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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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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쿠샤와 은행나무 1896년 광산업자인 아버지(조지 테일러)를 따라 조선에 온 미국인이 있었다. 21살 청년 앨버트 테일러였다. 테일러 일가는 ‘노다지(No touch)’의 어원이 된 평안도 운산금광을 관리하다가 충북 직산탄광을 직접 운영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이 대목이라면 테일러 일가의 행보를 긍정적으로 서술할 수 없다. 당시 금광채굴권이 모두 외국인에게 넘어갔고, 조선의 백성들이 외국인들의 ‘노 터치’ 으름장에 터전을 잃고 쫓겨났으니 말이다. 1920년대 딜쿠샤 건물과 은행나무. 앨버트 테일러 부부(아래 사진) 하지만 앨버트에게 조선은 ‘엘도라도’ 이상의 의미였다. 그는 아버지(조지)가 1908년 사망한 뒤에도 조선에 남았다. 단순히 돈만 번 것이 아니었다.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 등 식민지 조선에서 자행된..
삐라, 적의 마음을 쏘는 종이폭탄 요즘 북한이 뿌린 삐라가 서울시내 한복판까지 떨어지고 있습니다. 50대 이상 사람들이라면 어릴적에 한 번 쯤은 비라를 주워보았을 것입니다. 삐라를 파출소가 갖다주면 연필 같은 학용품을 주었지요. 옛날 생각이 납니다. 역사서에 등장하는 삐라는 어지러웠던 신라 말기 진성여왕 때 서라벌 시내 한복판에 떨어진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진성여왕이여! 신라여! 망하리라!’하며 저주했던 삐라였습니다. 그후 47년만에 정말로 신라는 망했습니다. 한국전쟁 때도 삐라는 마치 눈처럼 뿌려졌습니다. 미군은 25억~40억장의 삐라를 뿌렸다고 합니다. 전쟁 후에도 삐라의 제작기법은 체제유지를 위한 대중홍보수단으로 사랑받았습니다. 물론 남북한 모두 상대방을 겨냥한 냉전의 수단으로 삐라를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삐라는 왜 그렇..
조선의 임금들도 순식간에 잿더미 되다 그랬으니 임금의 어진을 그리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어진의 제작은 대개 3종류로 나뉜다. 임금의 생전 때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리는 도사(圖寫)와, 임금의 사후에 그리는 추사(追寫)가 있다. 또 이미 그려진 어진이 훼손됐거나 혹은 새로운 진전에 봉안할 경우 기존본을 토대로 그려내는 모사(模寫)가 있다. 어진을 제작하려면 우선 임시 관청인 도감을 설치하고 화원을 선발했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이는 임금의 얼굴을 직접 그리는 어진화사였다. 대신들이 당대 초상화를 가장 잘 그린다는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을 뽑았다. 때에 따라서는 시험을 거쳤다. 예컨대 1713년(숙종 39년) 숙종 어진을 도사할 때 당대 내로라하는 화가들을 추천받아 모아놓고는 각각 초상화 초본을 제출하도록 했다. 이렇게 선발된 ..
세종이 고려임금의 어진을 불태운 까닭은 옛 초상화를 보고 있노라면 한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왜 쭈글쭈글한 노인들만 주인공으로 등장했을까. ‘꽃청년’들은 왜 초상화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을까. 다 이유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수양도 덜됐고, 학식도 부족하며, 경륜도 쌓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상화에 등장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초상화를 그저 사람을 본떠 그린다는 의미의 ‘초상(肖像)’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사진(寫眞)이라 했습니다. 내면의 ‘참됨(眞)’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랬으니 아직 모든 면에서 설익은 젊은이들은 ‘사진’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랬으니 ‘터럭 한올, 털끝 한오라기(一毫一髮)’라고 허투루 그릴 수 없었습니다. 임금의 초상화도 어진(御眞)이라 했습니다. ‘임금의 참됨’을 드러내는..
