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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에 능통했던 이순신 가문 “중국말을 10년 배워도 중국현지에 두어 달 다녀온 사람만도 못합니다. 사역원에서는 마지못해 한어(중국말)을 한다해도 평상시에는 늘 우리 말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1442년(세종 24년) 사역원 제조 신개가 답답하다는 듯 아뢴다. 요컨대 중국어 교육이 잘못 되었으니 교육방식을 파격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역원 내에서는 공사를 의논하거나 밥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할 때 무조건 중국어를 쓰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이를 어기는 생도는 그 때마다 매질을 가하도록 하소서.” 신개는 그러면서 “만약 이를 지키지 못하는 자에게는 무거운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간언한다. 명나라 사신인 예겸(倪謙)과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1418~1456), 신숙주(1417~1475), 정인지(1396~1478) ..
어느 임금의 절규, '정신병이다. 나 좀 살려주라!' “마음의 병이 있습니다. 재앙이 오겠습니까.(有疾心 唯有害)” 은(상)나라 반경~무정 시대(기원전 1300~1192년)의 갑골문에 나오는 흥미로운 내용이다. 갑골문은 은(상)의 임금이 정사를 펼칠 때 미리 점을 친 뒤 그 내용을 거북껍질이나 소 어깨뼈에 새겨넣은 것이다. 이 갑골문에 표현된 ‘심질(心疾)’은 ‘지나치게 마음을 쓰거나 괴로움을 당해 생긴 질환(思慮煩多 心勞生疾)’( ‘소공’ 조)를 일컫는다. 그러니까 이 갑골문은 이미 3000년 전 표현된 ‘마음의 병’ 혹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호소한 기록인 것이다. 다른 갑골문에는 “대왕의 마음이 화평할까요?(王心若)”라고 묻는 내용도 있다. 대체 군주의 자리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점까지 쳐서 ‘마음의 병’ 혹은 ‘스트레스’를 다스리려고 했을까, 뭐 그..
옛 기록에 나타난 명량해전의 진실 영화 이 요즘 히트를 치고 있다. 그렇다면 세계해전사에 빛나는 명량대첩을 옛 문헌들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영화 명량을 보기 전에, 혹은 본 후에 , , , , , , , 등에 나타난 명량해전의 기록들을 읽어보자. 간단히 말하자면 명량해전은 1597년(선조 30년)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10여 척의 전선으로 적함대 133척을 맞아 거둔 대첩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은 일본인 간첩 요시라의 이간질에 녹아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경질하고 원균을 기용한다. 그러나 원균은 왜적의 전술에 말려 대패하고 만다, 조선은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 강토는 또한번 왜적의 침략에 분탕질되고 만다. 1597년 8월 조선 조정은 권율 도원수 밑에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시킨다. 영화..
400년 만에 현현한 허준 선생의 체취 “‘陽平○ ○聖功臣 ○浚.” 1991년 7월 어느 날, 민통선 이북에서 의성(醫聖) 허준 선생의 흔적을 찾아다니던 서지학자 이양재씨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양천 허씨’의 족보에서 시선을 잡아끈 허준 선생의 무덤 위치, 즉 ‘파주 장단 하포 광암동 동남’이라는 구절에 ‘꽂혀’ 10년 가까이 찾아 헤매던 때였다. 그가 발견한 것은 바로 ‘허준 선생’의 묘임을 입증하는 ‘양평군 호성공신 허준’이라는 두동간 난 비석이었다.(지금의 소재지는 경기 파주시 진돔면 하포리) 왜 호성공신(扈聖功臣)이란 수식이 붙었을까.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허준은 선조를 따라 의주 피란길에 오른다. 그런데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자 신하들이 줄줄이 임금을 팽개치고 뿔뿔이 흩어진다. 민통선 이북에서 발견된 허준 선생의 묘..
시진핑이 언급한 '인물탐구' “한국의 고대시인 허균의 시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속마음을 매번 밝게 비추고(肝膽每相照), 티없이 깨끗한 마음을 시린 달이 내려 비추네.(氷壺映寒月)’.” 7월 초, 한국을 국빈 방문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서울대 강연에서 한·중 친선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허균(1569~1618년)의 시를 인용했다. 시 주석은 그러면서 “이 시구는 바로 중국과 한국의 친선과 우의를 상징하는 것”이라 했다. 이 시는 허균이 정유재란 때 명나라 지원군의 일원으로 파견됐다가(1597년) 귀국하던 오명제에게 보낸 ‘송별시’이다. 허균의 송별시, 즉 ‘참군 오자어(오명제의 호) 대형이 중국 조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送吳參軍子魚大兄還天朝)’를 더 보자. 중국의 3대 음악가로 꼽히는 정율성. 전라도 광주..
경순왕, 지뢰와 비무장지대의 호위를 받다. 경순왕릉 가는 길은 언제나 서늘한 느낌을 준다. 한여름 찌는 듯한 무더위 속인데도 그렇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경기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에 닿아있는 곳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왕릉과 왕릉 가는 길을 잘 닦아놓고는 ‘민간인 통제선’에서 제외시켜 놓았으니…. 입구에서 왕릉까지의 길 양옆에는 ‘지뢰’ 표지를 단 울타리가 길게 펼쳐져 있다. 갈 때마다 섬뜩하다. 그 길을 100m가량 가면 시야가 확 트인다. 제법 새뜻한 모습의 왕릉이다. 왕릉을 빙 둘러싼 울타리가 예사롭지 않다. 그렇다. 저 울타리를 넘어가면 큰일 난다. 울타리 너머 손에 닿을 듯한 거리, 야트막한 성거산 능선이 바로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이니 말이다. 그뿐인가. ‘신라경순왕릉(新羅敬順王陵)’이라고 새겨진 명문비..
끔찍했던 1592년 4월 15일 1731년(영조 7년),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은 경악할만한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동래성 수축을 위해 땅을 파다가 임진왜란 때 묻힌 것으로 보이는 백골들을 다수 발견한 것이다. 숫자는 최소 12명이었다. 포환(砲丸)과 화살촉들이 백골의 사이에 띠를 이뤘다. 당시 정언섭이 건립한 ‘임진망전유해지총(壬辰亡戰遺骸之塚)’의 비문을 보라. “전후에 발굴된 유골 수는 대개 열둘이지만 이는 특별히 그 형체와 해골이 완연한 것이고, 그 잔해의 조각조각이 떨어져 부스러진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에 숙연해진 정언섭은 백골들을 수습한 뒤 비문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제전(祭田)을 설치했다. 정언섭은 이에 그치지 않고 향교에 넘겨 해마다 유생들에게 그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동래성에서 확인된 20대 ..
'정몽주으리', 포은은 '의리!'의 조상이다. “간신 정몽주가…정권을 잡고서 전하(태조 이성계)를 도모하려 하다가 (1392년) 4월 4일 참형을 당했는데….”( 1392년 12월 16일조) 조선의 개국공신 조준이 올린 상소문이다. 조준은 포은 정몽주를 ‘간신’이라 일컫고 있다. 당연했으리라. 정몽주야말로 역성혁명의 최대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정몽주는 조준의 언급대로 태조 이성계를 죽이려고까지 했으니까…. 개성 선죽동 정몽주의 집터에 있는 숭양서원, 1573년(선조 6) 개성유수 남응운이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고 서경덕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개성 선죽교 위쪽 정몽주의 집터에 서원을 세우고 문충당(文忠堂)이라 했다. ■이성계에겐 '양정(兩鄭)'이 있었다 원래 정몽주와 이성계의 관계는 도타웠다. 1364년 2월 정몽주는 이성계를 처음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