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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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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 3’ 황제와 ‘구천구백세’ 실세 1624년(인조 1년) 반정 이후 새 임금(인조)의 즉위를 중국 조정에 고하고 귀국한 홍익한(1586~1637)은 매우 의미심장한 명나라 소식을 전한다. “글쎄, 중국 명나라에서 지금 천하의 권세를 가진 첫번째는 태감 위충현이고, 둘째는 객씨이고, 셋째가 황제(희종)이라 합니다.”() 지금 명나라의 권력서열을 따지면 ‘넘버 1’은 환관 위충현, ‘넘버 2’는 황제의 유모(객씨)이며, 만백성의 어버이여야 할 황제는 ‘넘버 3’라는 이야기가 퍼졌다는 것이다. 황제는 1620년 부왕인 광종이 즉위 29일만에 급서하자 16살의 나이에 아무런 준비없이 황위에 올랐다. 목공일에 빠져 모든 정사를 환관 위충현과 유모 객씨에게 넘겼다. 청나라 시대 환관. 황제의 측근에서 종종 실권을 휘둘렀다. 그 같은 위충현과 객씨의..
'아녀자 정치'를 욕보이지 마라 중국 역사를 쥐락펴락한 여인 둘을 꼽자면 바로 여태후(한나라)와 무측천(당나라·대주)이다. 여태후는 한고조 유방의 정부인이다. 한나라 창업의 공신인 한신과 경포, 팽월을 제거하고 통치의 초석을 마련한 여걸이다. 여태후의 계책에 말린 한신은 죽어가며 이렇게 말했다. “내 아녀자(여후)에게 속았구나. 이것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랴.(乃爲兒女子所詐 豈非天哉)” 당나라 고종과 무측천의 무덤인 건릉 ■사람돼지와 토사구팽 그러면서 한신은 그 유명한 토사구팽(兎死狗烹)의 고사를 남겼다. 물론 한고조는 한신의 도움으로 천하를 얻었다. 하지만 창업 이후, 한신처럼 빼어난 인물은 걸림돌일 뿐이었다. 여태후는 한나라를 위협할 수 있는 한신을 도모한 것이다. 창업공신인 경포와 팽월도 여태후의 계책에 목을 내놓고 말았다. 남..
'오방낭'을 위한 변명 우리 전통옷의 특징이 하나 있다. 호주머니가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 마고자에 달린 호주머니는 뭐냐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마고자는 임오군란의 배후로 지목돼 청나라에 유폐된 흥선대원군이 1885년 귀국하면서 입은 청나라 옷(마괘)에서 유래됐다. 이전엔 남녀노소가 별도의 주머니를 달고 다녔다. 주머니의 유래는 뿌리깊다. “신라 혜공왕(재위 765~780)은 어릴 때 비단주머니(錦囊)를 차고 여자아이처럼 놀았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천마총에서 출토된 황금허리띠에도 이런저런 장식품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고려 때도 허리띠에 갖가지 장식에 향이 든 비단주머니(錦香囊)을 찼는데, 많을수록 귀하게 여겼다.() 자연스레 옷과 장식품은 당대의 멋과 전통을 담은 패션이 된 것이다. 특히 색깔에 심오한 뜻을 새겼..
18세기 가왕(歌王) 밴드의 '나는 가수다' 경연 “당세의 가호(歌豪) 이세춘은 10년간 한양 사람들을 열광시켰지.(當世歌豪李世春 十年傾倒漢陽人) 기방을 드나드는 왈자들도 애창하며 넋이 나갔지.(靑樓俠少能傳唱 白首江湖解動神) 18세기 사람인 신광수(1712~1775)가 남긴 의 ‘증가자이응태(贈歌者李應泰)’라는 시의 구절이다. 무슨 내용인가. 신광수는 호걸가수 이세춘의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거듭했으며, 10년간이나 유흥업소에서 애창됐음을 전하고 있다. 신광수가 이 시를 지은 것이 1761~63년 사이였다. 따라서 이세춘은 1750~60년 사이 조선의 가왕(歌王)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단원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월야선유도’. 달밤에 대동강변에서 벌어지는 선상연회의 장면이다. 이세춘 그룹의 게릴라콘서트도 이같은 분위기에서 펼쳐졌을 것이다. ..
