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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영웅 크루이프의 죽음 네덜란드 축구영웅 요한 크루이프(68)는 스포츠계의 상식을 초월한 인물이다. 하루 80개비의 담배를 피우는 체인스모커였다. 경기 중 전반이 끝나고 하프타임 때가 되면 잽싸게 담배를 피워댔으니 말이다. 훈련도 빼먹기 일쑤였다. 시건방도 무진장 떨었다. 줄담배를 피워대고 훈련에 관심도 없으면서 “축구는 몸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게으른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밖에 없었다. 월드컵 축구를 시청하느냐는 질문에 “없다. 날 TV 앞에 앉혀놓을 유능한 선수가 없으니까…”라 너스레를 떨었다. 슈퍼스타의 상징인 9번이나 10번 대신 14번을 단 이유를 두고도 “9번은 디 스테파노, 10번은 펠레가 이미 달고 있으니까 헷갈릴까봐”라며 으쓱댔다. 그의 자부심 대로 그의 이름은 디 스테파노-펠레-크루..
감은사엔 문무왕의 사리가 있다 1997년 “감은사 동탑엔 문무왕의 사리가, 서탑엔 부처님의 사리가 각각 봉안됐다”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추정은 불교계를 뒤집어 놓았다. 우선 연구소 측의 주장. 문무왕은 처음으로 서역식 화장 장례를 도입한 ‘불심 깊은 왕’이었다. 왕을 화장했을 때 사리가 나왔다면 분명 그의 원찰인 감은사, 그것도 동탑에 봉안했을 것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감은사 동탑에는 문무왕의 사리가 봉안된 것으로 파악했다. 부처님의 사리가 봉안된 서탑과 어깨를 나란히했다는 주장이다. 서탑의 경우 사리병 장식물이 부처님의 열반을 향연하는 주악(奏樂)의 천인(天人)들인 반면, 동탑엔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한 문무왕의 분위기를 상징하는 호법신중(護法神衆)인 사천왕이 장식됐다. 문무왕은 재세기간동안 사천왕사를 건립했을 정도로 사천왕 사상과..
용이 되어 죽어서도 나라를 지킨 문무왕 “앗.” 탑을 바라보던 김재원(당시 국립박물관장)의 절망적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3층 석탑 해체를 위해 높이 12m, 사방 160㎝의 3층 탑신 위에서 일하고 있던 연구관 김정기(최근 작고)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3층 지붕받침돌을 연결한 나비장이음이 김정기의 무게 때문에 떨어지면서 옥개석이 기우뚱, 무너져 내렸다. 김정기 역시 추락사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순간 김정기는 기지를 발휘하여 탑 옆에 세워둔 비계목으로 건너뛰었다. “살았다.” 김재원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비명횡사할 뻔했던 김정기는 일본 메이지(明治大) 건축과를 졸업하고 도쿄대(東京大) 건축학 연구실에서 한국건축사를 연구하면서 일본의 사찰 터 발굴에 참여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김재원이 일제시대 때 약탈당한 우리 문화재 반환회담에 참..
고려시대 개경 8학군은 어디였을까 최근 중국발로 흥미로운 뉴스가 있었습니다. 베이징 뒷골목 원창(문창·文昌) 지역의 쪽방(11.4㎡)이 10억원 가까운 가격에 팔렸다는 소식입니다. 3.3㎡당 2억8000만원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집값이었습니다. 왜 일까요. 학군 때문입니다. 이 동네 이름이 우리 말로 ‘문창(文昌)’이라는 것도 ‘맹모삼천’을 부추겼습니다. 도교에서 ‘문창’은 ‘학문의 신’, ‘공부의 신’으로 추앙을 받고 있답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문창’을 모신 사당에 기도한 뒤 과거를 치렀답니다. 베이징의 문창, 강남의 대치동 같은 이른바 ‘교육특구’는 고려의 수도 개경에도 있었습니다. 해동공자의 별명을 갖고 있는 최충의 사립학교, 즉 문헌공도가 있었던 곳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지금의 대치동처럼 고려시대 유수 학원이 있었던 동네도..
