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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족, 그 슬픈 전설 새삼스러운 궁금증 하나. 복숭아 나무는 못된 귀신을 쫓아내고 요사스런 기운을 없애주는 상서로운 나무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 조상들은 절대 이 복숭아를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일까. 여기에는 동이족의 ‘슬픈 전설’이 숨겨져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이가 전설 속 ‘동이족의 명궁’인 ‘예’라는 인물이다. 때는 바야흐로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요 임금 시절이었다. 그 당시엔 태양이 10개나 있었다. 동방의 천제 제준과 태양의 여신 희화 사이에 난 자식들이었다. 10개의 태양은 세 발 달린 신성한 까마귀, 즉 삼족오였다. 이들은 어머니 희화가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 하루에 하나씩 교대로 떠올랐다. 그 일을 수만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괴한 일이 일어났다. 부여의 제기. 동이족은 하늘신, 동이의..
"조선인은 일본의 스파이다"? “자본주의 적들에게 포위돼있는 소련에는 외국의 스파이들로 가득차 있다.” 1937년 3월3일 스탈린이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심상찮은 연설을 했다. 그러자 공산당 기관지 는 기다렸다는 듯 무시무시한 기사들을 쏟아낸다. ‘일본의 간첩망’(3월16일), ‘소비에트 원동에서 스파이 행위’(4월23일)’ 등등…. 일본이 밀파한 조선 스파이들이 소련 내의 군대집결 및 이동 등 각종 정보들을 수집해서 빼돌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소련은 왜 일본을 경계한다면서 조선인들을 스파이로 지목했을까. 그것이 바로 망국의 설움이었다. 러시아 연해주 체르냐치노 마을유적 옆을 흐르는 라즈돌라야강(솔빈강). 이 마을에는 옥저-발해-고려인들이 시차를 두고 터전을 잡고 살았음을 알려주는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고개를 든 황화론 ..
조선의 어느 재야사학자 '분투기'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무즙파 vs 창칼파, '엿먹인 '중학입시 ※다음은 엿을 만드는 순서를 차례로 적어 놓은 것이다. 1.찹쌀 1kg 가량을 물에 담갔다가 2.이것을 쪄서 밥을 만든다. 3.이 밥을 물 3ℓ와 엿기름 160g을 넣고 잘 섞은 다음에 60도의 온도로 5~6시간 둔다. 4.이것을 엉성한 삼베 주머니로 짠다. 5.짜 낸 국물을 조린다. (문제 18) 위 3에서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은 무엇인가? ①디아스타제 ②무우즙 3)4)…. 1964년 12월7일 치른 서울시내 전기 중학교 입시 자연 18번 문제. 엿을 만들 때 엿기름대신 넣어도 되는 것을 묻고 있다. 정답은 디아스타제였지만 무즙도 맞는 것으로 처리돼 이른바 무즙파동이 일었다.|경향신문 자료 ■무즙이냐 디아스타제냐 1964년 12월7일 치른 서울시 전기중학 공동출제 입시문제 가운데 ‘자연 18번’..
북한산성에 금괴가 묻혀있다? “전설에는 행궁터에 70만원의 정제금괴가 묻혀있다고는 하나 믿을만한 것은 못되지만, 연전에 이 부근 땅속에 막대한 암염과 목탄 수만관을 발굴했다는 것은 사실이니….” 1939년 10월28일 동아일보(‘북한산 일순(一巡)-하이킹 코스’)는 매우 흥미로운 기사를 냈다. “잡초 황량하고, 충성(蟲聲·벌레소리) 무성한 행궁터에서 묻혀있다는 ‘금괴매장’의 소문을 전한 것이다. 그런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에는 “북한산성 내에 은 1만2250냥(460㎏)과 소금 50석, 숯 2120석을 창고에 보관했거나 땅 속에 묻어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금괴는 아니지만, 당시 무역의 주요 결제수단인 은을 다량 보관했던 것이다. 더구나 1년 전에 행궁터에 엄청난 양의 암염과 목탄이 발굴된 것은 사실이라지 않는가. 은매장..
숙종, 영조, 정조가 북한산성에 오른 까닭 18세기 . 한양도성과 함께 북한산성까지 그려놓았다. 숙종은 1711년 성곽을 완성시킨 뒤 연잉군(영조)의 손을 잡고 북한산성에 올랐다. 원래는 도성 북쪽의 직선로를 따라 올라야 했지만, 길이 험해 서북쪽 길로 올라갔다. 내려올 때도 대동문을 통해 수유리쪽으로 길을 잡았다, 백성들의 하소연을 들어주기 위한 행차였다. |경기문화재단 제공 “(북한산성) 대서문 입구에서 뒤돌아보니~시름 절로 풀리네. 도성의 지척에 금성탕지 있으니 내 어찌 서울을 지키는 백성을 버릴 수 있으리.”(숙종의 북한산성 행차 기념시) 1712년4월10일(음력) 아침, 임금(숙종)이 막 수축을 끝낸 북한산성 행차에 나섰다. 북과 피리소리가 울려퍼진 가운데, 기병 수천명의 호위를 받은 왁자지껄한 ‘행행(行幸)’이었다. 연잉군(당시 19살..
국민과 인민, 그리고 황국신민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1960년~70년대 ‘국민’(초등)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이 지금도 줄줄 외울 수 있는 것이 ‘국민교육헌장’의 전문이다.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도덕시간이나, 애국조회 때마다 암송을 해야 그 날 수업이 무사히 넘어갔다. 58년생인 김한종 교수(교원대)의 회고담에서 당대 국민학생들의 당혹감이 절절이 배어나온다. 1970년대 교과서에 실린 국민교육헌장 전문. 당시 국민학생들은 '국민교육헌장의 글자수가 몇자인가'라는 시험까지 봐가야 달달 외워야 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도덕시험은 대체로 좋은 말이 포함된 답안만 고르면 맞는 경우가 많아 가장 쉬었다. 그런데 첫번째 문제를 보는 순간 경악했다. ‘1.국민교육헌장은 몇 자인가.’ ~입으로 웅얼거리며 손가락..
패전의 병자호란, 그러나 '대첩'도 있었다. “우리 임금님, 우리 임금님,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吾君 吾君 捨我而去乎)” 1637년 1월30일은 우리 역사상 가장 기억하기 싫은 날 중의 하나이다. 병자호란 패배로 인조 임금이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치욕스런 날이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에서 나온 인조는 청나라 태종 앞에서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 즉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행해야 했다. 말이 ‘조아린다’는 것이지 실은 머리를 찧어 피가 날 정도로 용서를 비는 절차였다. 이마저도 청나라가 봐준 것이었다. 원래 청나라는 인조의 두 손을 묶고 구슬을 입에 문채 빈 관을 싣고 나가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이 굴욕적인 ‘항복의 예’는 진나라 3세황제인 자영이 한나라 유방에게 항복하면서 노끈을 목에 걸고 백마가 끄는 흰 수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