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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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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9층목탑, 콘크리트로 복원할 뻔 한 사연 경주는 1000년을 버틴 신라 왕국의 서울이었습니다. 실로 장구한 세월이었습니다. 전성기 때는 무려 18만호에 이르는 사람들이 경주에 살고 있었으며 35채의 ‘금입택’, 즉 황금이 드나드는 저택이 있었다고 합니다. 880년 헌강왕 때는 “서울 백성들의 집은 모두 기와집이었고, 그 기와집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으며, 밥을 짓는데 장작이 아니라 숯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53년 뒤 신라는 멸망하고 맙니다. 이후 경주, 특히 834년 동안이나 궁성이 자리잡고 있던 월성 지역은 금단의 땅이 되고 맙니다. 신라 삼국통일의 정신적인 지주였고 상징건물이자 랜드마크였던 황룡사와 황룡사 9층탑는 덩그러니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몽골군 침략 때인 1235년 불타버리고 맙니다. 그후 ..
우리 조상들은 왜 탯줄에 목숨을 걸었을까 요즘 제대혈(탯줄 속 혈액)을 보관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2015년 제대혈 보관건수가 60만건에 달했다지요. 제대혈에 적혈구·백혈구·혈소판을 만드는 조혈모 세포가 풍부하고 연골·근육·뼈·신경 등을 만들 수 있는 간엽줄기세포가 다량 함유돼있어서 백혈병 같은 혈액질환과 뇌성마비 및 발달장애 치료에 활용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제대혈 보관은 신라시대부터 면면이 이어온 안태의식, 즉 태를 묻는 의식과 일맥상통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태를 묻는 의식은 중국에는 없었던 우리 고유의 풍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왜 그렇게 태를 묻는데 정성을 쏟았던 걸까요. 태를 어떻게 생각했기에 그렇게 신주 단지 모시듯 했을까요. 한가지 더. 조선조 영조 임금은 왜 도승지(비..
'영조, 당신이 범인이야'-경종 죽음의 전모(상) 드라마 '대박' 방영을 계기로 영조와 영조의 이복형 경종, 그리고 이인좌의 난 등 예전에 썼던 글들을 다시 리바이벌합니다. 경종과 영조 시대의 갖가지 이야기들을 담아놓은 글입니다. (글이 길어 상 하로 나눴습니다.) “김일경은 자기 자신을 일컬을 때마다 ‘저(矣身)’라 하지 않고 ‘나(吾)’라 했다.” 1724년(영조 즉위년) 12월 8일이었다. 영조는 즉위하자 마자 소론의 핵심인물 김일경을 국문장으로 끌어냈다. 그러나 마땅히 고개를 숙여야 할 ‘죄인’ 김일경은 고개를 뻣뻣히 세우고 임금이 당도해 있는 친국장에 들어섰다. 영조가 소리쳤다. “보기싫다. 저 자의 머리를 덮어 씌우라.” 김일경은 대단했다. 피와 살이 튀는 고문에도 ‘말할 때마다 반드시 선왕(경종)의 충신’이라 했다. 더구나 자신을 일컬을 때..
영조, "나는 게장을 올리지 않았네."-경종 죽음의 전모(하) 그 뿐이 아니었다. 더욱 구체적인 증거가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1722년 4월 20일자를 보라. 조흡이라는 인물의 진술인데, 상당히 구체적이다. (왕세자의 처조카인) 서덕수가 동궁(왕세제의 처소)의 별실에서 궁녀를 상대로 독약을 시험했는데, 그 궁녀가 죽어나갔다는 것이다. 서덕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대들은 궁녀가 죽어나간 소문을 듣지 못했는가.” '영조왕세제수책시 책례도감의궤'. 우여곡절 끝에 왕세제에 오른 연잉군과 부인인 달성군 서씨의 책봉과정을 적은 의궤이다.|서울대 규장각 소장 ■시험삼아 궁녀와 종5품 내명부 여인을 독살시키다 그러면서 서덕수가 “이 약이 신통한 효험이 있으니 다른 곳에 쓰려고 한다”면서 “그 약을 구하려면 천 여 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10여 일 후인 5월..
