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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쏘공' 조세희 작가의 신춘문예 당선시절 “현실적 무대는 분명치 않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은 문장과 극한적인 긴장감은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우승의 영관을 획득하기에 족하다고 보겠다.” 경향신문 1965년 1월 1일자와 4일자는 그 해 경향신춘문예 당선작과 심사평 및 당선자 소감을 싣고 있다. 앞에 인용한 심사평은 소설 부문 당선작인 조세희의 (상금 2만원) 심사평이다. 당시 심사를 맡은 황순원·김동리 작가의 심사평을 더 보자. “남은 세 편에서 는 걸하사’와 그의 아내의 궁상에 대한 과장적인 묘사가 작자의 목적의식을 앞세우는 느낌이었고, 은 가장 이야기를 만들어 놓은 편이나 문장세련이 부족했고~애정관계에 모순점이 있어 당선의 영예를 에 돌리게 됐다.” ■“숱한 파지만을 남기기 일쑤다”-조세희 작가 경희대에 재학 중 당선한 조세희 ..
고려 조선을 뒤흔든 환관 이야기 10번째 팟캐스트입니다. 이번 주는 '우리 역사 속의 환관 이야기'입니다. 신라본기 흥덕왕조에 처음 환관의 기록이 보입니다. 사실 우리 역사를 훑어보면 중국처럼 환관을 대량으로 양성하고 기용하고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궁형이나 자궁(스스로 거세)을 통해 환관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답니다. 다만 어릴 때 개(犬)에 물려 고자가 된 케이스가 훗날 환관이 되었다고 하네요. 물론 조선 초기에는 명나라 황제의 조칙에 따라 환관을 만들어 중국에 보내는 경우가 있엇다고 하지만…. 우리 역사 속에서도 나라를 위기에 빠뜨린 환관들이 심심찮게 있었습니다. 고려 의종 때 환관 정함은 사치향락과 황음에 빠진 의종을 대신해 권력을 마음껏 주물렀습니다. 오죽했으면 “나라의 권세가 모두 고자(정함)에게 있구나!”하는 한탄이 개경거..
세종대왕이 성병에 걸렸다? “소갈증(당뇨)와 부종의 뿌리가 근절되지 않았는데, 이제 또 임질(淋疾)을 얻은 지 11일이 되었다. 번다한 정무를 처리하면 기운이 노곤하다.” 은 1438년(세종 20년) 4월 28일자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기록해놓는다. 세종대왕이 ‘임질’에 걸려 고생하고 있음을. 그것도 세종 본인의 입으로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창덕궁에 있는 내의원. 임금의 질병을 관리하는 관청이었다. 당뇨와 두통, 이질 등 다양한 질병에 시달렸던 세종은 임질에 걸려 정무를 볼 수 없는 통증이 발작하는 등 약 4년 동안 고생했다. 임질이 무슨 병인가. ‘임질은 임균이 일으키는 성병이다. 주로 성교로 옮아 요도 점막에 침입하며, 오줌을 눌 때 요도가 몹시 가렵거나 따끔거리고 고름이 심하게 난다.’(국립국어원의 ) 한마디로 임질은 ..
환관 조고, 황제의 문고리를 잡다. “폐하는 어립니다. 조정에서 대신들과 정사를 논하면 폐하의 단점만 보일 겁니다. 이제부터는 폐하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원전 209년 환관 조고가 허수아비 황제(진 2세 호해)에게 수근댔다. “천자를 ‘짐(朕)’이라 부르는 이유를 아느냐”는 것. 짐(朕)이란 단어는 ‘징조’ ‘조짐’의 뜻이어서 무슨 일인지 아직 모른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즉 천자의 일을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된다는 게 조고의 수근거림이었다. 무슨 뜻이냐. 한마디로 조고는 황제와 다른 대신들과의 소통을 완전히 막아버린 것이다. 진 2세는 늘 구중궁궐에 쳐박혀 있었고, 모든 국사는 환관 조고의 수중에 떨어졌다. ■황제의 어차와 옥쇄를 수중에 환관 조고의 일화가 바로 ‘문고리 정치’의 가장 악명높은 사례가..
