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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굴꾼은 상상도 못했다…목관 밑 '보물상자'에 담긴 2100년전의 삶 “다호리 일대의 도굴이 말도 못합니다. 심각합니다.” 1988년 1월 국립진주박물관이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심상치않은 제보 한 건을 올린다. 급보를 받고 달려간 이는 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전 문화재청장·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었다. 과연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현장이었다. 도굴꾼의 탐침봉 흔적이 사방팔방에서 확인됐다. 봉분이나 그 흔적이 남아있는 곳도 아닌 논밭이었는데도 그랬다. 실제 도굴이 자행된 구덩이가 논밭 일대에서만 40~50곳이나 보였다. 구릉 위까지 범위를 넓히면 100곳에 넘을 것으로 판단됐다. 한 곳 한 곳 확인해가던 조사단의 눈에 밟히는 도굴 구덩이가 있었다. 마을을 지나는 도로 남쪽에 붙어있는 논이었다. ■도굴범은 상상도 못했던… 깊이 1m 남짓한 구덩이에 도굴꾼이 채워놓은 ..
8.6m 산수화에 그린 360명의 삶…200년전 조선의 ‘진경 풍속화’였다 요 몇년 사이 제가 본 국립중앙박물관의 대작 가운데 눈에 띈 작품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2020년 11월 공개된 ‘세한도’였는데요. 따지고보면 ‘세한도’(가로 70.4㎝×세로 23.9㎝)는 ‘작품이 뛰어나다’는 의미의 ‘대작’인 것은 분명하지만 ‘규모가 크다’는 뜻의 ‘대작’은 아니죠. 그러나 중국(16명)과 한국(4명)의 문사 20명이 달아놓은 감상평, 즉 시쳇말로 댓글 덕분에 작품도, 규모도 엄청난 대작이 되었습니다. 댓글까지 포함하면 전체 길이가 15m(가로 1469.5㎝×세로 33.5)에 달하거든요. ■실감컨텐츠로 8m 대작 산수화를… 그러나 순수 작품의 크기만 친다면 역시 그 해(2020년 7월)에 전시된 ‘강산무진도’가 압도적이죠. 조선후기의 대표화가인 이인문(1745~?)의 작품인데요. 작..
“오징어게임은 가라! 오백나한 납신다!”…호주도 열광한 ‘볼매’ 얼굴 ‘오징어게임은 비켜라-한국의 다음 주자는 나한이다.’(시드니모닝헤럴드) 지난해 12월부터 호주 시드니 파워하우스 박물관에서 열린 한국 관련 전시회가 누적관람객 23만명을 돌파하는 인기를 끌며 막을 내렸는데요. 국립춘천박물관이 소장한 고려시대 나한 석조상 50여점을 출품한 ‘창령사터 오백나한’ 전시입니다. ‘오징어게임은 가라-나한이 납신다’는 제목을 단 호주 일간지인 ‘시드니모닝헤럴드’는 “나한전은 2022년 가장 아름다운 전시중 하나”라고 소개했는데요. 신문은 “병약한 아내가 산비탈을 지나기만하면 몸이 좋아져서 이곳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절을 짓다가 오백나한상을 발견했다”는 비하인드스토리까지 소개하면서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나한상이 코로나로 지친 호주 관객들에게 힐링의 시간을 선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림성 사랑나무' 너머로 읽은 백제 독립운동사 부여 하면 떠오르는 답사코스가 있다. 부여왕릉원(능산리고분군), 부소산성, 관북리, 궁남지, 정림사터, 낙화암, 백마강…. 사비백제(538~660) 123년 역사의 숨결이 담겨있는 곳이 아닌가. 결코 백제의 이미지를 벗어난 부여는 생각할 수 없으리라. 그런데 최근 ‘백제와 MZ 세대’를 아우르는 답사코스가 생겼다. ‘가림성 사랑나무’이다. 이름에서부터 역사성이 물씬 풍기는 ‘가림성’과, MZ 세대의 ‘인생사진 핫플’이 된 ‘사랑나무’가 어우러져 있으니 안성맞춤이 아닌가. 지난해(2021년) 10월 부여의 ‘루틴 코스’를 답사하다가 온라인상 ‘부여의 가볼만한 곳’에서 ‘가림성 사랑나무’를 발견했다. 새로움을 좇는 기분으로 성흥산(해발 260m)에 조성된 가림성(성흥산성) 정상부에 오르기 시작했다. 대체 어..
