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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드레스덴 융단폭격 ㆍ전쟁의 ‘악마성’ “소돔과 고모라의 하늘에는 유황비가 쏟아졌다. 롯의 아내는 집에 두고 온 재산이 아까워 천사의 당부를 잊고 소돔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롯의 아내는 그 자리에 선 채 소금기둥이 되어버렸다. 소돔과 고모라성의 연기가 용광로처럼 치솟았다.”(구약성서 창세기) 음란함과 죄악으로 가득찬 소돔과 고모라성은 이렇게 하나님의 유황불 세례에 멸망했다. 1945년 2월13일 밤. 소돔과 고모라성이 아닌, 바로크 문화의 본산인 독일 드레스덴이 불바다로 변했다. 응징자는 하나님이 아니었다. “적국의 민간인도 적이니, 그런 적을 위해 눈물 흘릴 필요 없다”며 공습을 지시한 아서 T 해리스 영국 공군 총사령관이었다. 800대의 폭격기가 2차에 걸쳐 65만명이 살고 있는 아름다운 중세도시에 쏟아부은 폭탄은 ..
1980년 美 모스크바 올림픽 불참 선언 ㆍ이념에 얼룩진 ‘올림픽 정신’ 1979년 12월27일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전격 침공했다. 78년 수립된 공산정권이 이슬람 세력의 무장봉기에 따라 궁지에 몰리자 소련의 개입을 요청한 것이다. 그러자 미국은 80년 2월20일까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올림픽에 불참할 것이라고 최후통첩을 내렸다. 하지만 요지부동. 최후 시한인 80년 2월20일이 되자 카터 미국 대통령은 모스크바 올림픽 불참을 공식 선언했다. 베트남에서, 이란에서 곤욕을 치른 미국으로서는 가장 손쉽고도, 파급 효과가 큰 올림픽 보이코트 운동을 무기로 내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우방국들이 보이코트 운동에 동참하리라는 카터 행정부의 정책은 실패작으로 끝났다. 영국 정부는 미국의 보이코트 운동에 적극 동조하려 했다. 그러나 영국..
1971년 인류 최초의 월상 골프 ㆍ비거리 짧았지만 ‘굿샷’ 2006년 11월23일. 러시아 우주비행사 미하일 튜린은 북서태평양 220마일 상공 국제우주정거장에서 6번 아이언으로 티샷을 날렸다. 그는 우주복 냉각장치 때문에 예정된 티오프 시간에 무려 77분이나 늦었다. 또 우주선 밖 사다리에 발을 걸친 채 한 손으로 샷을 날렸으니 ‘생크’가 날 수밖에…. 여하튼 튜린은 역사상 최장타 기록의 주인공이 되었다. 미 항공우주국(NASA)이 무중력 상태를 훨훨 난 공은 대기권에 진입해 타 버릴 때까지 지구를 48바퀴(약 200만㎞)를 돈다고 전망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러시아 측은 2년간 16억㎞를 날 것이라고 분석했다. 물론 튜린이 첫번째 우주골퍼는 아니다. 1971년 2월6일 사상 두번째로 달표면에 착륙한 아폴로 14호 선장인 앨런 셰퍼드가 ..
1968년 월맹의 구정 대공세 ㆍ전투 졌지만 심리전선 ‘대승’ 1968년 1월말 베트남은 모처럼 구정(舊正·Tet)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월맹(북베트남)측이 구정을 맞아 1주일간의 휴전을 선포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월맹군의 기만전술이었다. 1월31일 미명(未明)을 기해 월맹의 대공세가 불을 뿜었다. 월남(베트남) 전역의 14개 성(군) 주요 도시에 대해 대대적인 공세를 펼친 것이다. 물론 이 구정대공세는 월맹의 완패로 끝났다. 월맹은 참전병력의 절반에 가까운 3만5000여명이 사살됐고 5800여명이 생포됐다. 반면 미군의 손실은 전사자 534명, 부상자 2547명에 불과했다. 이 전투를 기획한 것은 물론 월맹의 지도자인 호찌민과 국방장관 보응 우엔 지압이었다. 1967년에 이르러 월남은 군사력이 미군과 월남군, 한국군, ..