기황후, '고려판 한류' 열풍의 주역 < “공녀로 뽑혀 원나라로 끌려가는 날 옷자락을 부여잡고 끌다가 엎어집니다. 울부짖다가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스스로 목을 매 죽는 자도 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원나라의 간섭이 극에 달했던 1335년이었습니다. 이곡(李穀·1298~1351)이 상소문을 올려 원나라가 강제로 뽑아가는 공녀(貢女)들의 피맺힌 사연을 호소했습니다. 말 그대로 ‘공물(貢物)’로 끌려가는 여인이었으니 얼마나 비극적입니까. 끌려간 소녀들의 상당수는 고된 노동과 성적인 학대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한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1333년 14살의 나이로 끌려간 기씨 소녀가 바로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소녀의 첫 직책은 원 황제 순제(재위 1333~1372)의 차와 음료를 주관하는 궁녀였습니다. 소녀는 단번에 황제의 넋을..
'복면 사관'과 역사가의 조건 정부는 국정 역사 교과서의 집필자를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시쳇말로 ‘복면 사관’을 만든 겁니다. 뿐이 아니라 집필자의 원고 등을 심의할 심의위원들의 명단도 비공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인가요. 사람들은 흔히 전근대적인 행위나 사고를 ‘왕조시대’에 비유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비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왕조시대인 조선의 사관선발 절차를 한번 보겠습니다. 과연 ‘왕조시대’라 손가락질 할 수 있겠습니까. 왕조시대의 사관? 아무나 될 수 없었습니다. 사관이 갖춰야 할 조건이 3가지라 해서 ‘삼장(三長)’이라 했습니다. 삼장의 덕목을 갖춘 사관을 뽑는 작업은 혹독했습니다. 지금 어떻습니까. 정녕 제대로 된 사관을 뽑고 있는 것입니까. 또 우리의 지도자들은 과연 중종처럼 자신의 잘못을 숨김없이 ..
빼빼로데이 말고 젓가락데이 어떨까 차진 쌀을 주식으로 하는 아시아인들에게 젓가락은 생명의 상징이다. 1998년 충북 청주 명암동의 고려시대 석관묘에서 먹(墨)과 철제 젓가락, 중국 동전 등 3종 세트가 발굴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죽어서도 밥은 굶지 말고(젓가락), 공부는 계속해야 하며(먹), 부자가 되라(동전)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중국에서 죽은 이가 사용했던 젓가락을 대문에 걸어두고, 일본에서 1877년 야마가타현(山形縣)에 젓가락무덤(御箸陵)을 세워 제사까지 지내며 신성시한 이치와 다를 바 없다. 젓가락을 부모의 신체와 동일시하는 풍습은 비슷하다. 상 위의 차려진 젓가락의 길이가 다르면 부모 가운데 한 사람이 죽는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지금도 식당에서 가장 먼저 상 위에 놓은 젓가락의 키를 재보지 않는가. 또 젓가락이 부러지면 불..
잃어버린 백제 한성백제의 출현(하) 1998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주체가 된 풍납토성 발굴이 시작됐다. 성벽 안쪽에서 한성백제의 실체가 드러난 이상, 백제인들이 쌓은 성벽의 축조방법도 초미의 관심거리였기에 발굴이 시작된 것이었다. 1920년대 풍납토성 모습. 해자, 즉 성을 막기위한 주변의 도랑시설이 보인다. ◇감개무량한 발굴 “높이는 한 6~7m 정도나 될까. 폭은 한 10여m?” 애초에 발굴단은 현존하는 성의 모습으로 볼 때 그 정도려니 했다. 하지만 그건 오판이었다. “와. 이게 뭐야.” 발굴기간 내내 감탄사가 끊이지 않았다. 끝도 없는 판축 토루와 성벽을 보호하는 강돌·깬돌이 열 지어 있고 성벽의 흘러내림을 방지하는 수직목과 식물유기체들. 발굴 결과 폭 43m 이상에 현존 높이 11m에 이르는 사다리꼴 형태의 토성임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