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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까지 신문 1면을 장식한 사건들-<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김성희 해설 | 서해문집 생명을 봉헌함은 지사의 본분이거늘~이렇게 학대를 가하는 일은 부당한 일이라~내 무리를 대신(大臣)으로 대우하라 하여~.”(대한매일신보 1909년 11월20일) “신천리(信川里)와 잠실리(蠶室里) 두 동리는 약 1000호에 약 4000명이 물 속에서 모두 절명상태에 있다는데~살려달라는 애호성(哀號聲)이 차마 들을 수 없이….”(1925년 7월18일 조선일보 호외) 실시간 정보홍수에 빠져있는 요즘이지만 새벽에 배달되는 신문에서만 오로지 시대를 읽고 역사를 읽었던 때가 있었다. 이 책은 바로 우리 백성이 미증유의 질곡에서 헤매던 바로 구한말~일제강점기~해방 때까지의 신문기사 141건을 통해 당대의 하루하루 역사를 읽어냈다. 기실 우리는 ‘한일합방’, ‘3·1운..
1979년 팔레비 이란 국왕 망명 ㆍ민중 혁명의 승리 1979년 1월16일 낮. 이란의 팔레비 국왕이 눈물 속에 망명길에 올랐다. 그의 망명 소식에 이란 국민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환호성을 질렀다. 2월1일 귀국한 종교지도자 호메이니는 “이란은 알라의 뜻과 지시만 따르는 이슬람 공화국이 돼야 한다”고 선언했다. 팔레비는 53년 미국 CIA가 주도한 쿠데타에 힘입어 권좌에 오른 뒤 미국의 후원 아래 야심찬 근대화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팔레비는 비밀경찰 등을 동원해 무자비한 철권통치를 자행했다. 또한 이슬람의 전통을 근대화의 걸림돌로 치부하면서 극심한 반발을 샀다. 더구나 그의 근대화는 다국적 기업과 절대왕권에 기생하는 세력을 길러놓았다. 신흥 부유층의 무절제와 극빈층의 신음 사이에서 축적된 모순은 결국 혁명으로 표출됐다. 78..
(27)‘조선의 부활’ 알린 청진동 ㆍ도심 한복판서 끄집어 낸 ‘시전’ ㆍ‘서울 600년’ 서민의 삶 켜켜이 2003년 12월 말. 문화운동가 황평우씨가 종로 청진동을 기웃거렸다. 건설사(르메이에르 건설)가 주상복합건물 사업시행을 위해 낡은 기존 건물들을 철거하고 있었다. 재개발 면적은 8665㎡.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3만㎡ 이상의 공사를 벌일 때 문화재지표조사를 거쳐야 한다. 그러니 이곳은 지표조사 없이 공사를 진행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폭삭 주저앉은 그대로 확인된 조선시대 시장인 시전(市厘)의 행랑(行廊). 조선정부는 시전을 개설하면서 방-마루-방-창고를 하나의 단위(40평 정도)로 끊어 일반분양한 것으로 보인다. 장사가 잘 되는 이는 바로 옆 가게를 사서 확장한 흔적도 엿볼 수 있다. 모습을 드러낸 조선의..
(26) 인천 계양산성 ㆍ1600년전 백제인의 논어책을 엿보다 2005년 5월11일.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인천 계양산성 내부의 집수정을 발굴하고 있었다. 계양산성은 풍납토성 발견(1997년)과 함께 이 교수가 눈여겨봤던 곳. 도로가 발달되지 않았던 시기엔 바다와 강(江)이 고속도로 역할을 했을 것이 아닌가. 이 교수는 한성백제시대(BC 18~AD 475년) 중국과의 교역 관문일 것 같은 한강 하구의 계양산성을 발굴하게 된 것이다. “체육시설이 있었던 이곳(집수정)은 골짜기였기 때문에 모든 물이 모이는 곳이었어요. 그러니 집수정이 있었던 게지. 겉으로 보기에 지름이 13m 정도 돼보였는데….” 조심스레 층위별로 흙과 돌을 걷어내며 바닥까지 발굴하고 있을 때. “눈앞에 나타난 한성백제시대 ‘논어’ ” 인천 계양산성에서 발굴된 집..
