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312) 썸네일형 리스트형 인조의 '닥치고' 외교와 광해군의 ‘관형향배’ 외교 두 임금이 있습니다. 광해군과 인조입니다. 역사서는 광해군을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 이른바 ‘폐모살제’의 오욕을 뒤집어쓴 폭군으로 폄훼하고 있습니다. 반면 인조는 ‘어지러움’을 ‘바름’으로 바꿔놓은 ‘반정’의 주인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정세력이 공표한 인조반정의 명분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광해군의 외교실정입니다. 반정세력은 이른바 혁명공약에서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재조지은·再造之恩) 명나라에 배은망덕 했고, 사태를 관망하며 정책을 결정하는 외교(관형향배)로 오랑캐(후금)에 투항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면서 ‘명나라를 배반하는 것은 금수만도 못한 외교행위’라고 천명했습니다. 이렇게 공표해놓으니 더는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광해군은 후금과 명나라라는 강.. 경주 한복판에 확인된 광개토대왕의 체취 고고학자라면 흔히 영화 '인디애나 존스'에 등장하는 해리슨 포드를 떠올리고, 그 멋진 남자의 모험담을 연상하게 됩니다. 실제로 영화를 보고 학문의 길로 접어든 고고학도들도 제법 보았습니다. 그러나 고고학은 그렇게 낭만적인 학문은 아닙니다. 한여름철 뙤약볕에 앉아 행여 발굴되는 유물이 상하고 유구가 무너질까봐 트롤(꽃삽 같은 도구)과 붓으로 감질나는 작업을 펼칠 때가 많은 직업이니까요. 하지만 획기적인 유물이나 유적을 자기 손으로 찾아내는 그 벅찬 순간을 잊지 못하겠지요. 아마 그래서 고고학 하나봅니다. 이번 주에 아주 흥미로운 발굴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해방 이후 우리 손으로 처음 발굴한 유물이야기입니다. 비록 패망한 일본인 학자의 귀국을 막아선 끝에, 그것도 미군정청의 예산을 받아 시작했지만 그래도 한.. 이완용, 그는 왜 '독립문' 글씨를 썼을까 독립문을 아십니까. 서재필 박사가 조선의 자강독립을 위해 프랑스 개선문을 본따 만들었다는 그 독립문 말입니다. 그런데 이 한가지는 알고 계시니까. 독립문의 이마에 떡하니 새겨져있는 ‘독립문’ 편액을 누가 썼는지…. 독립문이니까 아마도 독립 투사 중 명필인 분이 쓰셨겠지요. 그러나 아닙니다. 저 ‘독립문’ 글씨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조선 귀족의 영수 후작 이완용 각하’였답니다. 제 얘기가 아니라 동아일보 1924년 기사에 나와 있는 표현 그대로입니다. 매국노와 독립문…. 이 해괴한 조합은 무엇일까요. 왜 하필 이완용이 ‘독립문’ 편액을 썼을까요. ‘독립문’을 공부하다보면 온갖 희한한 일들을 알게 됩니다. 서재필과 이완용이 말한 ‘독립’의 의미는 단 한가지였습니다.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이었다는 것입니다. .. 휴전선…미완의 혁명가 궁예가 꿈꾼 세상 궁예라는 역사인물이 있습니다. 한쪽 눈을 잃은 비운의 영웅 쯤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일어서 한때는 삼한 재통일의 가도를 달렸으나 너무 과속하는 바람에 왕건의 고려세력에게 패한 인물쯤으로 말입니다. 미륵불을 자처하고 허황된 관심법으로 신하들은 물론이고, 부인과 자식까지 무참하게 죽인 폭군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궁예는 그렇게 단순하게 폄훼될 인물이 아닙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한때는 영원한 평등세상을 이루는 대동방국, 태봉국의 기치를 드높인 난세의 영웅이었습니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기에 폭군의 반열에 든 것일 뿐입니다. 또하나, 궁예가 웅지를 편 곳이 어딘줄 아십니까. 바로 철원의 드넓은 벌판, 지금은 비무장지대 안쪽인 풍천원입니다. 그 뿐입니까. 