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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선…미완의 혁명가 궁예가 꿈꾼 세상 궁예라는 역사인물이 있습니다. 한쪽 눈을 잃은 비운의 영웅 쯤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일어서 한때는 삼한 재통일의 가도를 달렸으나 너무 과속하는 바람에 왕건의 고려세력에게 패한 인물쯤으로 말입니다. 미륵불을 자처하고 허황된 관심법으로 신하들은 물론이고, 부인과 자식까지 무참하게 죽인 폭군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궁예는 그렇게 단순하게 폄훼될 인물이 아닙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한때는 영원한 평등세상을 이루는 대동방국, 태봉국의 기치를 드높인 난세의 영웅이었습니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기에 폭군의 반열에 든 것일 뿐입니다. 또하나, 궁예가 웅지를 편 곳이 어딘줄 아십니까. 바로 철원의 드넓은 벌판, 지금은 비무장지대 안쪽인 풍천원입니다. 그 뿐입니까. 군사분계선, 즉 휴전선을 딱..
정종의 장남 '불노'와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 10조’ 중 3조는 ‘맏아들의 왕위계승 원칙’을 천명했다. ‘맏아들이 불초할 때는 둘째가, 둘째가 불초할 때는 형제 중에서…’라는 단서 조항도 따른다. 조선시대 들어 특히 ‘적자와 장자’의 의미가 강조됐다. 1차 왕자의 난(1398년) 후 정권을 잡은 이방원은 “적장자가 뒤를 이어야 한다”면서 둘째형인 방과(정종)을 옹립한다. 첫째형(방우)은 고려의 충신으로 남았던 인물이었고, 술병에 걸려 죽었다. 그래서 둘째인 방과가 적장자를 계승했다는 것이다. 태종의 속셈은 뻔했다. 정종과 정부인인 정안왕후 김씨가 묻혀있는 후릉. 정종가 정안왕후 사이엔 자식이 없었다. 정종은 9명이 첩으로부터 15남 8녀를 두었다. 그러나 동생인 이방원의 존재 때문에 슬하의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켰다. 둘째형..
독존신으로 거듭난 궁예왕 강원 평강에서 안변으로 향하는 경원선 길목에 삼방협(三防峽)이란 지명이 나온다. ‘上·中·下防’을 합한 말인데 북방의 적을 막은 천혜의 협곡. 금강산을 향하는 백두대간이 평강과 안변을 갈라놓았다. 얼마나 험한지 기차가 이곳을 지날 때는 바로 앞 역인 복개역에서 화차를 앞·뒤에 달아 지그재그로 오르내릴 정도였다. 그런데 조선 말기 지도인 ‘청구도’를 보면 바로 이 삼방협, 그것도 ‘중방’에 궁예왕의 묘가 분명히 표시돼있다. 1924년에 쓴 최남선의 ‘풍악기유(楓嶽記遊)’를 보자. “삼방개울을 끼고 철도용 수원발원지를 지나 남으로 오리쯤 가면 조그만 전우(殿宇)가 보이는 것은 태봉의 궁대왕을 숭봉한 곳인데~ 그 당우(堂宇) 뒤로 돌담같이 보이는 것은 석축 봉분의 남쪽 면이요, 그 북서 양면은 고제(古制)가 ..
부석사 금동보살상, 과연 솔로몬의 지혜는 없는가 최근 문화유산계를 뜨겁게 달구는 이슈가 있습니다. 바로 서산 부석사의 ‘금동관음보살좌상’입니다. 1330년 시주자 32명이 불심을 모아 제작한 불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불상은 700년 가까이 부석사에 없었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일본 대마도(쓰시마) 관음사(간논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불상이 한·일간 민감한 난제로 떠올랐습니다. 2012년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가 많으니 훔쳐와 팔면 큰 이득이 있을 것”이라고 범행을 모의한 한국 절도범 일당이 감쪽같이 훔쳐서 국내로 반입한 것입니다. 그 때 훔쳐온 것이 관음사의 금동관음보살좌상(일본 지방 유형문화재)과 해신신사(가이진 진사)의 금동여래입상(일본 국가지정중요문화재)이었습니다. 이 중 통일신라시기의 걸작인 금동여래입상은 일본의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돌고래 스트레스와 인간의 탐욕 2013년 1월 하와이 해안에서 가오리떼를 촬영하던 스쿠버다이버에게 돌고래 한마리가 다가왔다. 다이버가 돌고래의 접근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자 돌고래는 다이버에게 몸을 돌려 왼쪽 지느러미를 둘러싼 낚시줄과 입에 걸린 낚시바늘을 보여주었다. ‘치료해달라’는 구조신호 같았다. 2014년 울산 고래생태체험관의 수조에 갇힌 돌고래 모습. 서식범위가 300㎞ 정도인 돌고래는 좁은 공간에 들어가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다이버가 조심스레 돌고래의 몸에서 낚시줄과 바늘을 제거했다. 돌고래는 다이버가 작업하기 쉽게 몸을 돌려주었다. 호흡이 필요하면 수면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수중으로 들어와 다이버에게 몸을 맡겼다. 유튜브에 공개된 이 영상은 큰 화제를 뿌렸다. 돌고래가 위험에 빠진 자기 몸을 사람에게 맡길..
