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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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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은 결코 함락당하지 않았다 남한산성하면 우리들의 뇌리에 치욕의 산성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조선 인조가 오랑캐 나라인 청 태종(太宗)의 대군에 밀려 남한산성으로 피했다가 결국 무릎을 꿇고 항복한 곳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한산성을 찾는 사람들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심지어 무너진 산성의 석축 벽이라도 보수할라치면 “뭐가 자랑이라고 아까운 세금을 들여 보수하느냐”면서 거세게 항의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남한산성에서 45일간이나 항전하던 인조가 왜 삼전도(三田渡)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했을까 한번쯤 곰곰 되씹어볼 필요가 있다. 남한산성에서 발굴딘 한성백제 시기의 장란형 항아리. 남한산성은 한성백제 도읍인 위례성(풍납토성)의 배후에서 백제를 수호하는 진산이자 성산의 역할을 했다. ■비상시에 대비한 요새 남..
죽고 못산 '평생 베프' 겸재와 사천의 필살 '콜라보' “너와 나는 합쳐야 왕망천이 될텐데(爾我合爲王輞天) 그림 날고 시(詩) 떨어지니 양편이 다 허둥대네.(畵飛詩墜兩翩翩) 돌아가는 나귀 벌써 멀어졌지만 아직까지는 보이는구나.(歸驢己遠猶堪望) 강서에 지는 저 노을 원망스레 바라보네.(초愴江西落照川)” 얼핏 보면 먼 길을 떠나보내는 님을 배웅하는 연인의 이별시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첫머리의 ‘너’를 ‘자네’로 돌려 번역하면 단순한 남녀 간의 이별시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시에 등장하는 왕망천은 당나라 대시인이자 문인화의 창시자인 왕유(699~759)의 별장이 있었던 곳이다. 왕망천은 곧 왕유를 지칭한다. 그런데 소동파(1037~1101)는 시와 그림이 모두 능한 왕유를 일컬어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
겸재의 인왕제색도는 임종을 앞둔 '베프'를 위한 작품인가 겸재 정선(1676~1759)과 사천 이병연(1671~1751)의 브로맨스는 필설로 다할 수 없다. 그러다보니 겸재의 작품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인왕제색도’를 둘러싼 논쟁도 흥미진진하다. 겸재의 75살 작품인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는 한여름 소나기가 내린 뒤의 인왕산 풍경을 그린 것이다. ‘금강전도’와 함께 겸재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국보(제216호)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미술사학자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등은 이 그림을 겸재가 위독한 지경에 빠진 절친 사천의 임박한 죽음을 애도하려고 그린 작품이라고 해석했다. 겸재의 대표작인 ‘인왕제색도’. 몇몇 미술사학자들은 겸재가 임종을 앞둔 평생지기 사천(이병연)을 위해 그린 작품이라고 해석한다. 이 그림은 소나기 내린 뒤의 인왕산 모습을 그린 것인데, ..
'백년하청' 황하가 맑아진다. 성인이 출현할 것인가 황하(황허·黃河)에는 ‘물 한 말에 진흙 여섯되(一石水六斗泥)’가 흐른다고 한다. 해마다 13억~16억t에 이르는 황톳빛 진흙이 강 하류로 운반된다. 지난 3000년 동안 이 엄청난 진흙은 1500회가 넘는 범람과 제방의 파괴를 일으켰고, 26차례 이상 강의 흐름을 바꾸어놓았다. 이 침전물을 높이 1m로 쌓으면 지구를 27바퀴 돌 수 있는 양이다. 태평성대의 임금인 요순 임금 조차도 황하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 요임금은 곤(鯤)이라는 인물에게 임무를 맡겼지만 역불급이었다. 오히려 수해가 커졌다. 요임금의 후임인 순임금은 그 책임을 물어 곤을 죽이고, 곤의 아들인 우(虞)에게 치수를 맡겼다. 황톳물이 쏟아지는 황하. 비명에 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치수를 맡은 우는 강을 다스리는 필살기를 선보인다. 물..
