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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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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남편의 절규와 송중기 요즘 남편들은 ‘오징어’라는 소리를 곧잘 듣습니다. 그래서 뭐냐고 물었더니 ‘못생긴 남자’라는 뜻이랍니다. 왜 하필 ‘오징어냐’고 또 물으니 평면적이고 윤곽도 뚜렷하지 않는 오징어를 닮았으니 그런 소리를 들어도 싸다는 것입니다. 하기야 고금을 통틀어 오징어 이미지는 좋지 않습니다. 그 어원이 ‘까마귀 도적’ 즉 오적어(烏賊魚)에서 비롯된 것부터가 그렇습니다. 게다가 먹물로 바다를 흐리게 해서 먹이를 잡는다는 비열한 이미지까지 더해졌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오징어 먹물로 글씨를 쓰면 처음엔 선명하다가 시간이 흐르면 그 흔적이 떨어져나가 나중엔 빈종이로 변한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징어 먹물은 ‘사기계약’ ‘거짓약속’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하지만 오징어는 억울합니다. 그렇게까지 폄훼될 동물이 아니기 때..
축구영웅 크루이프의 죽음 네덜란드 축구영웅 요한 크루이프(68)는 스포츠계의 상식을 초월한 인물이다. 하루 80개비의 담배를 피우는 체인스모커였다. 경기 중 전반이 끝나고 하프타임 때가 되면 잽싸게 담배를 피워댔으니 말이다. 훈련도 빼먹기 일쑤였다. 시건방도 무진장 떨었다. 줄담배를 피워대고 훈련에 관심도 없으면서 “축구는 몸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게으른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밖에 없었다. 월드컵 축구를 시청하느냐는 질문에 “없다. 날 TV 앞에 앉혀놓을 유능한 선수가 없으니까…”라 너스레를 떨었다. 슈퍼스타의 상징인 9번이나 10번 대신 14번을 단 이유를 두고도 “9번은 디 스테파노, 10번은 펠레가 이미 달고 있으니까 헷갈릴까봐”라며 으쓱댔다. 그의 자부심 대로 그의 이름은 디 스테파노-펠레-크루..
고려시대 개경 8학군은 어디였을까 최근 중국발로 흥미로운 뉴스가 있었습니다. 베이징 뒷골목 원창(문창·文昌) 지역의 쪽방(11.4㎡)이 10억원 가까운 가격에 팔렸다는 소식입니다. 3.3㎡당 2억8000만원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집값이었습니다. 왜 일까요. 학군 때문입니다. 이 동네 이름이 우리 말로 ‘문창(文昌)’이라는 것도 ‘맹모삼천’을 부추겼습니다. 도교에서 ‘문창’은 ‘학문의 신’, ‘공부의 신’으로 추앙을 받고 있답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문창’을 모신 사당에 기도한 뒤 과거를 치렀답니다. 베이징의 문창, 강남의 대치동 같은 이른바 ‘교육특구’는 고려의 수도 개경에도 있었습니다. 해동공자의 별명을 갖고 있는 최충의 사립학교, 즉 문헌공도가 있었던 곳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지금의 대치동처럼 고려시대 유수 학원이 있었던 동네도..
아하! 문외한도 이해하는 중력파 얼마전 아인슈타인이 100년 전 예견한 중력파가 마침내 검출됐다. 세계과학계는 우주를 보는 새로운 창이 열렸다고 흥분했다. 이후 수많은 전문가들이 중력파 검출의 의미를 열심히 설명했다. 하지만 너무 어려워서 눈에 침침하도록 들여다봐도 역불급이었다. 필자도 머리나쁨을 한탄하면서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러다 어떤 책에서 다소간 위안이 되는 구절을 찾았다. 아인슈타인도 중력이론(일반상대성 이론)을 체계화하는데 8년 이상 걸렸으며, 그 이론을 이해한 과학자가 전세계를 통틀어 12명도 안된다는 대목이었다. 무릎을 쳤다. 그래, 연작이 홍곡의 뜻을 그리 쉽게 알 수 있겠는가. 그렇게 고차원의 이야기를 고작 원고지 몇 장으로 정리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래도 중력파를 필자 같은 문외한의 눈높이에서 설명할 수는 있지..
