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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더레코드'까지 보도한 조선의 신문 지난 주에 1577년 8~11월 사이 발행된 선조시대 민간인쇄신문인 조보에 대해 알아봤다. 이 당시의 조보는 딱 100여일간 민간업자가 인쇄·발행·유료배포했다고 해서 유독 관심을 끌만 하다. 그러나 전통적인 의미의 조보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물론 선조시대의 100여일처럼 활자로 대량 인쇄되지 않고 필사의 형태로 배포되었다. ■“조보는 전쟁중에도 발행됐습니다” 조보가 문헌(조선왕조실록)에 정식으로 등장한 것은 조선조 중종 때였다. 즉 영사 성희안이 중종 임금에게 고한 내용 중에 있다. “1508년(중종 3년) 신(성희안)이 지난번에 북경을 떠나 요동에 도착했을 때의 조보(朝報)를 보니 논박을 받아 산관(散官·면직) 된 사람이 많았습니다.” 탄핵을 받아 경질된 신료들의 기사를, 그것도 요동땅에서 보았다는..
흥부는 연흥부도 박흥부도 아닌 장흥부였다? 은 판소리 ‘흥부가’에서 비롯된 판소리계 고전소설이다. 정·순조 시대의 명창인 권삼득(1771~1841)이 이 판소리 ‘흥부가’를 장기로 삼았다는 것으로 볼 때 18세기 이전부터 존재했음이 분명하다. ‘제비를 후리러 나간다. 복희씨 맺은 그물을 에후리쳐 둘러메고 망당산(방장산의 잘못, 지리산)으로 나간다.…후여 떳다 저 제비야…보물 박씨 물어다 천하부자 되어보자. 허허 저 제비.’ 권삼득의 제비몰이는 ‘흥부가’의 사설과 더늠(판소리 명창이 새롭게 만들거나 다듬은 소리대목)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된다. 이 ‘흥부가’와 의 발상지를 둘러싸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져왔다. 1860년대 간행된 경판본과 1870~73년작인 신재효(1812~1884)의 개작본은 경상·전라 혹은 충청·전라·경상도의 접도지역이라..
청와대 앞길, 육영수, 김신조… 1967년 어느 날, 코흘리개 어린이가 청와대 앞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저편에서 다가오는 까만색 승용차를 보고 손을 흔들었더니 창문이 열렸다. 어떤 아주머니가 고개를 쑥 빼더니 인자한 미소를 띄우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아주머니는 고 육영수 여사였다. 얼마 후인 1968년 1월 21일 밤 9시 무렵 청운동 언덕에 살던 어린이는 콩볶는 듯한 총소리에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한양도성도에 표시된 경복궁과 그 위의 회맹단 이튿날부터 헬리콥터가 북악산 상공을 돌며 ‘(무장) 간첩은 자수하라!’고 외쳤다. 생포된 북한 유격대원 김신조는 이렇게 외쳤다. “청와대를 까러왔수다. 박정희 목따러 왔시요.” 이것이 1·21사태다. 이후 청와대 앞길엔 ‘통행불가’의 딱지가 붙었다. 김영삼 정부 때(1996년 2월) 비로소..
1577년 선조는 왜 신문폐간을 명했을까 1577년 11월28일 선조가 분기탱천합니다. “어떤 자가 내 허락 없이 조보(조선시대 관보)를 발행했는가. 인쇄·배포한 자와 그것을 허가해준 자 모두를 색출하라”는 명이었습니다. 서슬 퍼런 선조의 명에 따라 30여 명의 조보인쇄발행업자가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유배형을 받았습니다. 그해 8월부터 약 100일간 민간인이 인쇄·발행·배포한 조보는 약 100일 만에 폐간되고 말았습니다. 조선시대 조보는 단순히 행정소식만 전하지 않았습니다. 임금과 대신들의 잘못을 따지는 상소문과 전국 각지에서 백성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 올리는 보고문, 그리고 임금 스스로의 책임론까지 고백하는 글까지 그대로 실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격인 승정원의 주서(7급 공무원)이 골라 편집한 것을 여과 없이 게재한 ..
