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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의백’ 김원봉은 뼛속까지 민족주의자였다 “내가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 지 몰라.” 약산 김원봉(1898~1958)과 친일경찰 노덕술(1899~1968)의 악연은 전설처럼 전해진다. 물론 1차사료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의열단 동지인 유석현(1900~1987)과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정정화 선생(1900~1991)의 회고담, 독립운동가 송남헌(1914~2001) 등의 , 그리고 이런 자료들을 재구성한 과 각종 논문 등을 종합해보자. 의열단 의백 김원봉 선생. 의열단을 이끈 이를 단장이 아니라 의백이라 했다. 의형제의 맏형이라는 뜻 이다. 남이지만 피를 나눈 형제처럼 유혈투쟁을 벌이겠다는 의미였다.■노덕술에게 화장실에서 잡혀가 모욕당한 의열단의 맏형 1947년 3월 하순 서울 청계천 은신처에서 변소에 앉아있던 약산 김원봉(1898~1958) 선생이..
1830톤, 1627개, 81%…숫자로 본 미륵사지석탑 복원 반파된 상태로 6층 일부까지만 남아있던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의 해체·보수 작업이 마무리되어 30일 오후 2시 준공식이 열린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날 전북도 및 익산시 등과 공동으로 미륵사지 석탑의 보수정비 마무리를 기념하고 그 성과와 의미를 알리는 준공식을 연다고 밝혔다.그동안 진행되었던 미륵사지 석탑(서탑)의 해체·보수 사업을 숫자로 풀어본다.수리 전(왼쪽)과 후의 미륵사지 석탑 사진. 1999년 해체·복원결정 후 만 20년만에 복원됐다.|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639, 1380지난 2009년 1월14일 탑의 심주석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사리공을 확인했다. 사리공에는 금동제사리호와 함께 탑을 세우게 된 이력을 새긴 금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긴 글씨의 내용은 깜짝 놀랄만 했다...
성류굴 500원 동전같은 한줄기 빛에서 찾아낸 신라인의 낙서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자신의 자취를 남기고 싶어하는 본능은 어찌 할 수 없는 모양이다. 고생대인 2억5000만년전에 생성되어 온갖 기기묘묘한 종유석과 석순, 석주, 베이컨시트와 동굴진주. 석화, 동굴산호, 동굴방패 등을 자랑함으로써 ‘지하 금강’이라는 별명을 얻은 경북 울진 성류굴(천연기념물 제155호)에도 ‘다 다녀가오!’하는 낙서가 한 둘이 아니다. 역사·고고학적인 가치를 지닌 낙서, 즉 옥석을 가리기도 힘들 정도다. 그래도 이곳에서는 신라와 조선시대 명문을 확인한 바 있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 전시관의 심현용 학예연구사가 조선시대 명문을 발견해서 보고한 바 있고, 2015년에는 박홍국 위덕대 박물관장이 굴 입구 바로 위쪽 석회암 바위면에서 신라 진흥왕 4년(서기 543년) 3월8일 신라 축부 대나마..
"사천왕사 출토 명문편 5개는 신문왕릉비가 틀림없다" “신문왕릉비가 틀림없다.” 지난 1976년 경북 경주 낭산 일원(사적 제163호) 남단의 해발 53m 낮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사천왕사터의 당간지주 동쪽에서 ‘차임진’(次壬辰) 명문 비석편이 나왔다. 또 2012년 12월 역시 사천왕사터 서귀부 부근에서 ‘무궁기덕십야’(無窮其德十也) 비석 2편이 나왔다. 이밖에 사천왕사터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 비석편 중 ‘명왈’(銘曰) 명 1편(동국대 경주캠퍼스 박물관 소장)과 ‘장’()명 1편(국립경주박물관) 등이 있다. 그런데 사천왕사지 ‘次壬辰’명편. 신문왕이 서거한 임진년(692년)을 가리키는 명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정현숙 원광대 서예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논문에서 이들 5편의 비석이 신라 신문왕(재위 681~692)의 능비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서예사 연..