1500년전 무덤에 묻힌 개(犬)는?…신라인의 반려견, 가야인의 경비견 경남 창녕 화왕산(758m)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교동·송현동 고분군에는 모두 300여기의 무덤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가야연맹체 중 비화가야 지도자의 후예가 묻힌 고분군이죠. 그런데 이곳 창녕은 물론 고령·함안·김해·성주 등은 일제강점기부터 무단발굴과 도굴의 무대였습니다. 일제가 ‘가야지역에 존재했다’는 임나일본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거죠.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369~562년 사이 야마토(大和) 정권이 한반도 남부지역에 임나일본부라는 관청을 세워 200여년간 지배했다는 학설이죠. “남조선은 내궁가(內宮家·209년 일본이 신라정벌 후 설치했다는 관청)를 둔 곳이고, 조정의 직할지가 되어 일본의 영토가 된 일이 있다. 한국병합은 임나일본부의 부활이니….”( 1915년 7월24일) 하지만 ..
거대사찰 황룡사에 우뚝 선 '80m 랜드마크'와 '서라벌판 광화문 광장' “서라벌에 절이 별처럼 펼쳐져 있고 탑들이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다.(寺寺星張 塔塔雁行)” 가 전한 전성기 서라벌 시내 모습이다. 527년(법흥왕 14) 이차돈의 순교로 공인된 불교가 어느덧 ‘절과 절이 별처럼, 탑과 탑이 기러기 행렬처럼 늘어서 있을 정도’로 성행했던 것이다. 553년(진흥왕 14) 짓기 시작한 황룡사는 본래 사찰(寺)로 조성된 것은 아니었다. 는 “월성의 동쪽에 새 궁궐을 지으려 했는데, 황룡이 나타나는 바람에 사찰(‘황룡사’) 조영으로 계획을 수정했다”(‘신라본기’)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황룡사 조영공사는 13년 만인 566년 1차 가람이 마무리됐다. 진흥왕은 8년 뒤(574년) 구리 3만5007근(약 7.6t 추정)과, 도금 1만98푼(약 100냥)을 사용하여 5m에 달하는 불상(..
임금이 ‘궁궐 현판 쓴다’하면 “전하가 연예인이냐”고 욕먹었다 조선시대 관원들의 공무수행 공간이었던 창덕궁 궐내각사에는 약간 특별한 ‘현판’이 걸려있었습니다. 1725년 대은원이라는 전각을 수리한 내역을 새긴 건데요. 그런데 수리공사를 지휘한 것도 내시이요, 현판의 글을 지은 것도 내시이고, 글씨를 쓴 것도 내시였습니다. 아마 내시들이 머물렀던 건물이니 내시들이 수리공사의 모든 책임을 진 거죠. 그러나 내시가 궁궐 전각의 현판을 썼다는 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사례였죠. ■“초심을 잃으면 안됩니다” 현판은 왕조의 상징물이고, 그 상징물의 간판이죠. 국왕의 글씨 혹은 당대 최고 명필들의 글씨를 받아 장인들이 정교하게 새겼고, 화려한 문양과 조각으로 장식했습니다. 이중 왕과 왕세자의 글과 글씨가 상당수 남아있는데요. 현판에는 특별히 작은 글씨로 어필(御筆·임금의 글씨), ..
죄책감에 빠진 '백,제,왕,창'…0.08mm 초정밀 예술 쏟아냈다 제가 가본 문화재 발굴 현장 중에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곳이 있는데요. 2007년 10월 24일 부여 왕흥사터 발굴유물을 실견했을 때입니다. 절정기 백제예술의 정수를 보면서 넋을 잃었답니다. 과연 어떤 발굴이었는지 시간을 15년 전으로 돌려보겠습니다. 발표 2주 전인 10월10일이었습니다. 왕흥사 목탑터를 조사중이던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사단원들의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습니다. 목탑터 초석의 사리구멍을 막은 돌뚜껑(25㎝×15㎝×7㎝)이 노출되었는데요.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열자 흙탕물이 가득했답니다. 대나무칼로 조심스레 흙을 제거하자 글자들이 한자 한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백, 제, 왕, 창’ ‘정(丁), 유(酉), 년(年), 2월(二月), 25일(十五日)’. 이 목탑의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명문이 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