이메일 @의 탄생 흔히 골뱅이로 통하는 @기호가 언제부터 사용됐는지 견해가 분분하다. 우선 상인들의 거래에서 흔히 쓰는 ‘each at~’을 ‘e 안의 a’로 표시한 상업부호(@)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다. 예컨대 ‘1달러짜리 사과 12개’임을 뜻하는 ‘12 apples @ $1’의 가격은 12달러지만, ‘1달러에 사과 12개’를 가리키는 ‘12 apples at $1’의 가격은 1달러이다. 14세기 성경 필사본에 표현된 @. 아멘의 a표시로 썼다. 상인들이 이렇게 헷갈리는 계산을 피하려고 @부호를 써서 구별했다는 것이다. 중세 성직자들이 라틴어 ad(at, toward, by, about)의 축약어로 @부호를 썼다는 주장도 있다. 즉 중세 성직자들은 수 천 쪽에 달하는 성경을 값비싼 파피루스나 가죽에 필사했다. 그 과정..
다산도 율곡도 당했던 조선의 신입생환영회 해마다 이맘 때만 되면 대학가가 몸살을 앓습니다. 이른바 신입생 환영회 때문이죠. 작년에도 어떤 대학에서 신입생들이 묶는 방 이름을 무슨 '아이 러브 유방'이니 '자아도 만져방'이니 짓고 이상한 춤을 추도록 강요한 일이 일어나더니 올해도 유사성행위를 묘사하는 몸동작을 제시하는 게임을 하고, 여학생을 암학생 무릎 위에 올려놓는 이상한 행동을 하다가 그 추태가 드러난 대학이 생겼습니다. 각 언론의 단골 제목은 '술에 찌든 대학' 뭐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세상물정 모르는 새내기들에게 술을 강제로 먹이고, 성희롱을 자행하며, 군기를 잡는 행위는 도댜체 어디서 배운 버릇일까요. 뿌리가 깊습니다. 기록에 나타난 바에 따르면 고려 우왕 때 처음 생긴 신입관리 신고식이 시간이 갈수록 추태로 변했답니다. 심지어 9번이나..
아하! 문외한도 이해하는 중력파 얼마전 아인슈타인이 100년 전 예견한 중력파가 마침내 검출됐다. 세계과학계는 우주를 보는 새로운 창이 열렸다고 흥분했다. 이후 수많은 전문가들이 중력파 검출의 의미를 열심히 설명했다. 하지만 너무 어려워서 눈에 침침하도록 들여다봐도 역불급이었다. 필자도 머리나쁨을 한탄하면서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러다 어떤 책에서 다소간 위안이 되는 구절을 찾았다. 아인슈타인도 중력이론(일반상대성 이론)을 체계화하는데 8년 이상 걸렸으며, 그 이론을 이해한 과학자가 전세계를 통틀어 12명도 안된다는 대목이었다. 무릎을 쳤다. 그래, 연작이 홍곡의 뜻을 그리 쉽게 알 수 있겠는가. 그렇게 고차원의 이야기를 고작 원고지 몇 장으로 정리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래도 중력파를 필자 같은 문외한의 눈높이에서 설명할 수는 있지..
선죽교 핏자국은 정몽주의 피인가 “선죽교에 낭자한 핏자국을 보고(善竹橋頭血) 사람들은 슬퍼하지만 난 슬퍼하지 않으리.(人悲我不悲) 충신이 나라의 위기를 맞아(忠臣當國危) 죽지않고 또 무엇을 하겠는가.(不死更何爲)” 1947년 백범 김구 선생은 개성 선죽교를 탐방한 뒤 비분강개했다. 만 35년 간의 일제강점기가 끝났지만 외세에 의해 두 갈래로 찢긴 나라의 처지를 생각하면 울컥했을 것이다. 특히나 선죽교 다리 위에 지금도 남아있는 듯한 포은 정몽주의 핏자국을 보고 시 한 수 떠올리지 않는다면 어찌 의리와 충절의 후손이라 하겠는가. 개성 선죽교.포은 정몽주의 절개를 상징하는 유적이다. 북한에서도 국보(159호)로 지정했다. ■"포은의 피로 진혼가를 쓰겠다" 150년 전 인물인 18세기 실학자 이덕무(1741~1793) 역시 그랬다.( ‘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