'반파'는 광개토대왕비 신묘년 기사의 숨은 주인공이다 “광개토대왕비 신묘년 기사의 숨은 주인공은 ‘반파’이다.”최연식 동국대 교수는 최근 한국목간학회가 주최하는 정기발표회에서 ‘영락 6년 고구려의 백제침공 배경과 역사적 의미’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최 교수는 논문에서 한국과 일본 학계가 해석을 두고 대립한 고구려 광개토왕비 기록 ‘이왜이신묘년래도□파백잔□□신라이위신민’(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의 의미에 대한 독특한 접근법을 제시한다. 이 문구는 지금까지도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 □□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됐다. 일본 학계는 이 대목을 두고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활용했다.광개토대왕 비문에서 치열한 논쟁을 불렀던 신묘년(391년) 기록. ‘이왜이신묘년래도□파백잔□□신라이위신민’(而倭以..
일제 고등계 형사를 고문죄로 옥중고소한 '안동 모스크바' 권오설 선생의 분투기 “너희는 개 돼지보다 못하다. 산도 안되고 형무소도 안된다면 시신을 등에 지고 종로거리를 다닐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89년전인 1930년 4월 16일(음력 3월 1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이던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1897~1930)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동생 권오기가 달려갔다. 그러나 형 권오설의 숨이 끊어질 즈음이었다. “형님! 형님!”하고 애타게 부르자 형 권오설은 겨우 눈을 떠서 동생의 목을 감싸고 볼을 비비면서 “오늘은 나랑 같이 자자”고 했다. 동생 오기는 눈물을 삼키며 형무소 문을 나섰다. 다음날인 17일, 동생이 다시 형무소를 찾았을 때 형 권오설은 이미 운명한 뒤였다. 동생은 형무소측에 “살아서 내보내지 않는게 법이라면, 죽어서는 내보내야 하는게 아니냐”고 항의하면서 “시신..
고종을 매섭게 꾸짖은 70대 의병대장, "대체 전하는 무슨 마음을 먹고 …' “폐하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무슨 사람이기에 이따위 짓을 합니까.(陛下何爲而爲此)” 1910년 8월29일 한일병합이 공포되자 황제를 매섭게 꾸짖는 상소문을 올린 이가 있었다. ‘절대 한일합방을 하면 안된다’(請勿合邦)는 상소였다. 상소문의 주인공은 구한말의 의병장인 척암 김도화 선생(1825~1912년)이다. 700자로 구성된 이 상소문은 고종과 고종의 뒤를 이른 순종에게 망국의 책임을 돌리며 욕설에 가까운 비판의 칼날을 휘두른다.“500년 역사의 왕위와 3000리 강토는 선대의 왕으로부터 이어받았습니다. 국가의 통치대권은 폐하의 사유물이 아니며 한 치의 땅도, 한 사람의 백성도 폐하의 사유물이 아닙니다.”척암은 “그런데 임금인 당신은 나라를 주고받는 일을 어찌 농사 짓는 자가 토지에서 난 곡식을 ..
1000년 고도 경주 월성의 연못터에서는 무엇이 쏟아져나왔나 “기원후 101년(파사왕 22년)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이라 했다. 둘레가 1023보였다.” “487년(소지마립간 9년) 월성(月城)을 수리했다.” 에 등장하는 월성의 축성과 수리 기사입니다. 지금은 조선시대에 쌓은 석빙고만 남아있지만 경주 월성은 101년 축성이후 신라멸망(935년)까지 843년 동안 천년왕국 신라의 왕성이었습니다. 왜 달 월(月)자를 써서 월성이라 했을까요. 월성은 경주 시내 남쪽 남천(문천) 가에 위치한 토성입니다. 울산 방면에서 흘러온 남천이 북류하다가 월성의 구릉에 부딪쳐 서쪽으로 꺾여 흐르는데 그것을 감씨듯이 초승달 모양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월성이라 했던게죠. 바깥 둘레는 2340m 정도입니다. ■1000년 신라왕국의 왕성그런데 신라가 멸망한 이후 500년 가까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