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의 역사 (341) 썸네일형 리스트형 동이족 역사상 최강의 궁사 2016 리우올림픽이 우리 시간으로 6일 아침 개막됩니다. 아무리 금 은 동메달보다 참가에 의의가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치열한 승부끝에 얻을 수 있는 승리의 쾌감은 그 무엇과 견줄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 한국선수단의 확실한 금맥인 양궁의 경우는 어떨까요. 오히려 국내 선발전이 더 치열할 정도로 올림픽 대표로 뽑힌 선수들의 기량은 출중합니다. 궁술의 피가 흐르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나 봅니다. 전설속 동이족 군장인 예라는 인물부터 고구려 창업주 주몽, 그리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까지. 저마다 신기에 가까운 활 솜씨를 자랑했지요. 20년 전인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김경욱 선수가 10점 만점의 한가운데 과녁을 두번이나 정통으로 맞췄고, 1994년 한승훈 선수가 30미터 거리에서 36발 전부 10.. 춤바람난 올림픽 선수단? 곧 리우 올림픽이 열립니다. 올림픽 열기가 예전같지 않다고 하지만 그래도 시작이 되고, 메달레이스가 펼쳐지면 관심을 끌 것입니다. 세상에 즐거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4년간 선수들이 흘린 땀을 보상받는 올림픽 무대를 감상하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이겠지요. 한국은 지금으로부터 68년전인 1948년 런던올림픽에 처음 참가했습니다. 당시의 신문을 보거나 당시의 증언을 들으면 정말로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 같습니다. 참가비를 마련하려고 복권을 발행한 이야기, 금메달은 따논 당상이라고 큰소리쳤다가 줄줄이 탈락한 마라톤 선수들, 최소한 은메달 동메달은 확실하다고 떵떵 거리다가 0-12로 참패한 축구 선수들, 경기 전날 공업용 용액을 술로 착각해서 마셨다가 밤새도록 뒹굴었던 선수와 아나운서 이야기 등등. 참으로 파란.. 세종이 특별사면을 주저했던 까닭은 632년(정관 6년) 당태종(재위 626~649)이 천하의 사형수 390명을 방면했다. 그러면서 “이듬해 가을 사형을 집행할 때 다시 돌아오라”는 다짐을 받았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모든 사형수가 이듬해 약속한 날짜에 돌아온 것이다. 태종은 이를 가상하게 여겨 사형수들을 모두 사면해주었다.() 당대 시인 백거이는 ‘칠덕무(七德舞)’라는 시에서 당태종의 치세에 찬사를 보냈다. “원망하는 궁녀 삼 천 명을 궁궐에서 내보내고, 사형수 사백 명이 자진해서 옥으로 돌아왔다오.(怨女三千放出宮 死囚四百來歸獄)”() ■당태종의 셀프미담 만들기 그런데 좀 미심쩍다. 뭔가 미담을 꾸며낸 듯한 냄새가 난다. 형제들을 참살한 이른바 ‘현무문의 정변’(626년) 끝에 즉위한 태종의 ‘셀프미담’일 가능성이 짙다. 굳이 사형수.. 황룡사 9층목탑, 콘크리트로 복원할 뻔 한 사연 경주는 1000년을 버틴 신라 왕국의 서울이었습니다. 실로 장구한 세월이었습니다. 전성기 때는 무려 18만호에 이르는 사람들이 경주에 살고 있었으며 35채의 ‘금입택’, 즉 황금이 드나드는 저택이 있었다고 합니다. 880년 헌강왕 때는 “서울 백성들의 집은 모두 기와집이었고, 그 기와집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으며, 밥을 짓는데 장작이 아니라 숯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53년 뒤 신라는 멸망하고 맙니다. 이후 경주, 특히 834년 동안이나 궁성이 자리잡고 있던 월성 지역은 금단의 땅이 되고 맙니다. 신라 삼국통일의 정신적인 지주였고 상징건물이자 랜드마크였던 황룡사와 황룡사 9층탑는 덩그러니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몽골군 침략 때인 1235년 불타버리고 맙니다. 그후 .. 우리 조상들은 왜 탯줄에 목숨을 걸었을까 요즘 제대혈(탯줄 속 혈액)을 보관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2015년 제대혈 보관건수가 60만건에 달했다지요. 