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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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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세종도 '종북파'다 “하늘이 하늘이 된 까닭을 아는 사람은 왕업을 이룰 수 있지만 하늘이 하늘이 된 까닭을 모르는 사람은 왕업을 이룰 수 없습니다.(知天之天者 王事可成 不知天之天者 王事不可成)” 기원전 204년. 한나라 고조 유방의 유세객이었던 역이기가 주군인 유방을 설득한다. 초나라 항우의 기세가 대단했을 때였다. 역이기는 항우의 총공격을 받고 고전하던 유방이 진나라 시절부터 엄청난 식량창고가 있던 오창(敖倉·지금의 허난성 룽양현 동북쪽)을 포기하려 하자 긴급 상소문을 올린 것이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덧붙인다. “옛말에 ‘천하에 왕노릇 하는 사람은 백성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백성은 양식을 하늘처럼 떠받는다(王者以民人爲天 而民人以食爲天)’고 했습니다.” 선조임금은 스스로 ‘이민위천’을 실천하지 않아 전쟁까지 불렀다고 한탄했..
금관총은 '소지왕릉'이다? ‘저 아이들, 무슨 일이지?’ 1921년 9월24일 아침 9시, 경주 노서리 마을을 순시 중이던 미야케 요산(三宅與三) 순사(경주경찰서)의 눈에 심상찮은 장면이 포착됐다. 매립된 흙 속에서 3~4명의 아이들이 뭔가 열심히 찾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보니 아이들 모두 청색 유리옥을 들고 있었다. ‘청색구슬? 혹시 고분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신라가 천년고도임을 알고있던 미야케의 머리가 순식간에 돌아갔다. “얘들아. 이 흙은 어느 집에서 파서 옮겨온 거야?” “저기 저 술집이요.” 아들이 가리킨 곳은 봉황대 바로 아래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박문환의 집이었다. 미야케가 주막집 증축을 위한 터파기 작업을 벌이던 박문환의 집 뒷마당으로 출동했다. 금관총 발굴 당시의 모습을 그린 그림. 박문환의 술집을 확장하는 공사..
'블랙코미디' 휴전회담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고려하는 토의는 끝났다. 앞으로는 협의하지 않겠다.” 1951년 8월10일, 한국전쟁 종식을 위한 휴전회담이 한창이던 판문점. 유엔군측 수석대표 터너 C 조이 중장이 비장한 표정으로 30분간이나 성명서를 낭독했다. 조이 중장은 휴전회담의 핵심내용이 되는 군사분계선을 ‘현재의 양측 접촉선’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유엔측의 강경한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유엔군측과 공산군측은 한 달 전(7월10일) 정전회담을 시작하면서 그때까지 군사분계선 설정 등 핵심의제를 두고 팽팽한 접전을 벌여왔다. 공산군측은 전쟁 이전의 상태인 38도선을, 유엔군측은 현재의 양측 접촉선(현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획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조이는 이날 “더는 공산군측의 의도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면서 “앞..
코끼리가 유배를 떠난 까닭은? “(코끼리가) 사람을 해쳤습니다. 사람이라면 사형죄에 해당됩니다. 전라도의 해도(海島)로 보내야 합니다.” 1413년(태종 13년)의 일이다. 병조판서 유정현의 진언에 따라 ‘코끼리’가 유배를 떠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다.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인 원의지(源義智·아시카가 요시모치)가 ‘동물외교’의 일환으로 바친 코끼리였다. 문제의 코끼리가 그만 공조판서를 지낸 이우(李玗)를 밟아죽인 것이다. 이우가 “뭐 저런 추한 몰골이 있냐”며 비웃고 침을 뱉자, 화가 난 코끼리가 사고를 친 것이다. 가뜩이나 1년에 콩 수백석을 먹어대서 단단히 미운털이 박혔는데, 살인까지 저질렀으니…. 코끼리의 유배지는 전라도 장도(獐島)였다. 6개월 후 전라 관찰사가 눈물겨운 상소문을 올린다. “(코끼리가) 좀체 먹지않아 날로 ..