(23) 동래읍성 下 ㆍ조총 공세 속절없이 함락 왜병들 살육에 ‘아비규환’ “조선을 정벌할 것이니 단단히 준비하라.” 1592년 1월, 일본 전역을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 출병을 위한 총동원령을 내린다. 왜병의 총병력은 30만명이었다. 마침내 4월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총사령으로 한 선봉군 2만 여 명은 700척의 전함에 분승,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다. 강토를 피로 물들인 치욕의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이다. ① 즉시 길을 비키라는 왜군의 회유에 맞서 “싸워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假道難)”는 내용을 쓴 목패를 던지는 송상현 부사. ② 겁을 먹고 도망가는 경상좌병사 이각. ③ 왜병에 의해 성이 함락되는 모습. ④ 송상현 부사의 순절 직전 모습. 조복을 입고 임금을 향해 절을 올린 뒤..
(22) 동래읍성 上 ㆍ해자 바닥에 수북이 왜병 만행 ‘몸서리’ 1731년(영조 7년) 어느 날. 동래성 수축을 위해 공사를 벌이던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은 경악했다. 땅을 파다가 임진왜란 때 묻힌 것이 뻔한 백골들이 다수 노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포환(砲丸)과 화살촉들이 백골 사이에 띠를 이뤘다. 이에 숙연해진 정언섭은 백골들을 수습한 뒤 비문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제전(祭田)을 설치했다. 정언섭은 이에 그치지 않고 향교에 넘겨 해마다 유생들에게 그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여지집성·輿地集成’ 기록에서) 도랑에 묻힌 415년 전의 역사 2005년 발굴된 동래읍성 해자의 모습과 출토유물들. 1592년 4월15일 벌어진 동래성 전투의 참화를 보여준다. 그로부터 꼭 274년 뒤인 2005년 4월 어느 ..
(19) 부산 영도 동삼동패총 유적 下 ㆍ신석기문화 위용 드러낸 ‘동삼동 팔찌 수출단지’ 최고급 장신구 ‘투박조개 팔찌’ 유물 무더기로 출토 일본 흑요석 수입해 석기제작 왕성한 교역거점 추정 조개가면·토우 등도 발견… 한국 고고학계 산실로 대체 동삼동 패총(貝塚)이 무엇인데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가. 동삼동 팔찌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조개팔찌(패천). 한반도산 조개팔찌와 열도산 흑요석이 교역의 주대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흔히 ‘조개무지’라 하는 패총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오랜 기간 쌓여 만들어진 유적이다. 한마디로 ‘선사시대 음식물 쓰레기장’인 셈이다. 약 1만 년 전 신석기시대에 들어오면서 바닷가에 모여살던 사람들이 남긴 생생한 삶의 흔적이다. 원래 우리나라의 땅은 산성(酸性)이 많이 함유된 특징 때문에 동물이나 물고기뼈를 비롯한 ..
(18) 부산 영도 동삼동패총 유적 上 ㆍ불모의 한국 고고학, 선진발굴기법에 눈뜨다 “저기에 해동여인숙이 있었는데…. 횟집이 많았는데 지금은 다 어디갔노?” 10월15일 가을 한낮. 더위 먹은 가을인가. 햇살이 따가웠던 부산 영도 동삼동 패총전시관. 전시관 직원 최정혜씨의 개략적인 설명을 듣고는 조유전 관장(토지박물관)과 기자가 밖으로 나왔다. 조 관장이 스물여덟 ‘젊은 날의 초상’을 떠올리며 회상에 잠긴다. 1999년 부산박물관의 발굴현장 설명회 모습. 어느 고고학자의 회상 “1969년 군대를 다녀와 직장을 잡은 것이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이었지. 그런데 7개월 만인 8월 초년병 햇병아리 학예사인 나는 동삼동패총 발굴을 ‘명’받고 내려왔어요.” 조 관장의 추억담을 들으려는데, 급경사가 진 전시관 밖에 웬 젊은이들이 긴 줄을 선다. “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