 진심으로 가슴 아파하는 것”이라고 부연설명했다. 따지고보면 법도를 갖추어 망자와 망자 가족을 위로하는 일은 쉽지않다. “조문은 원래 단순히 상주를 위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망자가 흙에 묻힐 때까지 도와줘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동양의 조문절차가 매우 엄격한 것 같다. 하지만 진호의 언급대로 ‘예의와 진심’을 담는다면 그리 번거로울 것도 없는 예법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재(1680~1746)의 관혼상제 참고서인 은 “상가에서 전(奠·장례 때 올리는 음식)은 슬픔과 정성을 귀하게 여기므로.. 무령왕비 빈전을 찾아 조문하다 1995년 충남 공주에서는 금강을 따라 공주~부여를 연결하는 백제큰길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해발 67m인 야트막한 산(정지산)을 절단할 참이었다. 이미 금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백제큰다리)의 교각공사는 진행중이었다. 그러나 공주는 웅진백제의 고도가 아닌가. 시 전체가 유적·유물밭이므로 함부로 훼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당연히 문화재지표조사가 선행되어야 했다. 지표조사는 국립공주박물관이 맡았다. 만약 정지산의 지표에서 유물·유구의 흔적이 보이지 않으면 절단 공사는 예정대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지산 주변에서 백제시대 유물이 채집되었다.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이듬해인 1996년 2월부터 정식발굴조사가 시작됐다. 발굴은 박물관에서 가장 젊은 학예사(이한상 현 대전대 교수)가 맡았다. 발굴이 진행될.. 핵실험-길주 지진, 백두산 화산폭발 방아쇠 당기나 거란은 925년 12월 독한 마음을 품고 발해 침공에 나섰지만 싱거운 승리를 거둔다. 보름도 지나지 않은 926년 1월 발해 임금 대인선(재위 906~926)이 무조건 항복했다. 가 전하는 항복의 순간은 치욕적이다. 대인선은 ‘흰옷을 입고 양을 끌고 또 신하 300여 명과 함께’ 항복한다. 발해(698~926년)는 15대 229년 만에 멸망했다. 이상한 일이다. 해동성국이라는 명성을 얻으며 승승장구했던 발해로서는 너무도 허망한 멸망이다. 고구려의 광활한 고토를 거의 대부분 차지했던 발해제국이 보름도 되지 않아 속절없이 무너진 것이다. 는 “발해의 민심이 멀어진 틈을 무혈입성했다”고 전했다. 10세기 화산폭발로 타버린 나무(탄화목). 이 탄화목 나이테의 중심연대는 933~934년 사이이다. 의문점이 생긴다.. '또 하나의 궁궐' 회암사는 왜 폭삭 무너졌을까 “천보산중(天寶山中) 회암사(檜岩寺) 보광명전(普光明殿) 사교각(四校角)~현금탁(縣琴鐸)~” 2000년 5월 어느 날 점심 무렵. 양주 회암사 6단지를 조사 중이던 경기도 박물관 발굴단원의 눈에 이상한 유물이 걸려들었다. 보광전 건물지 앞쪽에서 글자가 새겨진 청동유물들이 이리저리 흩어진 채 발견된 것이다. 현장책임자인 송만영(당시 경기도박물관 학예사)을 비롯한 발굴단은 명문 청동기의 출현에 아연 긴장했다. ‘천보산 중턱의 회암사 보광전 네 모서리에 달린 금탁’으로 시작된 명문 청동기에는 무려 134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명문은 “功德主 嘉靖大夫 判內侍府事 李得芬”으로 끝나는 공덕주 이득분의 발원문(發願文)이었던 것이다. 1997년 첫 발굴이후 처음으로 나온 ‘회암사’라는 이름이었으므로 눈이 번쩍.. 시진핑 어록과 마오쩌둥 어록 “마오(毛) 주석의 책을 읽고, 마오 주석의 명령에 따르고, 마오 주석의 지시대로 행동하며, 마오 주석의 훌륭한 전사가 되자.” 1960년 9월 14일 린뱌오(林彪) 중국 군사부장은 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 ‘마오쩌둥(毛澤東) 개인숭배’를 선동했다. 