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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 똥구멍만도 못한 인간들 제가 어렸을 때만해도 원숭이는 흔히 잔나비라 했습니다. 원숭이띠보다는 잔나비띠라 하는데 더 자연스러웠습니다. 왜 원숭이를 잔나비라 했을까요. 사실 잔나비가 더 먼저였답니다. 원숭이라는 한자어는 18세기부터나 등장한답니다. 그러나 ‘빠른(잰) 원숭이(납·申)’라는 뜻의 잔나비는 16세기 정철의 가사 ‘장진주사’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요즘엔 잔나비가 다소간 원숭이를 폄훼하는 말로 일컬어집니다. 사실 잔나비, 즉 원숭이라는 동물은 사람의 얼굴로 사람의 흉내를 낸다고 해서 ‘혐오·흉악’스러운 인물의 상징으로 꼽혔죠. 예컨대 조선을 침략한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은 “태어난 해(1536년)와 태어난 월·일·시 모두가 병신(丙申)이어서 원숭이왕(猿王)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간신이거나 대역죄인..
돌부리에 신발 털다가 찾아낸 단양 적성비의 비밀 1978년 1월6일. 정영호 교수가 이끄는 단국대조사단이 충북 단양을 찾았다. 온달의 유적을 찾고, 죽령을 중심으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밝히는 학술조사를 벌이기 위함이었다. 조사단이 찾아가려고 한 곳은 단양 읍내 뒷산인 성재산(해발 323m·적성산성)이었다. 오후 2시. 조사단은 간밤에 내린 눈이 하얗게 뒤덮은 산에 올랐다. 정영호 교수의 회고담. “성 안에는 옛날 식의 기와편과 토기편이 흩어져 있었지. 대부분이 신라토기였고. 학생들에게 ‘글자가 있는 기왓장을 수습하면 맥주 한 병씩 준다.’고 했는데….” 하지만 별무신통. 간밤에 내린 눈에 녹아 진탕이 되었고, 조사단은 신발에 묻은 흙을 털려고 두리번거렸다. 마침 직경 한 뼘쯤 되는, 흙묻은 돌부리가 지표면을 뚫고 노출돼 있었다. 안성맞춤이었다. 조..
의리의 사나이, '정몽주으리'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하는 질문만큼이나 곤란한 것이 바로 이성계(혹은 정도전)가 나쁜 사람이야, 정몽주가 나쁜 사람이야 하는 질문입니다. 아들이나 딸이 그렇게 물어온다면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네가 보기에 나쁜 사람이면 나쁜 사람이고, 네가 보기에 좋은 사람이면 좋은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무슨 시답지 않은 이야기기냐고 하겠지만 그 말이 정답입니다. 아니면 이렇게 말해도 좋습니다. 왜냐면 역사라는 것은 해석하는 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읽고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는 전적으로 읽는 자의 몫이니까요. 요즘 텔레비전 사극은 여말선초의 사건과 인물을 집중해서 다루는게 트렌드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이나 처럼 기록도 풍부한데다 워낙 드라마틱한 상황이 많으니 그럴만도 합니다. 그 중에서도 개국의 주역들이..
백제 손바닥에 있던 마한-나주 복암리(하) “마한의 시작은 BC 3세기 무렵이다. 영산강 유역에서 백제와는 전혀 다른 정치체를 유지하며 AD 6세기까지 존재했다.” 이것이 이른바 최근 대두되고 있는 마한론의 실체이다. 나주 복암리 등 영산강 유역에서 나타나는 주구토광묘(도랑을 두른 무덤)와 옹관묘, 그리고 전방후원형 고분을 중심으로 한 초기횡혈식 석실묘 등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재구성한 고대사다. 결국 마한은 8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유지해온 고대국가라는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백제와는 다른 문화를 유지했다고 백제와는 전혀 다른 정치체, 즉 고대국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백제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800년간이나 정치체를 유지했다면 왜 마한과 관련된 역사기록은 없을까.’ 차근차근 풀어보자. 마한에 대한 기존의 통설을 살펴보자...