'내시 마부도 올랐는데…' 의병장 곽재우는 왜 공신에서 탈락했을까 “호종공신이 80명이 넘는다니 과하다. 그 중에 내시가 24명이며 미천한 자들이 또 20여명이 되었다. 얼마나 외람된 일인가.”( 1604년 6월 25일) “천 것들 하고 함께 공신회맹연에 참석하고 충성을 다짐하는 소반의 피를 마시고 맹세했으니 아 어찌 비웃음을 사지 않겠는가.”( 1604년 10월 29일) 임진왜란 때의 공신책봉 관련 실록 기사를 보면 유독 사관(史官)의 ‘한탄 논평’이 많다. 공신 심사나 책봉, 그리고 공신회맹식의 과정을 기록한 사관들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것이다. 1604년 6월25일 공신교서를 발표한 사실을 적은 사관의 논평이 의미심장하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절개를 세운 사람이 없지 않다. 정인홍·김면·곽재우는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김천일·고경명·조헌은 충청과 ..
경애왕은 그날 술판을 벌이지 않았다. “견훤이 927년 겨울 11월에 경주에 들이닥쳤다. 견훤은 후궁에 숨어있던 경애왕을 핍박하여 자결케 하고 왕비를 강간했다. 부하들은 경애왕의 비첩들을 난통(亂通)했으며 공사의 재물을 노략질했다.”( ‘신라본기·경애왕조’) 에 기록된 신라 55대 임금 경애왕의 최후이다. 한마디로 신라 55대 경애왕이 나라가 망해가는 줄도 모르고 927년 음력 11월에 포석정에서 연회를 열어 귀족들과 술 마시고 즐기다 후백제 견훤의 침입으로 왕이 자결을 강요당했다는 것이다. 견훤 역시 남의 나라 왕비를 강간하고, 그 부하들에게도 남의 나라 임금의 비첩들을 마음껏 겁간하도록 방임한 인간말종으로 그렸다. 포석정은 경주 남산의 서편 포석계곡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사적 1호였다. 사적 1호는 결국 후백제 견훤의..
"미라는 출산중…" 출산직전 사망한 산모 미라 “저기 무연고 무덤이 하나 있는데, 도굴된 것 같아요. 어느 분 묘인지 한번 확인하고 싶어요.” 2002년 9월 6일 경기 파주시 교하리 야산(장명산)에서 파평 윤씨 문중 묘소의 이장작업이 한창이었다. 흩어져있던 묘역 6기를 한곳에 모으는 작업이었다. 작업에는 김우림씨(당시 고려대박물관 연구위원) 등 전문가들이 입회하고 있었다. 파평 윤씨의 묘역이 경기도기념물(182호)로 지정되어 있었기에 전문가 입회는 필수였다. 그때 파평 윤씨 문중 대표가 “이왕 정리하는 김에 무연고 묘를 조사해봤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문가들에게 낸 것이다. 마침 문중사람과 포클레인 장비, 장의업체까지 있었으니 해볼만 한 작업이었다. 무덤을 노출시켜보니 회곽묘였다. 금방 난관에 봉착했다. 돌처럼 굳어진 회곽묘가 너무도 단단했고, 회..
1만년전 제주도에 정착한 경계인…그들은 누구인가 제주도 하면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뭍 사람들에게는 로망이지요. 뭔가 세파에 찌들어 살고 있는 육지 사람들은 한번쯤 평화롭고 아름다운 제주도에서의 삶을 상상해보곤 하지요. 최근에는 가수 이효리씨가 세상 편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TV프로그램을 보면서 한껏 부러워하게 되지요. 얼마나 부러우면 제주도 여행가서 굳이 이효리씨의 집을 찾아가는 분들도 있다면서요. 뭐 제주도까지 가서 남의 사생활을 훔쳐볼 필요가 있습니까. 그보다 훨씬 의미있는 곳들도 많은데…. 화산섬 제주도의 풍치는 말하지 않아도 유명합니다. 그러나 뭔가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여행을 어떨까요. 지금으로부터 1만년전의 제주도를 가보는 그런 여행 말입니다. 제주도야 말로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를 연결하는 이른바 ‘경계인’이 살았던 곳이거든요. 그 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