부메랑 되어 돌아온 쓰레기섬 '헨더슨' 헨더슨섬은 남태평양 한가운데 떠있는 영국령 무인도다. 뉴질랜드, 칠레와도 5000㎞ 이상, 가장 가까운 마을과도 193㎞나 떨어져 있다. 1606년 스페인 탐험대의 발견 이후 종종 조난자나 탐험가의 발길이 있었다. 1820년 길이 20m인 초대형 향유고래에 받혀 난파된 포경선의 선원들이 이 섬에 닿은 적이 있다. 그러나 마실 물이라고는 염분 섞인 샘물이 한 곳 뿐이었다. 일주일도 못버티고 선원 대부분이 탈출했다. 정착을 택한 3명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구조됐다. 화장품 용기에 집을 짓고 사는 오막손참집게. 1851년 이 섬의 동굴에서 인골이 확인된 적이 있다. 그러나 방치되다 100년도 넘은 1958년에야 정밀 조사가 이루어졌다. 3~5살의 어린이를 포함한 서양인 5~6명인 것으로 드러났다. 조난 당한..
한마디 농담으로 세워진 나라가 있다 중구삭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말은 쇠(金)를 녹인다는 사자성어입니다. 유언비어의 무서움을 알려주는 말이고, 여론의 무서움을 시사하는 성어입니다. 어쨌든 말(言)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는 "말(舌)은 네 마리의 말(馬)이 끈 마차(駟)보다 빠르다"(駟不及舌)는 성어가 있을 정도입니다. 천하의 성인인 공자님도 제자앞에서 농담 한마디 잘못했다가 곤욕을 치렀습니다. 정색하고 따지는 제자앞에서 "농담이야! 농담!"하며 쩔쩔 맸습니다. 연산군은 술자리에서 한 승진약속을 지켰습니다. 중국 주나라 성왕과 코흘리개 동생(우)의 일화를 전하면서 "군주는 언제 어느 순간이라도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연산군이 인용한 주나라 성왕의 농담은 그 후유증이 엄청났습니다. 13살 짜리 어린 천자는 동생하고 소꿉..
미2사단 100주년을 위한 콘서트 유감 주한미군 2사단을 가리켜 ‘인계철선(引繼鐵線·클레모어 같은 폭발물과 연결되어 건드리면 자동으로 폭발하는 철선)’이라 했다. 한반도에서 위기상황이 발생하면 미2사단이 자동으로 개입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1917년 창설된 미2사단은 100년 동안 미 본토에서 40년, 유럽에서 4년, 한국에서 56년간 주둔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맨먼저 도착했고, 유엔군 가운데 맨처음으로 평양에 입성했다. 군우리 전투 때는 사단병력의 3분의 1을 잃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 2만4000여명의 인명피해를 냈으며,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때도 소속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한국과는 유독 인연이 깊은 한·미 동맹의 상징부대라 할 수 있겠다. 2002년 효순 미선양이 미군 장갑체에 깔려 숨진 뒤 사고현장에 표지석을 설치했다..
눈물(최루탄)을 수출하는 나라 1960년 4월11일 정오 무렵 마산 앞바다에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시신 한 구가 떠올랐다. 3·15 부정선거 시위에 참가했다가 행방불명된 김주열군(당시 17살)이었다. 오른쪽 눈에는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 이 끔찍한 사건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27년 뒤인 1987년 6월9일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던 연세대생 이한열씨(당시 22살)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뒤통수를 맞고 세상을 떠났다. 6·29 항쟁의 뇌관을 터뜨린 사건이다. 이 두 발의 최루탄은 독재시절 그 지난했던 민주화의 쓰라린 역정을 상징하는 ‘눈물탄’이었다. 1960년 3 15 부정선거 시위 때 행방불명된 마산상고 입학예정생 김주열군이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사진은 김주열 열사의 묘소를 찾은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