국민MC 유재석이 SNS 안하는 이유 “내가 어디서 훈련하는 지 알지? 기다릴테니 당장 뛰어와. 내가 10초 안에 기절시켜줄게.” 2011년 5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간판 스타 웨인 루니가 트위터에 남긴 글이다. 라이벌인 리버풀의 축구팬이 트위터에 지속적으로 비난글을 달자 맞대응 끝에 그만 폭발해버린 것이다. 루니는 “농담이었다”고 진화했지만 전세계로 퍼진 뒤였다. 그러자 당시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나서 루니를 꾸짖었다. “그것(SNS) 아니라도 인생에서 할 일이 태산같아. 차라리 도서관에서 책을 읽어.” 퍼거슨 감독의 다음 한마디가 의미심장하다. “I’m serious. What a waste of time” ‘진심인데, SNS는 정말 시간 낭비야’로 해석될 이 말은 국내에서 ‘인생의 낭비’로 의역되면서 디지털 시대 최고의 명언 반열에 ..
딜쿠샤와 은행나무 1896년 광산업자인 아버지(조지 테일러)를 따라 조선에 온 미국인이 있었다. 21살 청년 앨버트 테일러였다. 테일러 일가는 ‘노다지(No touch)’의 어원이 된 평안도 운산금광을 관리하다가 충북 직산탄광을 직접 운영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이 대목이라면 테일러 일가의 행보를 긍정적으로 서술할 수 없다. 당시 금광채굴권이 모두 외국인에게 넘어갔고, 조선의 백성들이 외국인들의 ‘노 터치’ 으름장에 터전을 잃고 쫓겨났으니 말이다. 1920년대 딜쿠샤 건물과 은행나무. 앨버트 테일러 부부(아래 사진) 하지만 앨버트에게 조선은 ‘엘도라도’ 이상의 의미였다. 그는 아버지(조지)가 1908년 사망한 뒤에도 조선에 남았다. 단순히 돈만 번 것이 아니었다.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 등 식민지 조선에서 자행된..
삐라, 적의 마음을 쏘는 종이폭탄 요즘 북한이 뿌린 삐라가 서울시내 한복판까지 떨어지고 있습니다. 50대 이상 사람들이라면 어릴적에 한 번 쯤은 비라를 주워보았을 것입니다. 삐라를 파출소가 갖다주면 연필 같은 학용품을 주었지요. 옛날 생각이 납니다. 역사서에 등장하는 삐라는 어지러웠던 신라 말기 진성여왕 때 서라벌 시내 한복판에 떨어진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진성여왕이여! 신라여! 망하리라!’하며 저주했던 삐라였습니다. 그후 47년만에 정말로 신라는 망했습니다. 한국전쟁 때도 삐라는 마치 눈처럼 뿌려졌습니다. 미군은 25억~40억장의 삐라를 뿌렸다고 합니다. 전쟁 후에도 삐라의 제작기법은 체제유지를 위한 대중홍보수단으로 사랑받았습니다. 물론 남북한 모두 상대방을 겨냥한 냉전의 수단으로 삐라를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삐라는 왜 그렇..
조선의 임금들도 순식간에 잿더미 되다 그랬으니 임금의 어진을 그리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어진의 제작은 대개 3종류로 나뉜다. 임금의 생전 때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리는 도사(圖寫)와, 임금의 사후에 그리는 추사(追寫)가 있다. 또 이미 그려진 어진이 훼손됐거나 혹은 새로운 진전에 봉안할 경우 기존본을 토대로 그려내는 모사(模寫)가 있다. 어진을 제작하려면 우선 임시 관청인 도감을 설치하고 화원을 선발했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이는 임금의 얼굴을 직접 그리는 어진화사였다. 대신들이 당대 초상화를 가장 잘 그린다는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을 뽑았다. 때에 따라서는 시험을 거쳤다. 예컨대 1713년(숙종 39년) 숙종 어진을 도사할 때 당대 내로라하는 화가들을 추천받아 모아놓고는 각각 초상화 초본을 제출하도록 했다. 이렇게 선발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