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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임금'이라도 좋다-정도전의 재상론 “군주의 권한은 단 두가지 뿐이다. 하나는 재상(宰相)을 선택·임명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 한 사람의 재상과 정사를 논하는 것이다.”() 삼봉 정도전(1342~1398)의 ‘재상론’은 혁명적이다. 재상을 잘 뽑아서 그와 모든 국정을 논하는 게 바로 군주의 권한이라는 것이다. 정도전은 더 나아가 “군주는 국가적인 대사만 ‘협의’할 뿐 다른 정사는 모두 재상에게 맡겨야 한다”고까지 했다. 누가 봐도 군주를 ‘핫바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결국 정도전은 ‘왕권’을 외쳤던 이방원(태종)의 칼에 죽고 말았다. 당시 왕조시대였기에 받아들일 수 없었던, 너무도 혁명적이었던 주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정도전이 재상정치를 ‘꿈꿨던’ 이유를 곱씹어보면 무릎을 칠 수밖에 없다. “군주는 현명할 때도 있지만..
세종대왕은 성군이 아니었다 팟 캐스트 14회는 세종대왕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만고의 성군’이나 ‘해동의 요순’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감히 ‘세종은 성군이 아니었다’는 주제로 이야기할까 합니다. 물론 세종대왕의 업적은 필설로 다할 수 없습니다. 백성을 긍휼히 생각하는 세종의 마음씨 역시 실록에 나와있는 그대로입니다. 죄인들의 귀휴제도를 만들었고, 관노비들의 출산휴가를 늘렸으며, 심지어는 그 남편들에게도 출산휴가를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상상이나 하십니까. 세종시대에 관노비의 남편에게 30일 간의 출산·육아휴가를 주었다는 사실을…. 더욱이 형을 살고 있는 죄인들의 목욕관리까지 신경을 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세종대왕의 치세에 가려진 반전의 역사도 있습니다. 그 시대에 있었던 다양한 이야기들을 다른 것도 아닌, ‘실록’을 ..
'황희 스캔들'에 얽힌 내막 “사람들이 우러러 ‘어진 재상(賢宰相)’이라 했다. 관후하고 침중했으며, 집을 다스림에도 검소하고….”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해서 제가(齊家)에 단점이 있었다.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랐다. 정권(政權)을 오랫동안 잡고 있어서 자못 청렴하지 못하다(頗有보궤之초)는 비난을 받았다.” 둘 다 1452년(문종 2년) 2월 8일 에 등장하는 황희 정승의 졸기(卒記·부음기사)이다. 완전히 상반된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보통의 부음기사(obituary)를 보면 그 사람의 생애를 잔뜩 상찬해놓고는 말미에 ‘그러나’라는 토를 달아 아쉬운 행적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졸기와는 경우가 다르다. 황희 정승의 초상화. 황희는 어진 재상이라는 찬사와 함께 몇가지 흠결을 함께 지적당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황희는 태종..
당신은 폭군입니다…지록위마 다시 읽기 오리무중(五里霧中), 이합집산(離合集散), 우왕좌왕(右往左往)…. 교수신문이 2001~2003년까지 내놓은 사자성어를 보라. 이렇게 알아듣기 쉬웠다. 대통령 탄핵과 수도 이전 등의 대형 이슈가 터진 2004년의 ‘당동벌이(黨同伐異·같은 패끼리 모이고 다른 패를 공격한다)’는 그래도 촌철살인이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였다. 교수신문은 2006년부터 새해 벽두부터 그 해의 ‘희망의 사자성어’도 선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갈수록 선정된 사자성어가 어려워졌다. 전국을 순행중이던 진시황이 급서하자 중거부령과 부새령을 겸했던 환관 조고가 바삐 움직였다. 황제의 유서를 조작해서 진시황의 막내아들 호해를 후계자로 옹립한 뒤 국정을 농단햇다. 그는 특히 궁궐의 출입을 관리 통제하는 낭중령에 올라 황제와 신하들의 소통을 끊고..