제대혈에 적혈구·백혈구·혈소판을 만드는 조혈모 세포가 풍부하고 연골·근육·뼈·신경 등을 만들 수 있는 간엽줄기세포가 다량 함유돼있어서 백혈병 같은 혈액질환과 뇌성마비 및 발달장애 치료에 활용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제대혈 보관은 신라시대부터 면면이 이어온 안태의식, 즉 태를 묻는 의식과 일맥상통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태를 묻는 의식은 중국에는 없었던 우리 고유의 풍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왜 그렇게 태를 묻는데 정성을 쏟았던 걸까요. 태를 어떻게 생각했기에 그렇게 신주 단지 모시듯 했을까요. 한가지 더. 조선조 영조 임금은 왜 도승지(비.. '영조, 당신이 범인이야'-경종 죽음의 전모(상) 드라마 '대박' 방영을 계기로 영조와 영조의 이복형 경종, 그리고 이인좌의 난 등 예전에 썼던 글들을 다시 리바이벌합니다. 경종과 영조 시대의 갖가지 이야기들을 담아놓은 글입니다. (글이 길어 상 하로 나눴습니다.) “김일경은 자기 자신을 일컬을 때마다 ‘저(矣身)’라 하지 않고 ‘나(吾)’라 했다.” 1724년(영조 즉위년) 12월 8일이었다. 영조는 즉위하자 마자 소론의 핵심인물 김일경을 국문장으로 끌어냈다. 그러나 마땅히 고개를 숙여야 할 ‘죄인’ 김일경은 고개를 뻣뻣히 세우고 임금이 당도해 있는 친국장에 들어섰다. 영조가 소리쳤다. “보기싫다. 저 자의 머리를 덮어 씌우라.” 김일경은 대단했다. 피와 살이 튀는 고문에도 ‘말할 때마다 반드시 선왕(경종)의 충신’이라 했다. 더구나 자신을 일컬을 때.. 영조, "나는 게장을 올리지 않았네."-경종 죽음의 전모(하) 그 뿐이 아니었다. 더욱 구체적인 증거가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1722년 4월 20일자를 보라. 조흡이라는 인물의 진술인데, 상당히 구체적이다. (왕세자의 처조카인) 서덕수가 동궁(왕세제의 처소)의 별실에서 궁녀를 상대로 독약을 시험했는데, 그 궁녀가 죽어나갔다는 것이다. 서덕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대들은 궁녀가 죽어나간 소문을 듣지 못했는가.” '영조왕세제수책시 책례도감의궤'. 우여곡절 끝에 왕세제에 오른 연잉군과 부인인 달성군 서씨의 책봉과정을 적은 의궤이다.|서울대 규장각 소장 ■시험삼아 궁녀와 종5품 내명부 여인을 독살시키다 그러면서 서덕수가 “이 약이 신통한 효험이 있으니 다른 곳에 쓰려고 한다”면서 “그 약을 구하려면 천 여 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10여 일 후인 5월.. 승리한 패배자 경순왕, 왜 임진강변에 묻혔나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무덤은 경주에 없습니다. 경순왕릉은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임진강변에 있습니다. 그것도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에서 불과 50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궁금증이 생깁니다. 경순왕은 왜 고향땅을 두고 머나먼 임진강변에 묻혔을까요. 거기에는 의미심장한 이유가 있답니다. 경순왕을 흔히 신라의 천년사직을 고려에 고스란히 바친 무능한 군주로 치부됩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실리를 챙겼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우선 망국 후에도 43년을 더 살았고, 고려 태조 왕건보다 34년을 더 장수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의 후손들이 고려왕조를 지탱했습니다. 그래서 사가들은 경순왕을 두고 '승리한 패배자'라는 소리를 합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84회 주제는 '승리한 패배자 경순.. 이전 1 ··· 15 16 17 18 19 20 21 ··· 4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