린뱌오는 “옳은 것은 유물론이고, 마오 사상”이라면서 “마오 동지 저서의 학습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습득하는 지름길”이라고 역설했다. 린뱌오는 1961년 5월부터 인민해방군 기관지(해방군보)에 연재한 마오쩌둥의 어록을 골라 (1964년)을 출판했다. 문화대형멱 당시 홍위병들이 마오쩌둥의 라이벌인 류사오치(유소기) 국가주석을 향해 빨간 마오쩌둥 어록을 흔들며 조롱하고 있다. 1966년 8월 18일 한 여중생이 마오의 팔에 홍위병 완장을 끼워주면서 문화대혁명의 본.. 독일 청년 페히터와 북한 병사의 탈출기 “살려주세요!” 1962년 8월 17일 동독의 18살 청년 페테 페히터가 친구 헬무트 쿨바이크와 함께 탈출을 시도하였다. 둘은 장벽 인근의 목공소 건물 속에 숨어있다가 창문을 통해 ‘죽음의 띠(Death Strip·동독이 만들어놓은 무인지대)’로 뛰어내렸다. 두사람은 ‘죽음의 띠’ 구역을 가로질러 철조망이 설치된 2m 벽을 넘어설 찰나였다. 뒤늦게 알아차린 동독 경비병들이 마구 총을 쏘아댔다. 쿨바이크는 철조망을 통과했지만 페히터는 그만 마지막 순간 엉덩이에 총을 맞고 말았다. 서베를린 시민들은 이 탈출 장면을 목격하고 있었다. 페히터는 동독의 ‘죽음의 띠’ 구역으로 떨어져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동독 경비병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서독 경찰이 피를 흘리며 울부짖는 페히터에게 붕대를 던졌다.. 공자김치, 뇌물김치, 곤쟁이김치…김치열전 “무신년(1608년) 이후 잡채상서니 침채정승이니 하는 말들이 세상에 나돌았다. 이는 잡채나 침채를 상납해서 총애를 얻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신흠(1566~1628)의 에는 ‘잡채상서(雜菜尙書)’니, ‘침채정승(沈菜政丞)’이라는 말이 나온다. 즉 임금인 광해군에게 채소모듬음식인 잡채와 침채, 즉 김치를 뇌물로 상납해서 장관(상서) 혹은 재상이 되었다는 얘기다. 김치가 얼마나 귀한 대접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공자가 인상 쓰면서 먹은 김치 김치의 원형이 절임채소라면 공자도 김치를 먹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진나라의 여불위가 펴낸 ‘우합(遇合)’조에 그 사연이 등장한다. “주나라 문왕이 창포저를 매우 좋아했다. 그 말을 들은 공자는 얼굴을 찌푸려가며 (창포저를) 먹었는데 3년이 .. 남한산성은 결코 함락당하지 않았다 남한산성하면 우리들의 뇌리에 치욕의 산성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조선 인조가 오랑캐 나라인 청 태종(太宗)의 대군에 밀려 남한산성으로 피했다가 결국 무릎을 꿇고 항복한 곳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한산성을 찾는 사람들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심지어 무너진 산성의 석축 벽이라도 보수할라치면 “뭐가 자랑이라고 아까운 세금을 들여 보수하느냐”면서 거세게 항의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남한산성에서 45일간이나 항전하던 인조가 왜 삼전도(三田渡)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했을까 한번쯤 곰곰 되씹어볼 필요가 있다. 남한산성에서 발굴딘 한성백제 시기의 장란형 항아리. 남한산성은 한성백제 도읍인 위례성(풍납토성)의 배후에서 백제를 수호하는 진산이자 성산의 역할을 했다. ■비상시에 대비한 요새 남.. 이전 1 ··· 75 76 77 78 79 80 81 ··· 17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