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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말리는 동이족의 술사랑 “이건 술이야.” 1974년 초겨울.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핑산(平山). 전국시대(BC 475~BC 221) 중산국(中山國)의 왕릉터에서 흥미로운 유물1만90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졌다. 그 가운데 액체가 가득 찬 병들이 다수 보였다. 조심스레 분석하던 학자들은 깜짝 놀랐다. 곡주(穀酒) 성분이 분명했던 것이다. 결국 그것은 2300년 된 술이었다. 예로부터 중산국의 술은 전설로 남을 만큼 유명하다. 중산국에 적희(狄希)라는 술의 명인이 있었다. 그가 만든 ‘천일춘(千日春)’은 대륙을 풍미했다. 어느 날 유현석(劉玄石)이라는 자가 적희를 찾아왔다. “술맛 한번 보게 해주시면….” 적희가 “아직 숙성이 덜 됐다”고 말렸다. 하지만 유현석은 막무가내로 마셔버렸고, 술에 취해 죽고 말았다. 그로부터 3년이 ..
매맞는 남편 열전 이번 주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주제는 ‘매맞는 남편 열전’입니다. 고려 때 23살 어린 부인에게 지팡이로 맞고 그저 울기만 했던 임금이 있었답니다. 충렬왕입니다. 충렬왕은 왜 어린 부인에게 얻어터졌을까요. 왜구 섬멸의 주인공인 최운해 역시 독한 부인 때문에 식겁했답니다. 부인은 도망가는 남편을 쫓아가 칼로 내리치기까지 했다는군요. 조선 시대 어떤 부인은 “너는 추한 얼굴에 나이도 늙고 기력도 없는데 무엇을 믿고 결혼했냐. 빨리 죽어라”고 남편을 구박했답니다. 이 때문에 남편은 파직되고 부부는 강제이혼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뿐인가요. 어떤 아내는 장애인 남편을 구박하면서 “이 애꾸눈 놈아!”하고 외치는 등 못할 말을 내뱉었답니다. 태조 이성계의 사촌동생은 아내에게 급소를 잡혀 불귀의 객이 되고..
시진핑의 고사성어 외교 “과거를 잊지말고 앞날의 가르침으로 삼자.(前事不忘 后事之師)”( ‘조책’)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해 3월 독일 베를린 강연에서 일본의 난징 대학살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는 뜻의 고서성어를 인용했다. 지난해 9월 미-중 전략경제대회에서는 “자기가 원치 않은 일은 남에게 시켜서는 안된다(己所不欲 勿施於人)”는 ‘안연’을 떠올렸다.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지 말고 상대방을 인정하라고 미국 측에 주문한 것이다. 시진핑의 ‘고전 인용’은 정평이 나있다. 그 가운데 즐겨 인용하는 것이 와 송나라 시인 소동파의 시라고 한다. 지난해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 때는 ‘천리 멀리 한껏 바라보고자 다시 한 층을 오른다(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는 당나라 시인 왕지환의 ‘등관작루(登관雀樓)’를 인용했다. 지난해 ..