미인박명인가. 지광국사현묘탑의 팔자 미인박명인가. 지광국사현묘탑을 두고 하는 말이다. ‘미인’이란 우리나라 부도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라는 뜻이고, ‘박명’은 그만큼 탑의 팔자가 기구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절이 완전히 불타는 수모를 묵묵히 지켜보았을 탑은 한일합병 직후인 1912년 산산이 분해 되어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돌아온다. 그런데 연구자 이순우가 발굴공개한 자료, 즉 후지무라 토쿠이치라는 일본인이 쓴 ‘현묘탑 강탈시말’이라는 글을 보면 90년간 베일에 쌓였던 현묘탑 반출의 이력이 낱낱이 드러난다.(이순우의 ·하늘재) 경복궁 내에 서있는 지광국사현묘탑. 지금 해체 복원작업 중이다. 이 글은 후지무라가 편찬한 ‘거류민지석물어(居留民之昔物語·1927년간)’에 들어있다. 그가 밝힌 전말은 이렇다.1911년 9월쯤 모리라는 인물이 ..
지광국사는 왜 원주에 왕찰을 지었나 “금년(1609년) 가을 휴가를 얻어 와서 얼마동안 있었다. 마침 지관(智觀)스님이 찾아와 ‘기축년(1589년)에 법천사에서 1년 주석했다’고 했다. 그 말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스님과 함께 길을 나섰다. ~난리(임진왜란)에 불타서 무너진 주춧돌과 함께 절터의 흔적이 토끼와 사슴이 다니는 길에 남아 있었다.” 풍운아 허균(1569~1618)은 ‘유원주법천사기(遊原州法泉寺記)’에서 원주 법천사를 둘러본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허균의 기록 덕분에 이로써 법천사는 1589년까지 존속하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됐으며 1609년에는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법천사는 이후 중창됐다는 기록이 없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처량한 신세를 면치 못한다. 그저 남아 있는 지광국사현묘탑이나 당간지주, 그리고 사찰에 사용되..
진시황 시대 '개그콘서트'와 김제동 요즘의 개그맨이나 예능인이라 할만한 사람들이 2500~2600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사마천 같은 역사가는 그런 이들을 골계가라 했습니다. 음악에 능하고, 우스갯소리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골계가들은 군주의 곁에 머물며 군주의 귀를 즐겁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역할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군주가 잘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신랄한 풍자와 멋들어진 해학으로 군주를 올바른 길로 이끌었습니다. 직접적인 말이 아니었습니다. 은유법과 반어법을 섞어가며 절묘한 말솜씨로 군주의 그릇된 마음을 되돌려놓았습니다. 요즘으로 친다면 풍자개그였던 셈이죠. 심지어 우전이라는 골계가는 천하의 폭군이라는 진시황 앞에서 스스로 직접 ‘짠’ 개그로 멋들어진 ‘개그콘서트’를 선보였습니다. 호위군사들을 위한 개그코너였습니다. 최근 ..
히틀러 생가와 중앙청 철거 ‘평화, 자유, 민주주의를 위해. 파시즘은 절대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숨져간 수백만이 일깨워준다.’ 오스트리아의 국경도시인 브라우나우 암 인의 잘츠브르거 포르슈타트 15번가에 기념비가 하나 서있다. 아돌프 히틀러의 생가(사진)임을 알려주는 비석이다. 1889년 4월 세관원이던 아버지(알로이스 히틀러)가 게스트 하우스였던 3층짜리 노란색 건물의 방을 빌렸다. 이곳에서 히틀러를 낳았다. 비록 어린 히틀러가 불과 3년 살았을 뿐이지만 히틀러 생가로 유명해졌다. 나치시대 히틀러가 태어난 방은 성지가 됐고, 아돌프 히틀러 거리와, 아돌프 히틀러 광장까지 생겼다. 1938년 히틀러의 개인비서 마틴 보르만은 이 집을 사들여 공공도서관으로 꾸몄다. 미군은 2차대전 막바지 독일군에 의해 파괴될 뻔 했던 생가를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