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

(1347)
2000년전 동북아의 교역중심지-해남 군곡리 1983년 3월 어느 날. 황도훈이라는 해남의 향토사학자가 있었다. 해남문화원장을 지내면서 고향 땅을 답사하는 것을 여생의 일로 삼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군곡리 마을을 지나던 황씨의 눈길이 멈췄다. 무슨 옹관 같은 유물이 눈에 띈 것이었다. 게다가 불에 탄 흔적도 있었다. ■ 2300년 전 음식물 쓰레기장 ‘이건 야철지 아닌가.’ 독학으로 고고학을 배우던 그의 눈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는 행장을 꾸려 서울로 올라가 서울신문사를 찾았다. “회사 논설위원 중에 해남 사람이 있었는데, 황도훈씨와 친구였지. 그 인연으로 우리 신문을 찾아온 거지요.”(황규호 전 서울신문 기자) 황 기자는 즉시 황도훈과 함께 해남으로 내려갔다. 최성락 목포대 교수와도 연락이 닿아 함께 군곡리 현장으로 달려갔..
기황후, '고려판 한류' 열풍의 주역 < “공녀로 뽑혀 원나라로 끌려가는 날 옷자락을 부여잡고 끌다가 엎어집니다. 울부짖다가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스스로 목을 매 죽는 자도 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원나라의 간섭이 극에 달했던 1335년이었습니다. 이곡(李穀·1298~1351)이 상소문을 올려 원나라가 강제로 뽑아가는 공녀(貢女)들의 피맺힌 사연을 호소했습니다. 말 그대로 ‘공물(貢物)’로 끌려가는 여인이었으니 얼마나 비극적입니까. 끌려간 소녀들의 상당수는 고된 노동과 성적인 학대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한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1333년 14살의 나이로 끌려간 기씨 소녀가 바로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소녀의 첫 직책은 원 황제 순제(재위 1333~1372)의 차와 음료를 주관하는 궁녀였습니다. 소녀는 단번에 황제의 넋을..
마릴린 먼로와 플레이보이 앨프레드 킨제이의 , 즉 킨제이 보고서는 1948년 출간 두 달 만에 20만부 이상 팔렸다. 일리노이대 재학생이던 22살 청년 휴 헤프너에게도 충격적이었다. 청도교적인 가정에서 자랐고, 여자친구와도 임신이 두려워 실제 성교를 번번이 포기해야 했던 ‘불타는 청춘’이 아니었던가. 그는 “킨제이는 성에 대해 우리가 위선자라는 것, 그것으로 많은 상처를 받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고 회고했다. 졸업후 고교 동창생과의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았던 헤프너는 포르노 파티나 외도 같은 성적인 모험주의로 끓어오르는 열망을 풀었다. 그것만으로 허전함을 채울 수 없었다. 헤프너는 자신의 열정과 상상력을 표현할 매체를 창간하기로 결심한다. 주제는 ‘섹스’였다. 이름도 ‘스태그파티(stagparty·남자만을 위한 파티)’라 했다..
제주도에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있는 까닭 1987년 5월 어느 날. 제주도 서쪽 끝 마을인 북제주군 한경면 고산리. 흙을 갈고 있던 마을주민 좌정인(左禎仁)씨가 돌 두 점을 주웠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뭔고?” 고구마처럼 생긴 돌이었는데, 예사롭지 않았다. 좌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돌 두 점을 집으로 가져갔다. “(윤)덕중아, 이 돌들이 이상하게 생겼는데 한번 봐라.” 마을엔 제주대 사학과에 다니던 윤덕중이란 학생이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 이 심상치 않은 돌을 보여준 것이다. 윤덕중 학생은 이 돌 두 점을 다시 스승인 이청규 제주대 교수(현 영남대)에게 보여주었다. 이 교수는 곧 돌을 수습한 현장에서 지표조사를 벌였다. 고산리에서 확인한 융기문토기. 토기는 신석기인들의 화폭이었고, 그들은 토기에 빼어난 예술성을 뽐냈다. ■농부가 찾..
