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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오줌과 혈당 기원전 6~5세기 인도의 외과의사 수슈르타가 펴낸 의서 는 당뇨병을 ‘꿀오줌(madhumea)’이라 했다. 그러면서 “그 오줌이 달아서 개미와 곤충이 모여든다”고 부연설명했다. 카파도키아(터키)의 의사인 아레테우스(기원후 30~90년)는 “소변이 잦고, 목이 타서 견딜 수 없으며, 살과 뼈가 녹아 소변으로 나오는 듯한 이상한 질병”이라고 설명했다. 고대 중국과 아랍의 의학서들도 “빈뇨와 목마름, 무기력, 성기능 감퇴, 괴저 등의 증세가 일어난다”고 했다. 당뇨병 하면 세종 임금이 떠오른다. 유난히 육식을 좋아했으며, 몸도 뚱뚱했다. 상왕으로 물러난 아버지(태종)가 “제발 운동 좀 하시라”고 신신당부할 정도였다. 게다가 책 한 권을 최소한 100번 이상씩 읽었고, 하루에 20시간가량 국정을 돌보느라 몸관리..
교태전, 사정전, 그리고 청와대 경복궁에서 가장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궁전이 교태전이다. 왕비의 침전이다. 이름이 얄궂다보니 임금의 사랑을 얻으려는 왕비가 교태(嬌態)를 부리는 침실이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천만의 말씀이다. ‘교태(交泰)’는 에서 하늘과 땅의 사귐, 즉 양과 음의 조화를 상징한다. 임금과 왕비가 사랑을 나누고 후사를 생산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교태전(사진)이라 한 것이다. 창덕궁의 왕비 침전 이름은 대조전(大造殿)이다. 임금과 왕비가 만나 ‘큰 인물을 낳는다’(大造)는 뜻을 지니고 있다. 1395년 태조 이성계는 서울에 새 궁궐을 짓고 대대적인 잔치를 베풀었다. 태조는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정도전에게 “새 궁궐의 이름을 지으라”고 했다. 이때 정도전은 “(임금의) 술대접에 취하고 임금의 덕에 배부르니 후왕의 앞날..
청주에도 '풍납토성'이 있었다.(하) “속이 확 트이네.” 햇살이 따가웠던 2008년 9월. 청주 신봉동 유적을 떠난 고고학자 조유전 선생과 기자는 차용걸 교수(충북대)와 함께 북쪽 평야지대를 달렸다. 한 3㎞쯤 시원한 바람을 맞고 달렸을까. 눈길을 왼쪽으로 돌리는 순간 차 교수가 외친다. “저기가 바로 정북동 토성입니다.” 이런 곳에 토성이라니. 금강 최대의 지류인 미호천과 무심천이 합류하는 이른바 까치내의 상류 너른 평야지대에 조금은 생뚱맞은 자세, 즉 사각형 형태로 조성된 평지토성이다. 강(미호천)과 접해 있고, 조성된 해자(垓子)와 입지조건…. 신봉동 유적에서 확인된 갑옷 조각. 세모꼴과 긴 네모꼴 철판을 대가리가 둥근 못으로 짜 맞춘 것이다. -청주에 있는 풍납토성 성을 둘러보던 기자는 왠지 소름이 돋았다. “이거 풍납토성, 육계토..
도굴로 짓밟힌 ‘철강강국 백제’(상) “허허, 술 덕분이네.”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조유전 관장(토지박물관)과 차용걸 교수(충북대)가 껄껄 웃는다. 두 사람은 1982년의 일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 해, 그러니까 1982년 3월21일 일요일 아침. 차용걸 교수의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속도 영 메스꺼웠다. 전날 마신 술이 덜 깼기 때문이었다. 대학(충남대 사학과) 동창생인 심정보(한밭대 교수)·성하규(대전여상 교사) 등과 청주지역 답사에 나서기로 한 날. “원래는 청주 상당산성(백제시대 때 초축한 것으로 알려진 산성)에 오르기로 약속했었죠. 그런데 속이 울렁거려서 살 수가 있어야지. 도저히 산에 오르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상당산성 답사를 포기하고 (청주) 신봉동·봉명동·운천동의 낮은 야산을 산책 겸해서 둘러보기로 했어요.”(차용걸 교수..
