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

(1360)
인조, 죄가 없다면 광해군에게 돌을 던져라 인조반정 세력이 광해군을 쫓아낸 명분은 크게 3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폐모살제였습니다.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하고 10년간이나 유폐시킨 죄와 8살짜리 이복동생(영창대군)을 죽인 죄 등을 물었습니다. 또하나는 임진왜란으로 불탄 궁궐을 중수하면서 백성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는 죄였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배반하고 오랑캐(후금)와 화친한 죄였습니다. 세가지 죄상 중 첫번째, 즉 폐모살제는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큰 죄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두번째 궁궐의 중수도 보기에 따라서는 잘못된 내정으로 지탄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의 업적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임진왜란 때 분조(分朝)의 책임자로서 전국을 돌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왜군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를 모집했습니다. 또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무릅쓰..
훈민정음 '낙장' 미스터리 은 예의와 해례로 나뉜다.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되는 ‘예의’는 한글을 만든 이유와 한글의 사용법을 설명한 것이다. 이나 등에도 실려 있다. 그러나 1930년대 말까지 한글 창제의 원리와 용법을 설명한 ‘해례’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고대 및 범자, 혹은 몽골문자 기원설은 물론이고, 어이없게도 화장실 창살 기원설까지 등장했다. 1940년 간송 전형필(1906~1962)이 경북 안동에서 기와집 10채값을 주고 ‘예의’와 ‘해례’가 모두 실려있는 원본(사진)을 구입했다. 원본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세종의 한글 창제 신화는 자칫 물거품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간송은 500년 만에 찾아낸 기화(奇貨)를 얼마나 아꼈던지 한국전쟁 중에도 품에 안고 다녔고, 잘 때도 배개속에 넣었다. 이렇게 극적으로 ..
조선판 쇼생크탈출…광해군 일가의 비극 “폐위된 광해군이 이틀 동안이나 대궐안에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속히 대궐 밖으로 끌어내 안치하라.” 인조반정이 일어난지 이틀 뒤인 1623년 3월 14일 인목대비가 앙앙불락했다. 철천지 원수인 광해군이 대궐에 있는 꼴을 도저히 볼 수 없다고 새 임금(인조)과 반정공신들을 다그친 것이다. 심지어 인목대비는 “내가 두 번 절하고 청한다”고까지 했다. “역괴 혼(琿·광해군의 이름)이 아직도 대궐에 있다. 하늘과 땅 사이에 한 시각도 용납 못할 대역죄인을 어찌 편히 앉혀놓고 있느냐. 경들은 종묘사직을 위해서라도 빨리 안치시키도록 하라. 그런 후에야 (서궁에 유폐된) 내가 대궐로 옮겨갈 것이다. 절대 소홀하게 처리하지 말라. 내 경들에게 두 번 절하며 청하노라.”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있는 광해군과 ..
비빔밥 외교와 양푼 비빔밥 비빔밥의 레시피는 1800년대 말엽의 음식조리서인 에서 처음 등장한다. “밥에 고기를 부쳐 썰고, 각색의 채소와 다시마 튀각을 부셔 놓고…깨소금·기름을 넣어 비벼서…위에는 계란을 부쳐…넣는다”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비빔밥의 유래가 뿌리가 깊었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이런저런 재료를 다 넣어 비비기만 하는데 번듯한 레시피를 남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제사를 지내고 남은 음식과,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아야 할 섣달 그믐날에 부엌 찬간에 남은 반찬을 어떻게 처리했겠는가. 농사철 아낙들이 이고간 새참을 어떻게 먹었겠는가. 아마도 큰 그릇에 밥(잿메)과 갖가지 반찬(혹은 제사음식)을 넣고 그냥 썩썩 비벼먹었을 것이다. 비빔밥은 얼마 전까지도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이..
