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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내가 이성계를 등용했다" 고려의 숨이 아직 붙어있던 1383년, 정도전이 이성계를 찾아 동북면을 방문했답니다. 거기서 이성계의 군대를 보고는 이렇게 속삭였답니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요컨대 당신의 군대는 고려를 갈아엎고 혁성혁명을 일으킬만큼 매우 훌륭한 위용을 갖추고 있다고 운을 뗀 것입니다. 그러자 이성계는 “무슨 말이냐”고 딴청을 피웠답니다. 선문답을 주고받은 셈이죠. 이로써 조선 개국을 위한 두 사람의 의기가 투합되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정도전은 조선 개국 후 술자리에서 종종 이런 말을 했답니다. “한고조(유방)가 장자방(장량)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고조를 쓴 것일 뿐이야.” 이 무슨 말일까요. 조선을 개국하려고 내(정도전)가 이성계를 기용한 것 뿐이지 이성계가 나(정도전)를 ..
조선에 전깃불이 처음 켜진 날 전기를 처음 발견한 이는 기원전 600년 쯤 고대 그리스 시대 철학자인 탈레스였다고 한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호박을 장식품으로 애용하고 있았다. 호박은 나무에서 흘러나온 액이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진 보석인데 문지를수록 아름다운 광택을 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닦으면 닦을수록 작은 종잇자국이나 나뭇잎 부스러기 들이 호박에 달라붙는다는 것이었다. 탈레스는 “마치 자석이 쇳가루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마찰한 호박은 가벼운 먼지와 깃털을 끌어당기는 성질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이상한 돌(호박)은 그리스어로 eleckton이라 하는데 오늘 날 전기를 electricity하는 것은 바로 이 호박의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하지만 탈레스를 비롯한 그리스 사람들은 왜 이와같은 정전기가 발생하는지 알지 못했..
못말리는 동이족의 술사랑 “이건 술이야.” 1974년 초겨울.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핑산(平山). 전국시대(BC 475~BC 221) 중산국(中山國)의 왕릉터에서 흥미로운 유물1만90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졌다. 그 가운데 액체가 가득 찬 병들이 다수 보였다. 조심스레 분석하던 학자들은 깜짝 놀랐다. 곡주(穀酒) 성분이 분명했던 것이다. 결국 그것은 2300년 된 술이었다. 예로부터 중산국의 술은 전설로 남을 만큼 유명하다. 중산국에 적희(狄希)라는 술의 명인이 있었다. 그가 만든 ‘천일춘(千日春)’은 대륙을 풍미했다. 어느 날 유현석(劉玄石)이라는 자가 적희를 찾아왔다. “술맛 한번 보게 해주시면….” 적희가 “아직 숙성이 덜 됐다”고 말렸다. 하지만 유현석은 막무가내로 마셔버렸고, 술에 취해 죽고 말았다. 그로부터 3년이 ..
매맞는 남편 열전 이번 주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주제는 ‘매맞는 남편 열전’입니다. 고려 때 23살 어린 부인에게 지팡이로 맞고 그저 울기만 했던 임금이 있었답니다. 충렬왕입니다. 충렬왕은 왜 어린 부인에게 얻어터졌을까요. 왜구 섬멸의 주인공인 최운해 역시 독한 부인 때문에 식겁했답니다. 부인은 도망가는 남편을 쫓아가 칼로 내리치기까지 했다는군요. 조선 시대 어떤 부인은 “너는 추한 얼굴에 나이도 늙고 기력도 없는데 무엇을 믿고 결혼했냐. 빨리 죽어라”고 남편을 구박했답니다. 이 때문에 남편은 파직되고 부부는 강제이혼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뿐인가요. 어떤 아내는 장애인 남편을 구박하면서 “이 애꾸눈 놈아!”하고 외치는 등 못할 말을 내뱉었답니다. 태조 이성계의 사촌동생은 아내에게 급소를 잡혀 불귀의 객이 되고..