타타르인의 노래 타타르(Tatar)라는 민족이 있다. 나디아 코마네치(루마니아)와 함께 1970~80년대 체조요정이었던 한국계 넬리 킴(본명 김경숙)의 어머니가 바로 타타르인이었다. 타타르는 동양에서 달달(달달) 등으로 일컬어졌던 몽골계 유목민의 명칭이었다. 그러다 점차 유라시아 터키계 혼혈 민족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확대됐다. 오늘날 550만명에 이르는 타타르인들은 러시아내 자치공화국인 타타르스탄을 중심으로 우랄 산맥 서쪽 볼가강과 그 지류에 살고 있다. 서양인들은 타타르인들을 보며 ‘악마’를 뜻하는 그리스어 ‘타르타로스(tartaros)’를 떠올렸다. 그만큼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1236~1480년 사이 몽골의 지배를 받던 240여년간의 식민 통치기를 ‘타타르의 멍에’라 일컫는다. 대량학살과 수탈..
피맛골 백자항아리, 무슨 사연 있기에… “도자기다!” 2009년 6월 서울 종로 청진동 ‘피맛골’ 일원을 발굴하던 한울문화재연구원 조사원들이 함성을 질렀다. 18세기 건물터를 약 2m 파내려 가던 중에 완벽한 형태의 백자항아리 3점(위 사진)을 발견한 것이다. “집 앞마당에 구덩이를 파서 항아리 3점을 가지런히 묻어놓았던 겁니다”(김홍식 원장). 갖가지 추측이 나왔다. 15세기 중후반의 작품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18세기 이 집의 주인이 백자항아리를 300년 이상 가보처럼 소장해왔다는 이야기다. 그러다 어떤 급변사태가 터져 집 앞마당에 구덩이를 파서 급히 묻어두고는 후일을 기약하며 떠난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어떤 사정 때문에 끝내 돌아오지 못한게 아닐까. 분명한 것은 백자 3점의 가치가 18세기에도 가보로 전해질만큼 보물급 대우를 받았다는 ..
재야사학자 안정복, "저울대로 역사를 쓰라" “는 내용이 소략해서 수많은 오류를 지니고 있다. 는 내용이 번잡하지만 요점이 적다. 은 의례가 크게 벗어났고….” 순암 안정복(1712~1791)이 평생이 역작인 을 쓴 이유를 조목조목 밝혔다. “그런데 이런 오류와 잘못을 그대로 답습하게 되는 것은 여러 역사서가 비슷하다. ~대저 역사가가 반드시 다뤄야 할 것은 계통을 밝히고(明統系), 찬역을 엄하게 하며(嚴簒逆), 시비를 바르게 하고(正是非), 충절을 포양하며(褒忠節) 전장(국가의 통치제도)을 자세히 하는 것(詳典章)이다.”( ‘자서(自序)’) 순암 안정복의 . 순암은 와 를 보완하려고 주희의 의 필법에 따라 을 저술했다. ■‘평생 재야사학자’ 돌이켜보면 ‘순암’이라는 이는 지금의 기준이라면 평생 ‘재야 사학자’의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무려 35살..
천세, 구천세, 만세…김정은의 만세12창 얼마전 북한의 제7차 노동당 대회 때 김정은 위원장에게 ‘만세’가 연호됐다고 합니다. 연설이 끝나자 12번이나 만세를 불렀다네요. 그만 하라는 손짓을 해도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만세 삼창’이 아니라 ‘만세 12창’이라 할까요. 그래서 제가 이 만세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아는 분은 알겠지만 군주라고 해서 다 ‘만세’라 할 수 없었다는군요. 황제에게만 ‘만세’라 할 수 있었다네요. 제후국의 임금에게는 ‘천세’라 했답니다. 내심 황제국을 자처한 고려의 경우 강화도 천도시절엔 ‘만세’라 했답니다. 물론 조선시대 들어서는 ‘천세’라 했다고 하고…. 그런데 중국에서는 천세도, 만세도 아닌 ‘구천세’의 칭호를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과연 누구일까요. 그는 왜 천세도, 만세도 아닌 구천세의 구호를 들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