현대미술관장 마리, 과연 무엇을 검열했나 지난 3월16일 아침, 스페인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바르토메우 마리 관장이 ‘짐승과 주권(The Beast and the Sovereign)’ 특별전을 위해 설치 중이던 작품 하나를 본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작가 이네스 두약(57)의 ‘Not Dressed for Conquering(정복을 위한 옷벗음·사진)’이었다. 작품은 전 스페인 국왕인 후앙 카를로스 1세와 볼리비아의 여성노동운동가 도미틸라 충가라, 그리고 개 한마리가 뒤엉켜 성교하는 장면을 형상화했다. 카를로스 1세는 꽃을 토하고 있고, 나치 친위대(SS)의 헬밋들이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마리는 “이 작품을 전시에서 빼라”고 했지만 작가와 큐레이터들은 묵살했다. “관장이 이미 지난 2월 작품의 대여목록을 보고 서명하지 않..
'복면 사관'과 역사가의 조건 정부는 국정 역사 교과서의 집필자를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시쳇말로 ‘복면 사관’을 만든 겁니다. 뿐이 아니라 집필자의 원고 등을 심의할 심의위원들의 명단도 비공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인가요. 사람들은 흔히 전근대적인 행위나 사고를 ‘왕조시대’에 비유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비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왕조시대인 조선의 사관선발 절차를 한번 보겠습니다. 과연 ‘왕조시대’라 손가락질 할 수 있겠습니까. 왕조시대의 사관? 아무나 될 수 없었습니다. 사관이 갖춰야 할 조건이 3가지라 해서 ‘삼장(三長)’이라 했습니다. 삼장의 덕목을 갖춘 사관을 뽑는 작업은 혹독했습니다. 지금 어떻습니까. 정녕 제대로 된 사관을 뽑고 있는 것입니까. 또 우리의 지도자들은 과연 중종처럼 자신의 잘못을 숨김없이 ..
창비 정신과 백낙청 1966년 1월15일 전혀 새로운 형태의 잡지가 창간됐다. 이름조차 생소한 (창비)이었다. 한자를 대폭 줄여 순 한글체를 표방하면서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가로짜기 편집까지 도입했다. 파격의 잡지를 펴낸 이는 28살의 서울대 전임강사 백낙청이었다. 편집실은 백낙청의 집이었고, 2000부를 찍어낸 제작비는 9만원이었다. 당시 사립대 등록금이 3만원 정도였으니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다. 백낙청은 창간사 대신 권두논문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를 실었다. 그는 ‘서구처럼 중산층이 발달한 적이 없는 한국의 현실에서 순수문학을 내세운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며, 한국의 순수주의는 권위주의와 비생산성, 족벌주의, 관권 등 조선 양반계급의 세계에서 비롯된 것’이라 꼬집었다. 순수문학의 허위와 추상을 비판하고 현실참여를 ..
'에이브(abe)와 아베(abe), 오바마의 칠면조 사면 칠면조가 매일 아침 먹이를 주는 주인을 기다리게 됐다. ‘이 시간만 되면 곧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하고 귀납적 추리의 결론을 낸 것이다. 칠면조는 어느 날 아침 9시가 되자 주인을 목빠지게 기다렸다. 그러나 주인은 애타게 기다리던 칠면조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추수감사절의 전날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이 일반화의 오류를 표현하면서 예를 든 ‘러셀의 칠면조’이다. 1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무사했으니 오늘도 괜찮겠지 하는 귀납 추론이 세월호 침몰이나 삼풍백화점 붕괴와 같은 사고를 낳는 것이다. 러셀은 거창한 철학의 문제를 설명하면서 칠면조를 예로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새의 박복한 운명을 웅변했다고 할 수 있다. 칠면조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야생으로 수천마리씩 떼지어 살고 있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