문고리 권력의 원조, 환관 정치의 정체 이번주 팟캐스트 9회는 ‘환관’ 이야기입니다. ‘문고리 권력의 원조…. 환관 그들을 위한 변명’ 입니다. 중요 부위를 스스로 자르거나, 혹은 형벌을 받아 잘린 남성들의 박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라는 불후의 역사서를 쓴 사마천도 궁형을 당한 뒤 ‘치욕’이라는 낱말을 19번이나 쓰면서 괴로워했답니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는 것보다 더 엄청난 치욕은 없다. 하루에도 창자가 9번 끊어지는 것 같다”고 괴로워했답니다. 사마천이야 강제로 잘렸다지만 환관이 되려고 스스로 자른 남성은 과연 누구일까요. 그들은 왜 사마천의 말마따나 ‘몸이 망가져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치욕을 감수하면서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잘라야 했을까요. 명나라 공식역사서를 보면 명확한 이유가 나옵니다. “환관은 황제의 배후에서 ..
뒤바뀐 무덤의 수수께끼 “민통선 이북, 어느 무덤에서 호리꾼(도굴꾼)이 무덤 하나를 하나를 파헤쳤는데요….” 1989년 어느 날, 국립중앙박물관에 흥미로운 제보 하나가 접수됐다. 어느 도굴꾼이 민간인 통제선 이북의 무덤을 파헤쳤는데, 그 무덤의 벽면과 천정에 그럴싸한 그림이 그려져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정양모 박물관 학예실장의 귀가 번쩍 띄였다. 무덤의 벽가 천정에 그림이라? 그것은 바로 벽화라는 것이 아닌가. 사실이라면 대단한 뉴스였다. 특히 한반도 남부에 벽화묘는 극히 드문 것이어서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민통선 이북 파주 서곡리의 도굴된 무덤에서 확인된 고려말 벽화그림. 무덤의 주인공을 그리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민통선 고분벽화의 비밀 알다시피 고분벽화의 전통은 삼국시대, 특히 고구려에서 화려한 꽃을 피웠..
팟 캐스트(8회)조선시대 ‘솔로대첩’은 국가가 나섰다 “복사나무의 어여쁨이여! 활짝 핀 그 꽃이로다.(桃之夭夭 灼灼其華)”() 연산군이 인용한 의 한 구절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워낙 황음무도한 연산군이다 보니 채홍사가 간택한 여인을 희롱하는 싯구라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연산군은 선남선녀들이 복사꽃처럼 화려할 때 시집·장가를 들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 싯구를 인용했습니다. 희대의 폭군이라는 연산군이 그랬는데 다른 임금들은 오죽했겠습니까. 옛 임금들은 노처녀·노총각의 결혼을 국가정책으로 삼았습니다. 혹자는 “혼인을 제 때 하는 것이 왕정의 급선무”라고까지 말했답니다. 시쳇말로 한다면 국가가 나서서 ‘솔로대첩’을 마련했다는 얘기입니다. 심지어 가난한 남녀가 혼인을 치르지 못할 때는 일가친척이 나서 혼숫감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을 국법으로 정하..
거세된 남성 환관…그들을 위한 변명 “천하의 권세를 가진 첫번째는 태감 위충현이고, 둘째는 객씨이고, 셋째가 황상(황제)이다.’라고…” 1624년(인조 2년) 명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온 홍익한의 사행일기()는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명나라 백성들이 환관 위충현과 그의 내연녀(객씨)의 위세가 황제(명 희종)을 능가했음을 수근거렸다는 것이다. 과연 그랬다. 위충현(?~1627)은 희종의 유모였던 객(客)씨와 사통한 뒤 명나라 국정을 쥐락펴락했단다. 청나라 시대 환관의 사진. 어릴 적부터 거세한 환관은 음석이 여자다워지고 모습 또한 여성스러워졌다고 한다. ■구천구백세! 어떻게 환관이 남성을 회복했느냐고? 위충현은 어린 아이의 뇌(腦)를 생으로 씹어먹고는 양도(陽道)를 회복했다고 한다. 위충현은 안팎의 대전을 손아귀에 넣고 자신을 호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