1968년 푸에블로호 납치 ㆍ미국의 치욕 코흘리개 시절, 청운동 바로 눈 앞에서 1·21사태를 바라보면서도 빅 머로 주연의 유명한 TV드라마 를 떠올렸으니 뭘 알았겠냐만 1968년 1월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전쟁 분위기에 휩싸였다. 1·21 사태 이후 이틀도 지나지 않은 23일 낮. 원산 앞바다에서 정찰활동 중이던 미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초계정에 의해 납치된다. 미 공군의 요청을 받은 한국 공군기 3대가 즉각 출격했지만, 푸에블로호는 북한의 방공망에 진입한 뒤였다. 미국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를 원산만 근처로 급파하고 핵폭탄 사용까지 불사한다는 복안을 세웠지만, 미국의 대응은 거기까지였다. 베트남전에서도 고전 중이었는데 한반도까지 확전된다면 미국으로서는 너무 큰 부담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11개월간의 협상 끝에 영해 침범..
해방전까지 신문 1면을 장식한 사건들-<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김성희 해설 | 서해문집 생명을 봉헌함은 지사의 본분이거늘~이렇게 학대를 가하는 일은 부당한 일이라~내 무리를 대신(大臣)으로 대우하라 하여~.”(대한매일신보 1909년 11월20일) “신천리(信川里)와 잠실리(蠶室里) 두 동리는 약 1000호에 약 4000명이 물 속에서 모두 절명상태에 있다는데~살려달라는 애호성(哀號聲)이 차마 들을 수 없이….”(1925년 7월18일 조선일보 호외) 실시간 정보홍수에 빠져있는 요즘이지만 새벽에 배달되는 신문에서만 오로지 시대를 읽고 역사를 읽었던 때가 있었다. 이 책은 바로 우리 백성이 미증유의 질곡에서 헤매던 바로 구한말~일제강점기~해방 때까지의 신문기사 141건을 통해 당대의 하루하루 역사를 읽어냈다. 기실 우리는 ‘한일합방’, ‘3·1운..
1979년 팔레비 이란 국왕 망명 ㆍ민중 혁명의 승리 1979년 1월16일 낮. 이란의 팔레비 국왕이 눈물 속에 망명길에 올랐다. 그의 망명 소식에 이란 국민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환호성을 질렀다. 2월1일 귀국한 종교지도자 호메이니는 “이란은 알라의 뜻과 지시만 따르는 이슬람 공화국이 돼야 한다”고 선언했다. 팔레비는 53년 미국 CIA가 주도한 쿠데타에 힘입어 권좌에 오른 뒤 미국의 후원 아래 야심찬 근대화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팔레비는 비밀경찰 등을 동원해 무자비한 철권통치를 자행했다. 또한 이슬람의 전통을 근대화의 걸림돌로 치부하면서 극심한 반발을 샀다. 더구나 그의 근대화는 다국적 기업과 절대왕권에 기생하는 세력을 길러놓았다. 신흥 부유층의 무절제와 극빈층의 신음 사이에서 축적된 모순은 결국 혁명으로 표출됐다. 78..
(27)‘조선의 부활’ 알린 청진동 ㆍ도심 한복판서 끄집어 낸 ‘시전’ ㆍ‘서울 600년’ 서민의 삶 켜켜이 2003년 12월 말. 문화운동가 황평우씨가 종로 청진동을 기웃거렸다. 건설사(르메이에르 건설)가 주상복합건물 사업시행을 위해 낡은 기존 건물들을 철거하고 있었다. 재개발 면적은 8665㎡.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3만㎡ 이상의 공사를 벌일 때 문화재지표조사를 거쳐야 한다. 그러니 이곳은 지표조사 없이 공사를 진행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폭삭 주저앉은 그대로 확인된 조선시대 시장인 시전(市厘)의 행랑(行廊). 조선정부는 시전을 개설하면서 방-마루-방-창고를 하나의 단위(40평 정도)로 끊어 일반분양한 것으로 보인다. 장사가 잘 되는 이는 바로 옆 가게를 사서 확장한 흔적도 엿볼 수 있다. 모습을 드러낸 조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