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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학살본능, 제노사이드 1941년 8월 24일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가 BBC 생방송 연설에서 나치독일의 만행을 규탄했다. 그는 나치의 민간인 대량 학살을 두고 “우리는 ‘이름없는 범죄(a crime without a name)’에 직면해 있다”고 표현했다. “이처럼 조직적이고 잔혹한 살육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고….” 독일의 살인특무무대가 빨치산 소탕을 명목으로 소련땅에서 자행한 민간인 학살을 지칭한 것이었다. 나치독일의 만행은 300만 명의 유대인이 한 줌의 재로 변할 때까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사분란하게 이어졌다. 뭐라 딱히 표현할 단어가 없었다. 군대간 전쟁이 아니라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전쟁(war against peoples)’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2004년은 나치 독일의 유태인 집시 학살 60..
신라 공주와 페르시아 왕자의 사랑과 결혼 이번 주 팟캐스트 주제는 ‘신라공주와 페르시아 왕자의 사랑’이야기 입니다. 아니 머나먼 나라의 왕자 공주가, 그것도 1500년 전에 사랑을 나눴고, 혼인까지 했다는 거냐. 그걸 믿으라는 거냐 하고 말씀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란판 단군신화라 할 수 있는 ‘쿠쉬나메’라는 서사시에 나오는 내용이라니 어쩝니까. 그 서사시에 따르면 멸망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자가 중국을 거쳐 신라로 망명합니다. 이란 왕자는 엄청 환대를 받습니다. 양국 선수들끼리 선수를 섞어 이란의 전통 스포츠인 폴로경기까지 벌였답니다. 그리고 이란왕자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신라 공주와 혼인을 하게 됩니다. 양국은 신라-페르시아 연합군을 결성해서 때마침 침략해온 중국군대를 대파하고, 그 여세를 몰아 중국대륙까지 진출합니다. 왕자와 ..
일본은 '임나일본부' 폐기 안했다 1930년대 말 ‘임나일본부’를 강의하던 스에마쓰 야스까즈(末松保和) 교수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학생이 있었다. 경성제대생 김석형(金錫亨)이었다. 해방 후 월북한 그는 1963년 스에마쓰의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는 논문(‘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진출’)을 발표한다. 일본학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논문을 소개한 하타다 다카시(旗田巍)는 “자는 사람 귀에 물을 붓는 것 같은 기상천외한 견해”라 했다. 북한의 김석형은 1963년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에 맞서 이른바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진출' 논문을 발표했다.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본열도로 건너간 삼한 삼국인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이른바 분국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가야인들이 오사카 지역에 세운 분국이 바로 임나라는 것이었다. ..
신라의 성문화는 '여성상위'였다. “신라의 경우 같은 성씨는 물론 형제의 자식이나 고종·이종 자매까지 아내로 삼았다.” 를 쓴 김부식은 “중국의 예속을 따진다면 도리에 크게 어긋난다”면서 신라의 풍습을 평했다. 신라의 자유분방한 성풍속을 웅변하는 고고학·역사학 자료는 많다. 예컨대 보량이라는 여인은 제22대 풍월주(화랑도의 수장·재임 637~640)인 양도공을 사랑했다. 그러나 둘은 어버지는 다르지만 어머니(양명공주)가 같은 남매사이였다. 양도공이 남매간의 혼인을 ‘오랑캐의 풍습’이라며 꺼렸다. 그러자 어머니가 아들을 껴앉고 말했다. “신국(神國·신라)에는 ‘신국의 도(道)’가 있다. 어찌 중국의 예로 하겠느냐.”() 경주 미추 왕릉 지구 계림로 30호분에서 출토된 토우장식 장경호. 다양한 성풍속이 보인다. 신라의 자유로운 성풍습을 ‘신..
'만약' 이성계의 장남이 2대 국왕이었다면 흔적의 역사 24회는 ‘가정법’입니다. 제목은 ‘만약 이성계의 장남이 살아있었다면…’입니다. 오늘은 ‘만약’이라는 가정법을 해보려 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가정법을 써보지 않습니까. 만약 한국전쟁이 나지 않았다면…. 중국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조선이 임진왜란 때 완전히 쫄딱 망했었더라면…. 세종대왕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총에 서거하지 않았다면…. 뭐 이런 가정법 말입니다. 물론 역사를 읽는데 무슨 가정법이냐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끔씩은 가정법을 던져놓고 상상해보는 편도 흥미로울 것 같지 않습니까. 오늘은 이런 가정법입니다. ‘만약 태조 이성계의 장남인 이방우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개국 조선의 2대왕이 되었다면 어찌 됐을까’하는…. 또 아버지의 뜻에 반해 은거의 길을 택한..
'임금 아닌 임금'-덕종 스토리 최근 오랜만에 낭보가 들렸다. 문화재청이 미국 시애틀박물관이 소장중이던 ‘덕종어보’를 기증받았다는 소식이었다. 덕종어보는 종묘 영녕전 덕종실에 있다가 1943년 이후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해외로 유출됐다. 그러다 1962년 문화재 애호가인 토마스 스팀슨이 구매해서 시애틀박물관에 기증한 바 있다. 그런 덕종어보가 53년 만에 귀향한 셈이다. 이번 기증식에는 고인이 된 토마스 스팀슨의 외손자인 프랭크 베일리가 참석했단다. 그런데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해볼 수 있겠다. 덕종은 과연 누구인가. 추존왕인 덕종과 그의 부인 소혜왕후의 능인 경릉. 덕종은 성종의 친아버지이며, 20살에 요절했다. 성종은 아버지를 추존왕으로 모셨다. ■최초의 추존왕 중고등학교 시절 역사를 배운 사람들이라면 줄기차게 외었을 ‘태정태세 문단..
서울은 '정도 2000년'이다. 600년이 아니다. 잘 알다시피 백제는 기원전 18~기원후 660년까지 678년을 이어온 고대국가였다.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백제는 아무래도 웅진(475~538)~사비 시기(538~660)의 백제일 것이다. 물론 이 185년의 백제 역사도 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겼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백제가 또 있다. 기원전 18~기원후 475년 사이에 한성을 도읍으로 삼은 백제이다. 놀라지마라. 이 한성백제는 전체 678년의 백제역사 가운데 4분의 3에 해당되는 492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31명의 백제 임금 가운데 3분의 2가 넘는 21명이 한성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풍납토성 복원도. 온조왕이 처음 쌓을 때는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 즉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게,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게' 궁실을 짓는다는 것이..
백성 버린 선조의 피란길, 그 참담한 징비록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23회 주제는 ‘백성 버린 선조의 피란길, 그 참담한 징비록’입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1592년(선조 25년) 4월 30일 선조 임금이 피란길에 오릅니다. 임진왜란 발발로 왜군이 쳐들어오자 ‘무조건 피란’을 결정한 것입니다. , 등을 보면 목불인견입니다. 선조가 벽제~혜음령을 지나자 밭을 갈던 백성이 대성 통곡합니다. “나랏님이 백성을 버리면 누굴 믿고 살라는 것입니까.” 선조 일행이 임진나루에 닿았을 때 칠흑 같은 밤이었습니다. 임진강변의 승정(丞亭·나루터 관리 청사) 건물을 헐어 불을 피웠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임진나루 건너의 동파역에 도착하자 파주 목사와 장단 부사가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위기가 닥치자 임금이고 뭐고 없었습니다. 하루종일 굶었던 호위병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