‘애모솝다’ '흐운하다'와 ‘낄끼빠빠’ '안궁안물' “네 형(자매)이 노리개를 나눠 가졌는데… 네 몫은 없으니… 악을 쓰더라도 네 몫의 것일랑 부디 찾아가라….” 여염집 부모가 주고받은 편지가 아니다. 조선조 효종 임금이 셋째딸 효명공주(1649~99)에게 보낸 한글 편지다. 외아들(현종)외에 딸 6명을 둔 딸부자였던 효종은 “하필 노리개를 나눠줄 때 너는 왜 없었느냐”고 짐짓 애달파하면서 “악다구니를 써서라도 네 몫을 찾으라”고 은근히 부추긴다. 효종이 숙명공주에게 보낸 한글 편지 지엄한 군주가 아니라 영락없는 여염집 ‘딸바보’의 모습이다. 예전엔 한글을 언문(諺文)라 낮잡아보고 부녀자나 쓰는 ‘암클’이라고도 했다. 한글을 모독하고, 여성까지 폄훼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면서 “(백성을 위해) 언문 28자를 지었다”고 했고, ‘재주있는 자는 하루아침에..
세종 시대와 정조 시대의 범죄자 처리법 “근래 기근이 겹쳐 도적이 흥행하고 분쟁이 더욱 성하여 사형수가 예전보다 배나 된다. 내가 부끄럽게 여겨 깊이 반성한다.” 1439년(세종 21년), 세종 임금이 치세에 사형수가 많다는 것은 부덕의 소치라고 반성한다. 그는 의정부에 “고의 살인이 아닌 과실치사와 전과 3범의 절도 등은 형량을 좀 감해주면 안되겠냐”고 하문한다. 미집행 사형수가 자신의 치세에서 190명에 이르자 특별사면령을 고려한 것이다. 하지만 영의정인 황희를 비롯한 대신들은 격론 끝에 ‘불가하다’는 의견을 모은다. 구한말 태형을 가하는 모습.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의 시대에 사형수가 190명에 달했고, 능지처사를 당한 이도 60명에 이르렀다. ■사형수가 190명이나 되다 “전하, 송나라 주희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벼운 형벌을 미덕..
신안보물선의 '닻', 그리고 도굴범 이야기 1972년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주민 최씨의 그물에 갈퀴 4개가 달린 쇠닻이 걸려 올라왔다. 길이 2m30㎝에 무게가 140㎏이나 되는 대형 닻이었다. 최씨는 “정치망 어장의 그물추로 쓰라”고 이웃 주민 박씨에게 건넸다. 박씨는 2㎞ 떨어진 죽도 해역까지 쇠닻을 끌고가 어장의 그물추로 썼다. 청나라 궁중화가 서양의 . 신안선과 같은 모양의 닻이 그려져 있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4년 뒤인 1976년 10월부터 신안앞바다에서 보물선의 본격 발굴이 시작되었다. 박씨의 동생은 4년 전 이웃 주민 최씨로부터 선물받은 쇠닻의 존재를 떠올리고 즉시 신고했다. 전문가의 감정결과 송·원나라 시대에 사용된 중국제 닻이었다. 쇠닻의 크기와 무게에 비추어 볼 때 신안선의 규모가 400t에 이르는 중국산 대형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