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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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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약탈사건의 전모 한 2년 전인가. 석굴암에서 20여 곳의 균열이 보였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허겁지겁 안전진단이 펼쳐졌고, 유네스코 전문가까지 와서 무슨 문제가 있는지 보고 돌아갔습니다. 결론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소동을 보면서 옛 기록을 찾아보니 흥미로운 대목이 있었습니다. 석굴암은 창건당시부터 부실공사였다는 것입니다. 에 분명히 나오는 기록입니다. 천장 덮개돌을 올릴 때 그 엄청난 무게의 돌을 9미터 높이에서 떨어뜨려 삼등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삼등분 난 돌을 그대로 덮개돌로 마무리하고는 공사를 끝냈다는 것입니다. 이 무슨 일일까요. 전문가들은 석굴암 공사의 총책임자인 김대성이 왜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여러 각도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부실공사의 결과물..
김대성은 석굴암 부실공사의 '원흉'이었다 한 2년 전인가. 석굴암에서 20여 곳의 균열이 보였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허겁지겁 안전진단이 펼쳐졌고, 유네스코 전문가까지 와서 무슨 문제가 있는지 보고 돌아갔습니다. 결론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소동을 보면서 옛 기록을 찾아보니 흥미로운 대목이 있었습니다. 석굴암은 창건당시부터 부실공사였다는 것입니다. 에 분명히 나오는 기록입니다. 천장 덮개돌을 올릴 때 그 엄청난 무게의 돌을 9미터 높이에서 떨어뜨려 삼등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삼등분 난 돌을 그대로 덮개돌로 마무리하고는 공사를 끝냈다는 것입니다. 이 무슨 일일까요. 전문가들은 석굴암 공사의 총책임자인 김대성이 왜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여러 각도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부실공사의 결과물..
그래도 '넘버 3' 진성여왕은 자진 하야했다. 897년 신라 진성여왕이 하야를 선언합니다. 국정 파탄의 책임을 “과인이 부덕한 탓”이라고 돌리고 깨끗히 물러납니다. 여왕에게 아들이 2명 이상 있었지만 오빠의 서자(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줍니다. 진성여왕은 왜 자신사퇴, 즉 하야의 길을 선택했을까요. 진성여왕 시대의 신라에는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왜 서라벌 번화가에 ‘여왕이여~ 당신 측근들의 국정농단 때문에 곧 망할 것’이라는 벽보가 붙었을까요. 진성여왕은 역사가 김부식의 평가처럼 음란하고, 게다가 측근정치에 휘말려 나라를 망국의 길로 접어들게 만든 혼군이었을까요. 표면적인 기록을 보면 마냥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한 평가를 내려서는 안됩니다. 그래도 진성여왕은 모든 책임을 지고 깨끗히 자리에서 물러났으니까요. ..
녹두장군 전봉준, 그 최후의 순간 1894년 11월 동학농민군 2차 봉기에 나섰다가 패한 전봉준 장군(1855~1895)은 전북 순창군 상치면 피노리에 이르렀다. 동지인 김개남 장군이 은신해 있다는 태인으로 가는 도중에 옛 친구인 김경천을 만나러 간 것이었다. 김경천은 원래 전봉준의 부하였다가 농민군이 대패한 이후 피노리에 피신중이었다. 당시 조정은 전봉준의 목에 현상금을 걸어놓고 있었다. 원하면 군수 자리까지 준다는 매혹적인 조건이었다. 천금의 현상금에 눈이 먼 김경천은 이웃인 한신현에게 밀고했다. 한신현은 김영철·정창욱 등 마을 사람들과 전봉준이 쉬고 있던 주막을 포위했다. 전봉준이 위기를 감지하고 담을 넘어 도망가려 했지만 젊은이들(혹은 관군)이 내리친 몽둥이에 맞아 체포됐다. 김경천의 배신과 관련해서는 여러 후일담이 있다. 하나의..
