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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닥치고' 외교와 광해군의 ‘관형향배’ 외교 두 임금이 있습니다. 광해군과 인조입니다. 역사서는 광해군을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 이른바 ‘폐모살제’의 오욕을 뒤집어쓴 폭군으로 폄훼하고 있습니다. 반면 인조는 ‘어지러움’을 ‘바름’으로 바꿔놓은 ‘반정’의 주인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정세력이 공표한 인조반정의 명분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광해군의 외교실정입니다. 반정세력은 이른바 혁명공약에서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재조지은·再造之恩) 명나라에 배은망덕 했고, 사태를 관망하며 정책을 결정하는 외교(관형향배)로 오랑캐(후금)에 투항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면서 ‘명나라를 배반하는 것은 금수만도 못한 외교행위’라고 천명했습니다. 이렇게 공표해놓으니 더는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광해군은 후금과 명나라라는 강..
내가 강이고, 강이 곧 나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하쿠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본 이름을 빼앗긴채 늙은 마녀의 앞잡이가 된 인물이다. 하지만 하쿠는 길잃은 소녀 치히로를 도와준 고마운 존재가 된다. 어느 날 치히로가 백룡(白龍)으로 변한 하쿠의 등에 타고 돌아가던 중이었다. 불현듯 치히로의 뇌리를 스치는 장면이 있었다. 어릴적 물에 빠져 허우적댄 적이 있었는데, 죽을 고비에서 자신을 구해준 바로 그 강(江)이 ‘하쿠’였음을 깨달은 것이다. 치히로는 하쿠의 ‘잃어버린 이름’을 찾아준다. “하쿠야. 네 이름은 고하쿠강(江)이야.” 자신의 이름을 되찾은 하쿠는 온몸을 비늘을 날려보내며 자아를 되찾는다. 하쿠는 강이자,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쿠가 백룡으로 변한 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스토리전개가 아니다. 동양에..
빵과 장미, 그리고 여성 1789년 10월 5일 아침, 7000여 명의 여성시위대가 프랑스 파리 시내를 행진하기 시작했다. 터무니없이 높은 데다 공급마저 부족한 빵 때문에 고통을 받던 여성들이었다. 서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데 귀족들은 매점매석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곧 식량이 바닥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자 여성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을 반대하는 '여성들의 행진' 참가자들 이때 루이 16세의 부인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빵이 없으면 브리오슈(고급케이크)를 먹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비아냥댔다. 실은 가짜뉴스였다. 장 자크 루소가 1765년 자서전()을 쓰면서 ‘어느 왕비가 했다’고 운을 떼며 이 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1765년 불과 9살이던 앙투아네트가 이런 말을 했을 리 없다. 어쨌..
안종범 김영한 수첩도 사초다 “어젯밤 천둥·벼락을 동반한 폭우가 내렸는데도 그냥 넘어가십니까.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군주가 반성해야 하는데….”(이종성) “아냐. 난 듣지 못했어. 아마 내가 잠든 사이에 (천둥번개가) 친 모양이지. 근데 유신(이종성)은 소리를 들었는가.”(영조) 지금으로 치면 6급 공무원(이종성)의 질타에 최고 지도자(영조)가 쩔쩔매며 변명한다. 고 김영한 청와대 정무수석의 업무수첩. 1728년 10월 3일자 의 한 대목이다. 어느날 살인사건을 심리하는 엄중한 자리에서 신료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갔다. 그러자 영의정 이광좌가 ‘버럭’한다. “아니 대소변이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당하관들까지 줄줄이 나가버리다니 이런 법도가 어디 있습니까.” 영조는 “그래 너무 동시에 많이 나가버려서 나도 이상하게 생각했어”라고 맞장구친다...