군사분계선, 즉 휴전선을 딱.. 독존신으로 거듭난 궁예왕 강원 평강에서 안변으로 향하는 경원선 길목에 삼방협(三防峽)이란 지명이 나온다. ‘上·中·下防’을 합한 말인데 북방의 적을 막은 천혜의 협곡. 금강산을 향하는 백두대간이 평강과 안변을 갈라놓았다. 얼마나 험한지 기차가 이곳을 지날 때는 바로 앞 역인 복개역에서 화차를 앞·뒤에 달아 지그재그로 오르내릴 정도였다. 그런데 조선 말기 지도인 ‘청구도’를 보면 바로 이 삼방협, 그것도 ‘중방’에 궁예왕의 묘가 분명히 표시돼있다. 1924년에 쓴 최남선의 ‘풍악기유(楓嶽記遊)’를 보자. “삼방개울을 끼고 철도용 수원발원지를 지나 남으로 오리쯤 가면 조그만 전우(殿宇)가 보이는 것은 태봉의 궁대왕을 숭봉한 곳인데~ 그 당우(堂宇) 뒤로 돌담같이 보이는 것은 석축 봉분의 남쪽 면이요, 그 북서 양면은 고제(古制)가 .. 부석사 금동보살상, 과연 솔로몬의 지혜는 없는가 최근 문화유산계를 뜨겁게 달구는 이슈가 있습니다. 바로 서산 부석사의 ‘금동관음보살좌상’입니다. 1330년 시주자 32명이 불심을 모아 제작한 불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불상은 700년 가까이 부석사에 없었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일본 대마도(쓰시마) 관음사(간논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불상이 한·일간 민감한 난제로 떠올랐습니다. 2012년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가 많으니 훔쳐와 팔면 큰 이득이 있을 것”이라고 범행을 모의한 한국 절도범 일당이 감쪽같이 훔쳐서 국내로 반입한 것입니다. 그 때 훔쳐온 것이 관음사의 금동관음보살좌상(일본 지방 유형문화재)과 해신신사(가이진 진사)의 금동여래입상(일본 국가지정중요문화재)이었습니다. 이 중 통일신라시기의 걸작인 금동여래입상은 일본의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세종 시대와 정조 시대의 범죄자 처리법 “근래 기근이 겹쳐 도적이 흥행하고 분쟁이 더욱 성하여 사형수가 예전보다 배나 된다. 내가 부끄럽게 여겨 깊이 반성한다.” 1439년(세종 21년), 세종 임금이 치세에 사형수가 많다는 것은 부덕의 소치라고 반성한다. 그는 의정부에 “고의 살인이 아닌 과실치사와 전과 3범의 절도 등은 형량을 좀 감해주면 안되겠냐”고 하문한다. 미집행 사형수가 자신의 치세에서 190명에 이르자 특별사면령을 고려한 것이다. 하지만 영의정인 황희를 비롯한 대신들은 격론 끝에 ‘불가하다’는 의견을 모은다. 구한말 태형을 가하는 모습.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의 시대에 사형수가 190명에 달했고, 능지처사를 당한 이도 60명에 이르렀다. ■사형수가 190명이나 되다 “전하, 송나라 주희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벼운 형벌을 미덕.. 백제인이 백주대로에 '남근'을 세운 까닭 목간은 당대의 생생한 기록입니다. 목간에 쓰여진 기록을 읽으면 그 시대 사람들의 체취를 흠뻑 맡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확인된 목간은 500여점에 달합니다. 그 가운데 백제시대 목간은 70여점 정도랍니다. 많지않은 숫자지요. 대부분이 사비백제 시기의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리 많지않은 백제 목간 가운데는 유독 흥미로운 목간들이 눈에 띕니다. 이번 주는 그래서 백제 시대 ‘빅 3’ 목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우선 구구단을 정교하게 써놓은 쌍북리 구구단 목간이 눈에 띕니다. 과연 어떤 패턴으로 만들어진 목간일까요. 옛 사람들은 왜 이이단이라 하지 않고 구구단이라 했을까요. 과연 구구단을 ‘9×9’부터 시작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두번째 흥미로운 목간이 바로 ‘남근형 목간’입니다. 능산리에서 발견된 이.. 이전 1 ··· 24 25 26 27 28 29 30 ··· 3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