'오프더레코드'까지 보도한 조선의 신문 지난 주에 1577년 8~11월 사이 발행된 선조시대 민간인쇄신문인 조보에 대해 알아봤다. 이 당시의 조보는 딱 100여일간 민간업자가 인쇄·발행·유료배포했다고 해서 유독 관심을 끌만 하다. 그러나 전통적인 의미의 조보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물론 선조시대의 100여일처럼 활자로 대량 인쇄되지 않고 필사의 형태로 배포되었다. ■“조보는 전쟁중에도 발행됐습니다” 조보가 문헌(조선왕조실록)에 정식으로 등장한 것은 조선조 중종 때였다. 즉 영사 성희안이 중종 임금에게 고한 내용 중에 있다. “1508년(중종 3년) 신(성희안)이 지난번에 북경을 떠나 요동에 도착했을 때의 조보(朝報)를 보니 논박을 받아 산관(散官·면직) 된 사람이 많았습니다.” 탄핵을 받아 경질된 신료들의 기사를, 그것도 요동땅에서 보았다는..
흥부는 연흥부도 박흥부도 아닌 장흥부였다? 은 판소리 ‘흥부가’에서 비롯된 판소리계 고전소설이다. 정·순조 시대의 명창인 권삼득(1771~1841)이 이 판소리 ‘흥부가’를 장기로 삼았다는 것으로 볼 때 18세기 이전부터 존재했음이 분명하다. ‘제비를 후리러 나간다. 복희씨 맺은 그물을 에후리쳐 둘러메고 망당산(방장산의 잘못, 지리산)으로 나간다.…후여 떳다 저 제비야…보물 박씨 물어다 천하부자 되어보자. 허허 저 제비.’ 권삼득의 제비몰이는 ‘흥부가’의 사설과 더늠(판소리 명창이 새롭게 만들거나 다듬은 소리대목)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된다. 이 ‘흥부가’와 의 발상지를 둘러싸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져왔다. 1860년대 간행된 경판본과 1870~73년작인 신재효(1812~1884)의 개작본은 경상·전라 혹은 충청·전라·경상도의 접도지역이라..
청와대 앞길, 육영수, 김신조… 1967년 어느 날, 코흘리개 어린이가 청와대 앞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저편에서 다가오는 까만색 승용차를 보고 손을 흔들었더니 창문이 열렸다. 어떤 아주머니가 고개를 쑥 빼더니 인자한 미소를 띄우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아주머니는 고 육영수 여사였다. 얼마 후인 1968년 1월 21일 밤 9시 무렵 청운동 언덕에 살던 어린이는 콩볶는 듯한 총소리에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한양도성도에 표시된 경복궁과 그 위의 회맹단 이튿날부터 헬리콥터가 북악산 상공을 돌며 ‘(무장) 간첩은 자수하라!’고 외쳤다. 생포된 북한 유격대원 김신조는 이렇게 외쳤다. “청와대를 까러왔수다. 박정희 목따러 왔시요.” 이것이 1·21사태다. 이후 청와대 앞길엔 ‘통행불가’의 딱지가 붙었다. 김영삼 정부 때(1996년 2월) 비로소..
1577년 선조는 왜 신문폐간을 명했을까 1577년 11월28일 선조가 분기탱천합니다. “어떤 자가 내 허락 없이 조보(조선시대 관보)를 발행했는가. 인쇄·배포한 자와 그것을 허가해준 자 모두를 색출하라”는 명이었습니다. 서슬 퍼런 선조의 명에 따라 30여 명의 조보인쇄발행업자가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유배형을 받았습니다. 그해 8월부터 약 100일간 민간인이 인쇄·발행·배포한 조보는 약 100일 만에 폐간되고 말았습니다. 조선시대 조보는 단순히 행정소식만 전하지 않았습니다. 임금과 대신들의 잘못을 따지는 상소문과 전국 각지에서 백성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 올리는 보고문, 그리고 임금 스스로의 책임론까지 고백하는 글까지 그대로 실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격인 승정원의 주서(7급 공무원)이 골라 편집한 것을 여과 없이 게재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