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312) 썸네일형 리스트형 겸재 정선 답지 않은 졸작, 왜 그렸을까 “겸재는…조선중화사상이 팽배하던 시기에 태어나 조선성리학을 전공한 사대부로…조선고유색을 현양한 진경문화를 주도한…진경산수화법의 창시자요 대성자였다.” 겸재 정선(1676~1759)의 연구자인 최완수는 “민족적 자부심과 자존심을 잃지 않게 한 겸재야말로 마땅히 화성(畵聖)으로 추앙해야 할 인물”로 꼽았다. 왜 이런 평을 내렸을까. 정선이 활약하던 시기, 조선은 한낱 오랑캐로 치부하던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고 있었다. 정통 주자학을 신봉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명나라의 멸망과 함께 사라진 중국 문명의 전통이 조선에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여겼다. 이것이 조선중화주의라는 것이다. 겸재야말로 중국풍을 답습하던 전대 화가들의 관념산수에서 벗어나 금강산과 한양 등 조선의 강산을 직접 답사한 뒤 사실적으로 표현함으.. 파문 일으킨 일본장관 다나카의 경천사탑 약탈사건 “일본의 특사 다나카 자작(궁내대신)의 흉계로…무기를 가진 일본인들이 경천사탑을 급습해서 탑을 해체하여 실어갔다고 한다.…” 1907년 3월7일 가 해괴망측한 단독보도를 씁니다. 1907년 1월 대한제국을 방문했던 일본의 궁내대신(장관) 다나카 미쓰야키(田中光顯·1843~1939)가 경천사 10층석탑을 무단으로 해체해서 일본으로 반출했다는 충격적인 기사였습니다. 이 대리석 탑은 높이만 13m에 이르는 섬세한 부조의 걸작 석조유물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탑을 송두리째 해체한 뒤 무단반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는 이날의 1보를 시작으로 6월까지 3개월 동안 끈질기게 이 야만적인 약탈행위를 연속 보도했습니다. 이 약탈사건은 지각있는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손가락질 받았고, 결국 국제적인 이슈로 부각됩니다. 한일병합 .. 인조, 죄가 없다면 광해군에게 돌을 던져라 인조반정 세력이 광해군을 쫓아낸 명분은 크게 3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폐모살제였습니다.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하고 10년간이나 유폐시킨 죄와 8살짜리 이복동생(영창대군)을 죽인 죄 등을 물었습니다. 또하나는 임진왜란으로 불탄 궁궐을 중수하면서 백성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는 죄였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배반하고 오랑캐(후금)와 화친한 죄였습니다. 세가지 죄상 중 첫번째, 즉 폐모살제는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큰 죄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두번째 궁궐의 중수도 보기에 따라서는 잘못된 내정으로 지탄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의 업적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임진왜란 때 분조(分朝)의 책임자로서 전국을 돌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왜군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를 모집했습니다. 또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무릅쓰.. 조선판 쇼생크탈출…광해군 일가의 비극 “폐위된 광해군이 이틀 동안이나 대궐안에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속히 대궐 밖으로 끌어내 안치하라.” 인조반정이 일어난지 이틀 뒤인 1623년 3월 14일 인목대비가 앙앙불락했다. 철천지 원수인 광해군이 대궐에 있는 꼴을 도저히 볼 수 없다고 새 임금(인조)과 반정공신들을 다그친 것이다. 심지어 인목대비는 “내가 두 번 절하고 청한다”고까지 했다. “역괴 혼(琿·광해군의 이름)이 아직도 대궐에 있다. 하늘과 땅 사이에 한 시각도 용납 못할 대역죄인을 어찌 편히 앉혀놓고 있느냐. 경들은 종묘사직을 위해서라도 빨리 안치시키도록 하라. 그런 후에야 (서궁에 유폐된) 내가 대궐로 옮겨갈 것이다. 