시진핑의 고사성어 외교 “과거를 잊지말고 앞날의 가르침으로 삼자.(前事不忘 后事之師)”( ‘조책’)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해 3월 독일 베를린 강연에서 일본의 난징 대학살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는 뜻의 고서성어를 인용했다. 지난해 9월 미-중 전략경제대회에서는 “자기가 원치 않은 일은 남에게 시켜서는 안된다(己所不欲 勿施於人)”는 ‘안연’을 떠올렸다.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지 말고 상대방을 인정하라고 미국 측에 주문한 것이다. 시진핑의 ‘고전 인용’은 정평이 나있다. 그 가운데 즐겨 인용하는 것이 와 송나라 시인 소동파의 시라고 한다. 지난해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 때는 ‘천리 멀리 한껏 바라보고자 다시 한 층을 오른다(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는 당나라 시인 왕지환의 ‘등관작루(登관雀樓)’를 인용했다. 지난해 ..
벼, 쌀, 밥…똑같은 타밀어와 한국어 드라비다인은 유럽 아리아족의 침입 때(기원전 15세기) 인도 남부로 쫓겨난 토착민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드라비다인의 언어(타밀어) 가운데 한국어와 유사한 단어가 400~1300개나 된다고 한다. 쌀은 sal, 벼는 biya, 밥은 bab, 풀(草)은 pul, 씨(種)는 pci, 알(粒)은 ari, 가래(농기구)는 kalai, 사래(밭고랑)는 salai, 모(茅)는 mol이라 한단다. 볍씨를 ‘아리씨’라 하는 것도 흥미롭다. 아빠와 엄마(암마), 언니(안니)의 경우도 거의 같은 발음이고, 궁디(엉덩이), 찌찌(남성 생식기) 등 신체기관의 명칭도 심상치 않단다. ‘현대 한국어=알타이어 계통’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워온 사람들이라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다. ‘위서 동이전’은 “중국 서북..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정혼녀를 아시나요 이번 주 팟 케스트 30회는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정혼녀를 아시나요’입니다. 최근 문화재청이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부부를 모신 영원(英園·경기 남양주 홍유릉 경내)을 공개했답니다. 영친왕이 1970년 세상을 떠났다니까 45년 만이겠지요. 사실 영친왕이나 부인인 이방자(일본명 마사코)나 정략결혼의 희생양이라는 점에서 한많은 삶을 살았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그나마 두 사람의 혼백 만큼은 함께 묻혀 있지 않습니까. 그 결혼 때문에 평생 수절하며 살았던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가 영친왕의 정혼녀 민갑완 규수입니다. 10살 때 딱 한 번 본 남편감 때문에 61년 간이나 독신으로 살아야 했던 여인. 황실과 가문을 위해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살았던 그녀의 삶을 이번 주 팟캐스트에서 들어보십시요. 블로..
덕수궁 돌담길 “영성문은 작년(1920년) 여름 헐렸다. 영성문터~정동까지 신작로가 뚫렸다.”(동아일보 1921년 7월25일) 덕수궁돌담길이 지금의 모습으로 조성됐음을 알리는 신문기사이다. 영성문(옛 경기여고 길가)은 원래 역대 국왕의 어진을 모셨던 선원전의 출입문이었다. 일제가 고종의 붕어 이후 경운궁(덕수궁의 옛이름)을 대폭 축소하는 과정에서 궁역의 중간을 잘라 길을 내고 담을 쌓은 것이다. 덕수궁돌담길은 조성 당시부터 ‘사랑의 길’로 유명세를 탔다. “그 옛날 덕수궁 담 뒤의 영성문 고개를 사랑의 언덕길이라고 일러왔다. 남의 이목을 꺼리는 젊은 남녀들이 사랑을 속삭였던 것이다.”(정비석의 1954년) 길 양편에 조성된 덕수궁과 미국·영국대사관의 돌담이 높고, 담 안의 나무들이 내뻗은 울창한 가지가 ‘자연의 터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