어느 마에스트로의 퇴장 오케스트라 연주를 보고 듣는 음악의 문외한들이 한번쯤 갖게 되는 궁금증이 있다. 작곡자도 아닌데다 악기도, 연주도, 소리도 내지 않은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향한 박수갈채를 독차지한다는 것은 일종의 사기가 아닐까. 아닌게 아니라 영국의 음악학자 한스 켈러는 “음악만 들으면 되지 지휘자는 불필요한 존재”라 주장했다. 헝가리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칼 플레시도 “지휘자처럼 사기꾼이 진입하기에 좋은 직종이 없다”고 했다. 물론 음악이 단순했던 시절에는 수석 연주자의 신호에 따라 무난히 박자를 맞췄다. 17세기 베니스에서는 오페라의 아버지로 일컫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1567~1643)를 위해 ‘마에스트로 디 카펠라’(maestro di cappella·교회 음악감독)라는 자리를 만들었다. 최고의 음악가를 고용해서..
조선의 임금들도 순식간에 잿더미 되다 그랬으니 임금의 어진을 그리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어진의 제작은 대개 3종류로 나뉜다. 임금의 생전 때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리는 도사(圖寫)와, 임금의 사후에 그리는 추사(追寫)가 있다. 또 이미 그려진 어진이 훼손됐거나 혹은 새로운 진전에 봉안할 경우 기존본을 토대로 그려내는 모사(模寫)가 있다. 어진을 제작하려면 우선 임시 관청인 도감을 설치하고 화원을 선발했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이는 임금의 얼굴을 직접 그리는 어진화사였다. 대신들이 당대 초상화를 가장 잘 그린다는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을 뽑았다. 때에 따라서는 시험을 거쳤다. 예컨대 1713년(숙종 39년) 숙종 어진을 도사할 때 당대 내로라하는 화가들을 추천받아 모아놓고는 각각 초상화 초본을 제출하도록 했다. 이렇게 선발된 ..
세종이 고려임금의 어진을 불태운 까닭은 옛 초상화를 보고 있노라면 한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왜 쭈글쭈글한 노인들만 주인공으로 등장했을까. ‘꽃청년’들은 왜 초상화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을까. 다 이유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수양도 덜됐고, 학식도 부족하며, 경륜도 쌓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상화에 등장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초상화를 그저 사람을 본떠 그린다는 의미의 ‘초상(肖像)’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사진(寫眞)이라 했습니다. 내면의 ‘참됨(眞)’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랬으니 아직 모든 면에서 설익은 젊은이들은 ‘사진’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랬으니 ‘터럭 한올, 털끝 한오라기(一毫一髮)’라고 허투루 그릴 수 없었습니다. 임금의 초상화도 어진(御眞)이라 했습니다. ‘임금의 참됨’을 드러내는..
올해의 단어와 혼용무도 1999년 일본 통신사 NTT 도코모의 구리타 시게타카(栗田穰崇)가 200여개의 그림문자를 만들었다. 그림(え·繪)과 문자(もじ·文字)를 합성한 ‘이(에)모지’라 했다. 이모지는 컴퓨터 자판의 글자 및 부호로 감정을 표현한 이모티콘과 달랐다. 유니코드 시스템을 이용한 실제 그림이었다. 이모지는 아이폰과 안드로이드 기기 등에 도입되면서 삽시간에 퍼졌다. 최근 영국의 옥스포드 사전은 ‘이모지’ 가운데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얼굴(face with tears of joy)’을 ‘2015년의 단어’로 선정했다.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난민(refugee) 등 쟁쟁한 후보를 제쳤다. 캐스퍼 그래스워홀(Grathwohl) 옥스포드 회장은 “알파벳 같은 기존문자가 강렬한 시각 효과와 빠른 속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