절대 소홀하게 처리하지 말라. 내 경들에게 두 번 절하며 청하노라.”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있는 광해군과 .. '오프더레코드'까지 보도한 조선의 신문 지난 주에 1577년 8~11월 사이 발행된 선조시대 민간인쇄신문인 조보에 대해 알아봤다. 이 당시의 조보는 딱 100여일간 민간업자가 인쇄·발행·유료배포했다고 해서 유독 관심을 끌만 하다. 그러나 전통적인 의미의 조보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물론 선조시대의 100여일처럼 활자로 대량 인쇄되지 않고 필사의 형태로 배포되었다. ■“조보는 전쟁중에도 발행됐습니다” 조보가 문헌(조선왕조실록)에 정식으로 등장한 것은 조선조 중종 때였다. 즉 영사 성희안이 중종 임금에게 고한 내용 중에 있다. “1508년(중종 3년) 신(성희안)이 지난번에 북경을 떠나 요동에 도착했을 때의 조보(朝報)를 보니 논박을 받아 산관(散官·면직) 된 사람이 많았습니다.” 탄핵을 받아 경질된 신료들의 기사를, 그것도 요동땅에서 보았다는.. 1577년 선조는 왜 신문폐간을 명했을까 1577년 11월28일 선조가 분기탱천합니다. “어떤 자가 내 허락 없이 조보(조선시대 관보)를 발행했는가. 인쇄·배포한 자와 그것을 허가해준 자 모두를 색출하라”는 명이었습니다. 서슬 퍼런 선조의 명에 따라 30여 명의 조보인쇄발행업자가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유배형을 받았습니다. 그해 8월부터 약 100일간 민간인이 인쇄·발행·배포한 조보는 약 100일 만에 폐간되고 말았습니다. 조선시대 조보는 단순히 행정소식만 전하지 않았습니다. 임금과 대신들의 잘못을 따지는 상소문과 전국 각지에서 백성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 올리는 보고문, 그리고 임금 스스로의 책임론까지 고백하는 글까지 그대로 실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격인 승정원의 주서(7급 공무원)이 골라 편집한 것을 여과 없이 게재한 .. 한마디 농담으로 세워진 나라가 있다 중구삭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말은 쇠(金)를 녹인다는 사자성어입니다. 유언비어의 무서움을 알려주는 말이고, 여론의 무서움을 시사하는 성어입니다. 어쨌든 말(言)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는 "말(舌)은 네 마리의 말(馬)이 끈 마차(駟)보다 빠르다"(駟不及舌)는 성어가 있을 정도입니다. 천하의 성인인 공자님도 제자앞에서 농담 한마디 잘못했다가 곤욕을 치렀습니다. 정색하고 따지는 제자앞에서 "농담이야! 농담!"하며 쩔쩔 맸습니다. 연산군은 술자리에서 한 승진약속을 지켰습니다. 중국 주나라 성왕과 코흘리개 동생(우)의 일화를 전하면서 "군주는 언제 어느 순간이라도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연산군이 인용한 주나라 성왕의 농담은 그 후유증이 엄청났습니다. 13살 짜리 어린 천자는 동생하고 소꿉.. 청동기 '노출남', 왜 알몸으로 밭을 갈고 있을까 1970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아주 싼값에 구입한 청동유물의 녹을 닦았더니 흥미로운 문양이 나타났습니다. 한면에는 나뭇가지에 새가 앉아있었고, 다른 면에는 사람 3명이 각기 다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새와 나뭇가지는 ‘솟대’를 연상시켰습니다. 문제는 다른 면에 새겨진 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도 두 사람은 해석가능했습니다. 토기항아리에 곡식을 저장하는 이는 여인 같아보였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괭이를 들고 땅을 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남자가 이상했습니다. 남성기를 자랑스레 노출한채 따비(쟁기)를 움직이면서 천연덕스럽게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이 남성은 왜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채 이렇게 ‘알몸 밭갈이’ 퍼포먼스를 하고 있었을까요. 지금 같으면 영락없는 노출증 환자로 지탄받았을 것입니다. 그런.. 이전 1 ··· 22 23 24 25 26 27 28 ··· 3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