'왕수석' 정약용의 무단이탈기 만약 대통령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던 청와대 왕수석이 근무지를 무단이탈했다면? 그것도 야당의 집중공격을 받고 있던 수석이 3일이나 잠수를 탔다면? 다산 정약용(1762~1863년)을 두고 하는 얘기다. 요즘 같으면 도하 각 언론에 ‘왕(정조)의 남자’ 정약용의 근무지 무단 이탈 소식을 대서특별하며 난리를 피웠을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1797년 단옷날을 앞둔 초여름이었다. 당시 36살의 다산은 훌쩍 도성을 빠져나갔다. 당시 승정원 좌부승지로 일했던 다산으로서는 명백한 근무지 이탈이었다. “~법에는 벼슬하는 자라면 임금을 뵙고, 허락을 구하지 않고서는 도성 문을 나설 수 없었다. 그러나 뵙고 재가를 얻을 수 없었으므로 그대로 출발했다.” 다산의 열초산수도. 다산이 고향마을 앞을 흐르는 한강(열수)에서 ..
정전협정 '바로' 읽기 1953년 7월27일, 판문점 일대의 하늘은 두툼한 구름이 뒤덮여 있었지만, 구름 사이로 이따끔씩 햇빛이 새어나오곤 했다. 1127일 간의 혈전(전투) 속에서 764일 간의 지루한 설전(휴전협상) 끝에 마침내 평화의 날이 찾아온 것이다. 정전협정 조인식장으로 설치된 건물의 벽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두마리 그려져 있었다. 이윽고 오전 10시 정각이 되자 윌리엄 해리슨 유엔군측 수석대표와 남일 공산군측 수석대표가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조인식장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수석대표들은 단 한마디의 인사말도 나누지 않고 악수도 생략한채 정전협정문에 서명했다. 서명을 마친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퇴장해버렸다. 그날 오후 10시..
딸 낳으면 집안이 망한다 조선 후기의 혼수품 내역을 기록한 혼수물목. 세로 31㎝에 가로는 1m가 넘는다. 신부가 준비해야 할 장농, 상의, 바지, 고쟁이 등의 갖가지 혼수용품의 명칭과 수량을 빼곡히 적어놓았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신이 박연의 아들 박자형을 사위로 맞이했사온데…. 사위가 제 딸의 혼수품이 적은 것에 불만을 품고 ‘여자가 뚱뚱하고 키가 작으며 행실이 부도덕하다’며 쫓아내려 합니다.” 1445년(세종 27년)의 일이다. 전 현감 정우(鄭瑀)가 사헌부에 고소장을 제출한다. 고소장에 나타나는 박연은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일컬어진 바로 그 ‘유명한 분’이다. 한데 박연의 자식 교육은 ‘불합격점’을 받을 만 했다. 소장을 보면 정우의 사위가 된 박연의 아들 박자형이 혼수에 불만을 품었다는 것. 부인을 두고 ‘뚱뚱하고..
연산군을 위한 변명 “임금이 두려워 한 것은 사서뿐이다.(人君所畏者 史而已)” 성군의 말씀이 아니다. 연산군의 말씀이시다. 비록 폭군이지만 역사를 두려워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너무 두려워 한 탓일까. 연산군은 넘지 못할 선을 넘고 말았다. 절대 보아서는 안될 사초를 보았을 뿐 아니라 아예 ‘임금의 일’은 역사로 남기지 말라는 엄명까지 내렸다. 때는 바야흐로 1498년 편찬과정에서 사관 김일손이 사초에 삽입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파문을 일으켰다. ‘조의제문’은 항우가 초나라 의제를 죽인 것을 빗대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진노한 연산군은 “당장 김일손의 사초를 모조리 가져오라”는 엄명을 내린다. 승정원 일기의 기초가 된 사초. 광주 이씨 가문이 소장한 것이다. |서울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