승리한 패배자 경순왕, 왜 임진강변에 묻혔나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무덤은 경주에 없습니다. 경순왕릉은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임진강변에 있습니다. 그것도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에서 불과 50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궁금증이 생깁니다. 경순왕은 왜 고향땅을 두고 머나먼 임진강변에 묻혔을까요. 거기에는 의미심장한 이유가 있답니다. 경순왕을 흔히 신라의 천년사직을 고려에 고스란히 바친 무능한 군주로 치부됩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실리를 챙겼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우선 망국 후에도 43년을 더 살았고, 고려 태조 왕건보다 34년을 더 장수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의 후손들이 고려왕조를 지탱했습니다. 그래서 사가들은 경순왕을 두고 '승리한 패배자'라는 소리를 합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84회 주제는 '승리한 패배자 경순..
연산군에게 직언한 신하도 있었다 통칭 임금의 눈과 귀를 가리는 신하를 일컬어 ‘간신(姦臣)’이라 한다. 하지만 간신이라고 해서 다 같은 간신이 아니다. 전한의 대학자인 유향(기원전 77~6)은 간신 및 아첨꾼의 특징을 6가지로 일컬었다. 이것이 유향의 육사론(六邪論)이다. “녹봉만 기다리고 사사로운 이익만 취하며 자리만 채우는 신하는 구신(具臣)이다. 임금의 눈과 귀를 가리고 말과 행동이 다 옳다고 하면서 영합하는 신하는 유신(諛臣)이다. 음흉하지만 겉으로 근면한 척 좋은 말과 표정을 지어 임금의 임용기준을 흐리게 만들고 신상필벌의 명령도 실행되지 않게 하는 자는 간신(姦臣)이다. 지혜와 말재주는 뛰어나지만 안으로는 골육의 정을 이간질하고, 밖으로 조정을 어지럽히는 자는 참신(讒臣)이다. 권세를 갖고 당파를 지어 자기 세력을 더욱 쌓아..
설탕, 인간의 살이 녹은 하얀 유혹 세종대왕과 엘비스 프레슬리…. 시대를 초월한 두 인물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당뇨병에 시달렸다는 것입니다. 세종대왕은 하루에 물을 한동이씩 들이킬 정도였고, 엘비스 프레슬리는 땅콩버터와 꿀, 바나나, 베이컨을 얹은 샌드위치를 한 번에 4개씩이나 먹는 등 탄수화물 중독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설탕…. 그것은 달콤하지만 치명적인 유혹입니다. 6~7세기 벵골지방에서 처음 정제된 이후 인류전체를 단맛으로 물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흑인역사가 바로 이 설탕 때문에 시작됐습니다. 바로 이 설탕 때문에 아프리카는 지금도 기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토록 달콤한 설탕 한덩어리에 바로 흑인, 즉 인간의 피와 살이 녹아있습니다. 그 설탕은 지금 이 순간엔 인간의 건강을 해치고 있습니다. 전세계 4억200..
교태전, 사정전, 그리고 청와대 경복궁에서 가장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궁전이 교태전이다. 왕비의 침전이다. 이름이 얄궂다보니 임금의 사랑을 얻으려는 왕비가 교태(嬌態)를 부리는 침실이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천만의 말씀이다. ‘교태(交泰)’는 에서 하늘과 땅의 사귐, 즉 양과 음의 조화를 상징한다. 임금과 왕비가 사랑을 나누고 후사를 생산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교태전(사진)이라 한 것이다. 창덕궁의 왕비 침전 이름은 대조전(大造殿)이다. 임금과 왕비가 만나 ‘큰 인물을 낳는다’(大造)는 뜻을 지니고 있다. 1395년 태조 이성계는 서울에 새 궁궐을 짓고 대대적인 잔치를 베풀었다. 태조는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정도전에게 “새 궁궐의 이름을 지으라”고 했다. 이때 정도전은 “(임금의) 술대접에 취하고 임금의 덕에 배부르니 후왕의 앞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