조선판 4대강 공사의 허와 실 팟 캐스트 12회는 ‘고려·조선판 4대강 공사가 남긴 교훈’입니다. 고려·조선에 무슨 4대강 공사냐구요. 물론 4대강 공사를 벌인 것은 아니고, 4대강 공사의 과정을 쏙 빼닮은,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다른 국책사업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운하공사입니다. 고려·조선 때 국가재정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는 바로 세곡(세금으로 받은 곡식)을 서울(개경 혹은 한양)으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도로사정이 좋지 않던 육로로는 어려운 일이었기에 주로 해로, 즉 조운선을 이용해서 옮겼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고려·조선 때 안흥량으로 일컬어졌던 지역, 즉 지금의 충청도 태안 앞바다가 가장 큰 고비였습니다. 안흥량 해역은 물살이 험하기로 악명이 높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조운선들이 번번이 침몰하고 선원들이..
금지된 사랑, 궁녀와 내시의 '슬픈언약식' 사춘기 소년·소녀의 3대3 미팅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해서는 안되고, 절대 이뤄질 수도 없는 ‘금지된 사랑’이었다. 소년 소녀들은 꽃피는 춘사월의 풋사랑에 젖은 대가로 목이 잘릴 위기에 빠졌다. 죽음을 무릅 쓴 풋사랑의 잔인한 역사를 을 토대로 각색해보자. 때는 바야흐로 1453년(단종 1년) 4월 14일이었다. 말기의 제조상궁. 제조상궁은 궁녀조직의 최고권력자였다. 당상관 이상의 월급을 받았고, 심부름하는 하녀와 옷 짓는 침모까지 배정받았다. ■궁중 소년 소녀들의 3대 3미팅 방자(房子·심부름 궁녀)인 중비가 소천시(어린 별감) 부귀에게 연모의 정을 품었다. 중비나 부귀는 아마도 15~16세가 될 듯 말 듯한 소년·소녀들이었음이 틀림없다. 궁녀와 내시, 별감은 주지하다시피 액정서(왕과 왕족의 ..
'효수'에 얽힌 피맺힌 사연들 능지처참이나 참형의 극형을 받은 자의 수급(머리)을 매다는 것을 효수(梟首)라 한다. 장대에 꽂은 모습이 마치 올빼미(梟)의 머리(首) 같다 해서 이름 붙었다. “역적은 반드시 능지처참하고 그 머리는 3일간 저잣거리에 내걸며, 수족은 8도로 조리돌려야 한다.”() 1724년(영조 즉위년) 의금부의 상소를 보면 반역모반죄나 강상죄를 지은 자의 목을 내걸어 만백성의 본보기로 삼자고 촉구한다. ‘능지처참형(참형)→효수’의 극형을 받은 역사인물이 뜻밖에 많다. 1135년(고려 인종 13년) 서경(평양)에서 난을 일으켰던 묘청도 목이 잘린 뒤 저잣거리에 효수됐다. 깁신정변 실패후 망명 중 피살된 김옥균의 목은 양화진에서 효수됐다. 1453년(단종 1년) 계유정난 때 참살된 김종서·황보인 등의 목도 모두 저자에 내..
가슴 먹먹한 '꼬부랑 할머니'의 추억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갯길을/ 꼬부랑 꼬부랑/ 넘어가고 있네./ ~꼬부랑 꼬부랑 꼬부랑 꼬부랑….” 지난 6일 향년 87세로 별세한 작곡가 한태근씨(사진)의 유명한 ‘꼬부랑 할머니’ 동요이다. 작곡가는 생전의 언론 인터뷰에서 동요 ‘꼬부랑 할머니’를 짓게 된 비화를 이야기해주었다. “제가 칭얼댈 때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를 해주셨던 어머니가 어느새 꼬부랑 할머니가 되셨더라고요. 그래서….” 사실 ‘꼬부랑 할머니’를 주제로 한 설화는 지방마다 다양하게 전해진다. 동요의 모티브는 ‘꼬부랑 할머니가 길을 가다가 일어난 재미있는 사건’이다. 각 지방의 설화에는 공통점이 있다. ‘꼬부랑’이라는 어휘를 첫말에 이어가며 재미있는 사건들을 계속 보태고 있는 것이다. “꼬부랑 할머니가~꼬부랑 똥을 누다가~꼬부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