경주 한복판에 확인된 광개토대왕의 체취 고고학자라면 흔히 영화 '인디애나 존스'에 등장하는 해리슨 포드를 떠올리고, 그 멋진 남자의 모험담을 연상하게 됩니다. 실제로 영화를 보고 학문의 길로 접어든 고고학도들도 제법 보았습니다. 그러나 고고학은 그렇게 낭만적인 학문은 아닙니다. 한여름철 뙤약볕에 앉아 행여 발굴되는 유물이 상하고 유구가 무너질까봐 트롤(꽃삽 같은 도구)과 붓으로 감질나는 작업을 펼칠 때가 많은 직업이니까요. 하지만 획기적인 유물이나 유적을 자기 손으로 찾아내는 그 벅찬 순간을 잊지 못하겠지요. 아마 그래서 고고학 하나봅니다. 이번 주에 아주 흥미로운 발굴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해방 이후 우리 손으로 처음 발굴한 유물이야기입니다. 비록 패망한 일본인 학자의 귀국을 막아선 끝에, 그것도 미군정청의 예산을 받아 시작했지만 그래도 한..
해시태그 운동의 시조는 광개토대왕이었다?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 1946년 5월 경주 노서동 140호 남분에서 흥미로운 청동그릇이 출토됐다. 그릇엔 을묘년(415년) 광개토대왕을 기리기 위해 제작했음을 알리는 명문이 있었다. 무덤은 ‘호우총’이라 명명됐다. 1946년 발굴된 호우총 청동그릇. 광개토대왕을 기려 그릇을 만들었음을 알리는 명문과 함께 #와 十 문양이 새겨져 있다. 정복군주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흔적이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확인됐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유물이었다. 그런데 그릇의 명문에는 70년 가까이 흘렀어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아직 숨어있다. 마지막 글자인 ‘十’자와, 명문의 윗부분에 비스듬히 새겨진 #자다. 1946년 발굴된 호우총 청동그릇. 광개토대왕을 기려 그릇을 만들었음을 알리는..
김응하 장군, 광해군 등거리 외교의 히든카드 -「충무공 김응하」,「요동백 김응하」 강원도 철원 대외리 5초소를 지나면 이른바 민통선 이북지역(민북지역)이다. 그러나 민북지역 잡지않게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논길을 따라 2킬로미터 쯤 달리면 동송읍 하갈리에 닿는다. 제법 그럴듯한 산소가 마주 보고 있다. 김응하 장군의 묘는 빈묘다. 요동전투에서 전사하는 바람에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명황제는 파병군 장수로서 장렬하게 전사한 장군에게 요동백의 작위를 내렸다. 형제의 무덤이다. 하나는 김응해 장군의 산소이고, 다른 하나는 김응하(金應河) 장군의 무덤이다. 형제는 용감했다는 말이 딱 맞다. 형(김응하 장군·1580~1619년)은 요동파병군을 이끌고 후금군과 접전을 벌인 뒤 전사했고, 동생(김응해ㆍ金應海 장군·1588~1666년)은 병자호란 때 청군..
이완용, 그는 왜 '독립문' 글씨를 썼을까 독립문을 아십니까. 서재필 박사가 조선의 자강독립을 위해 프랑스 개선문을 본따 만들었다는 그 독립문 말입니다. 그런데 이 한가지는 알고 계시니까. 독립문의 이마에 떡하니 새겨져있는 ‘독립문’ 편액을 누가 썼는지…. 독립문이니까 아마도 독립 투사 중 명필인 분이 쓰셨겠지요. 그러나 아닙니다. 저 ‘독립문’ 글씨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조선 귀족의 영수 후작 이완용 각하’였답니다. 제 얘기가 아니라 동아일보 1924년 기사에 나와 있는 표현 그대로입니다. 매국노와 독립문…. 이 해괴한 조합은 무엇일까요. 왜 하필 이완용이 ‘독립문’ 편액을 썼을까요. ‘독립문’을 공부하다보면 온갖 희한한 일들을 알게 됩니다. 서재필과 이완용이 말한 ‘독립’의 의미는 단 한가지였습니다.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이었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