벼, 쌀, 밥…똑같은 타밀어와 한국어 드라비다인은 유럽 아리아족의 침입 때(기원전 15세기) 인도 남부로 쫓겨난 토착민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드라비다인의 언어(타밀어) 가운데 한국어와 유사한 단어가 400~1300개나 된다고 한다. 쌀은 sal, 벼는 biya, 밥은 bab, 풀(草)은 pul, 씨(種)는 pci, 알(粒)은 ari, 가래(농기구)는 kalai, 사래(밭고랑)는 salai, 모(茅)는 mol이라 한단다. 볍씨를 ‘아리씨’라 하는 것도 흥미롭다. 아빠와 엄마(암마), 언니(안니)의 경우도 거의 같은 발음이고, 궁디(엉덩이), 찌찌(남성 생식기) 등 신체기관의 명칭도 심상치 않단다. ‘현대 한국어=알타이어 계통’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워온 사람들이라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다. ‘위서 동이전’은 “중국 서북..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정혼녀를 아시나요 이번 주 팟 케스트 30회는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정혼녀를 아시나요’입니다. 최근 문화재청이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부부를 모신 영원(英園·경기 남양주 홍유릉 경내)을 공개했답니다. 영친왕이 1970년 세상을 떠났다니까 45년 만이겠지요. 사실 영친왕이나 부인인 이방자(일본명 마사코)나 정략결혼의 희생양이라는 점에서 한많은 삶을 살았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그나마 두 사람의 혼백 만큼은 함께 묻혀 있지 않습니까. 그 결혼 때문에 평생 수절하며 살았던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가 영친왕의 정혼녀 민갑완 규수입니다. 10살 때 딱 한 번 본 남편감 때문에 61년 간이나 독신으로 살아야 했던 여인. 황실과 가문을 위해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살았던 그녀의 삶을 이번 주 팟캐스트에서 들어보십시요. 블로..
덕수궁 돌담길 “영성문은 작년(1920년) 여름 헐렸다. 영성문터~정동까지 신작로가 뚫렸다.”(동아일보 1921년 7월25일) 덕수궁돌담길이 지금의 모습으로 조성됐음을 알리는 신문기사이다. 영성문(옛 경기여고 길가)은 원래 역대 국왕의 어진을 모셨던 선원전의 출입문이었다. 일제가 고종의 붕어 이후 경운궁(덕수궁의 옛이름)을 대폭 축소하는 과정에서 궁역의 중간을 잘라 길을 내고 담을 쌓은 것이다. 덕수궁돌담길은 조성 당시부터 ‘사랑의 길’로 유명세를 탔다. “그 옛날 덕수궁 담 뒤의 영성문 고개를 사랑의 언덕길이라고 일러왔다. 남의 이목을 꺼리는 젊은 남녀들이 사랑을 속삭였던 것이다.”(정비석의 1954년) 길 양편에 조성된 덕수궁과 미국·영국대사관의 돌담이 높고, 담 안의 나무들이 내뻗은 울창한 가지가 ‘자연의 터널’..
양봉음위에 얽힌 사연 “한가지 마음이면 백(100) 임금도 섬길 수 있지만, 100가지 마음이면 한(1) 임금도 섬길 수 없다”는 옛 말이 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한결같은 충심을 발휘하기 쉬운가. 그러니 구밀복검(口蜜腹劍)·표리부동(表裏不同)·소리장도(笑裏藏刀)·양봉음위(陽奉陰違)와 같은 ‘겉과 속이 다르다’는 뜻의 숱한 고사성어가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변함없는 충심을 발휘한다 해도 한번 삐끗하면 하루아침에 멸문의 화를 당하기도 한다. 오죽했으면 한비자가 “용(군주)을 잘 길들이면 그 등에 탈 수도 있지만, 역린(逆鱗·목줄기에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면 죽임을 당한다”( ‘노자한비열전’)고 했을까. 한비자는 춘추시대 위 영공의 총애를 받던 미자하의 예를 든다. 어느 날 미자하의 모친이 병이 나자 위자..
피카소는 표절작가였다?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종종 모방작가라는 소리를 듣는다. 디에고 벨라스케스(17세기)와 외젠 들라크루아·에두아르 마네(이상 19세기)의 작품들을 ‘모방한’ 연작시리즈를 냈으니 말이다. 모든 사물과 사람을 게걸스럽게 짐어삼켜 소화하는 작가라는 소리까지 나왔다. 물론 그는 “천재성은 나이가 들면서 사라지므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응수했다. 엊그제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사상 최고가(한화 1968억원)에 낙찰된 피카소의 ‘알제의 여인들(Les Femmes d’Alger)’이 그런 작품이다. 18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대표주자인 들라크루아(1789~1863)의 동명작품을 패러디했다. 피카소의 '알제의 여인들' 1832년 알제리를 방문한 들라크누아는 이슬람 여성들만의 공간인 ‘하렘’을 구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