개그맨도 역사서의 주인공이다. 요즘의 개그맨이나 예능인이라 할만한 사람들이 2500~2600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사마천 같은 역사가는 그런 이들을 골계가라 했습니다. 음악에 능하고, 우스갯소리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골계가들은 군주의 곁에 머물며 군주의 귀를 즐겁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역할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군주가 잘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신랄한 풍자와 멋들어진 해학으로 군주를 올바른 길로 이끌었습니다. 직접적인 말이 아니었습니다. 은유법과 반어법을 섞어가며 절묘한 말솜씨로 군주의 그릇된 마음을 되돌려놓았습니다. 요즘으로 친다면 풍자개그였던 셈이죠. 심지어 우전이라는 골계가는 천하의 폭군이라는 진시황 앞에서 스스로 직접 ‘짠’ 개그로 멋들어진 ‘개그콘서트’를 선보였습니다. 호위군사들을 위한 개그코너였습니다. 최근 ..
이성계의 불온한 대권출정식 지금부터 80여 년 전 금강산 월출봉에서 희한한 유물 세트가 발견됩니다. 태조 이성계와 두번째 부인 강씨의 이름을 새긴 사리장엄구였습니다. 즉 이성계가 불사리를 봉안한 의식이 1391년 5월 이곳 금강산에서 벌어졌음을 알린 유물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의식에 1만 여 명의 지지자가 따라나섰다는 것입니다. 1391년 5월이면 조선이 개국하기 1년 2개월 전입니다. 이성계는 왜, 그것도 금강산에서 불사리를 모시는 성대한 의식을 치렀을까요. 더욱이 사리기를 보면 ‘미륵의 하생을 기다린다’고 했답니다. 이성계가 기다린 미륵의 하생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요. 또하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조강지처가 시퍼렇게 살아있었던 때, 이성계는 왜 두번째 부인인 강씨만 데리고 금강산에 올랐을까요. 금강산에서 발..
이성계가 조강지처 홀대한 까닭 “…수문하시중 이성계(守門下侍中 李成桂) 삼한국대부인 강씨(三韓國大夫人 康氏)….” 1932년 10월 금강산 월출봉에서 우연히 이성계 사리함에서 보이는 명문 내용이다. 이성계와 이성계의 부인인 강씨가 사리장엄구 봉안 불사를 주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두 사람이 사리함을 봉안했던 1391년 5월이면 이성계의 첫번째 부인인 한씨(신의왕후)가 시퍼렇게 살아있었던 때였다. 그렇다면 조강지처인 한씨는 팽개치고 두번째 부인인 강씨(신덕왕후)만 명문에 새긴 이유는 뭘까. 이성계와 부인 강씨(신덕왕후)는 '미륵의 하생'을 기다리며 1만명과 함께 불사리를 봉안하는 의식을 치렀다. 금강산에서 펼쳐진 의식에 첫번째 부인인 한씨(신의왕후)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당시 병중이던 한씨는 4개월만에 승하했다...
'18년 기러기 아빠' 다산의 꾸지람 '하피첩'이라는 보물이 있습니다. 지난 2004년 폐지 할머니의 수레에서 우연히 발견된 유물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편지입니다. 유배생활중인 다산은 아내 홍씨가 보내온 다홍치마를 재단해서 두 아들에게 전하는 편지 4책과 외동딸에게 주는 매조도 그림을 그려 보냈습니다. 딸에게 준 매조도(매화병제도)는 고려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었지만 아둘 둘에게 보냈다는 편지 4첩은 기록으로만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폐지 할머니의 수레에서 4책 중 3책이 극적으로 발견된 것입니다. 다산은 이 책을 이라 했습니다. 붉은 다홍치마에 쓴 편지라는 뜻입니다. 다산이 이 편지 글에서 전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책에서는 그래도 정제된 말씨를 쓰지만 다른 편지글에서는 두 아들을 사정없이 꾸짖는 내용도 심심찮게 있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