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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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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를 울린 '효녀지은' 이야기 “얘, 지은아. 예전엔 밥은 거칠었지만 맛은 좋았는데, 요즘에 먹는 밥은 좋기는 하지만 밥맛은 예전같지 않구나. 마치 칼날로 간장을 찌르는 것 같고….” 신라 진성왕(재위 887~897년)대의 일이다. 경주 분황사 동쪽 마을 살던 효녀 지은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눈이 먼 홀어머니를 모셔야 했다. 32살이 되도록 시집도 가지 못했다. 지은의 삶은 고단했다. 날품팔이와 구걸로 어머니를 봉양했지만 그 또한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부잣집에 몸을 팔아 종이 되었다. 지은은 몸을 판 조건으로 쌀 10여 섬을 마련했다. 하루종일 주인집에서 일한 뒤 저녁에 밥을 지어 어머니를 주었다. 하지만 3~4일 후 어머니는 밥맛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허구헌날 거친 밥만 먹다보니 윤기가 흐르는 쌀밥을 뱃속이 ..
'한마디 농담'으로 세워진 나라 “얘들야, 앞의 말은 농담이었느니라.(前言戱之耳)” 공자님이 순간 진땀을 흘리면서 “내 말이 농담이었다”고 서둘러 변명한다. 제자 자유(子游)가 정색을 하며 대들었는데, 그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공자 ‘농담사건’의 사연을 들어보자. 공자가 어느날 제자 자유가 다스리고 있던 고을인 무성(武城)에 갔다. 마침 고을 곳곳에서 비파를 타며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요순시대의 고복격양가(鼓腹擊壤歌)와 같은 태평성대의 노래소리였다. 공자가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 농을 던졌다. “어째 닭 잡는데 소잡는 칼을 쓰는 것 같구나.(割鷄 焉用牛刀)” 춘추시대 진나라의 봉지. 춘추 5패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했던 진나라는 주나라 천자의 농담 한마디 덕분에 건국됐다. (출처:인성핑의 , 시공사, 2003년) ■공자의 ‘..
공자의 역사왜곡과 '춘추필법' 1508년, 치세 3년째를 맞이한 중종 임금이 승정원과 예문관에 뜻깊은 선물을 하사했다. 붓 40자루와 먹 20홀을 나눠준 것이다. 중종은 그러면서…. “임금의 허물을 간하는 신하를 직신이라 했고, 잘못을 알면서도 아첨을 선(善)이라 고하는 자는 유신(諛臣)이라 한단다. 그 옛날 당나라 태종이 겉으로는 넓은 도량을 갖고 있었지만 ‘부끄러운 덕(慙德)’도 아울러 있었으니 과인은 그를 본받지 않으련다. 그대들은 숨김없이 말아라. 비록 지나친 말이 있다해도 죄를 가하지 않으련다.” 이른바 ‘정관의 치’라는 태평성대를 이끈 성군의 상징인 당 태종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으니 본받지 않겠다? 중종은 두 형제를 무참히 죽이고 황제에 등극한 당 태종을 ‘부끄러운 덕’이라 폄훼한 것이다. 사관들은 ‘사관의 직필’을 상징하..
그렇다면 세종도 '종북파'다 “하늘이 하늘이 된 까닭을 아는 사람은 왕업을 이룰 수 있지만 하늘이 하늘이 된 까닭을 모르는 사람은 왕업을 이룰 수 없습니다.(知天之天者 王事可成 不知天之天者 王事不可成)” 기원전 204년. 한나라 고조 유방의 유세객이었던 역이기가 주군인 유방을 설득한다. 초나라 항우의 기세가 대단했을 때였다. 역이기는 항우의 총공격을 받고 고전하던 유방이 진나라 시절부터 엄청난 식량창고가 있던 오창(敖倉·지금의 허난성 룽양현 동북쪽)을 포기하려 하자 긴급 상소문을 올린 것이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덧붙인다. “옛말에 ‘천하에 왕노릇 하는 사람은 백성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백성은 양식을 하늘처럼 떠받는다(王者以民人爲天 而民人以食爲天)’고 했습니다.” 선조임금은 스스로 ‘이민위천’을 실천하지 않아 전쟁까지 불렀다고 한탄했..
금관총은 '소지왕릉'이다? ‘저 아이들, 무슨 일이지?’ 1921년 9월24일 아침 9시, 경주 노서리 마을을 순시 중이던 미야케 요산(三宅與三) 순사(경주경찰서)의 눈에 심상찮은 장면이 포착됐다. 매립된 흙 속에서 3~4명의 아이들이 뭔가 열심히 찾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보니 아이들 모두 청색 유리옥을 들고 있었다. ‘청색구슬? 혹시 고분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신라가 천년고도임을 알고있던 미야케의 머리가 순식간에 돌아갔다. “얘들아. 이 흙은 어느 집에서 파서 옮겨온 거야?” “저기 저 술집이요.” 아들이 가리킨 곳은 봉황대 바로 아래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박문환의 집이었다. 미야케가 주막집 증축을 위한 터파기 작업을 벌이던 박문환의 집 뒷마당으로 출동했다. 금관총 발굴 당시의 모습을 그린 그림. 박문환의 술집을 확장하는 공사..
'블랙코미디' 휴전회담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고려하는 토의는 끝났다. 앞으로는 협의하지 않겠다.” 1951년 8월10일, 한국전쟁 종식을 위한 휴전회담이 한창이던 판문점. 유엔군측 수석대표 터너 C 조이 중장이 비장한 표정으로 30분간이나 성명서를 낭독했다. 조이 중장은 휴전회담의 핵심내용이 되는 군사분계선을 ‘현재의 양측 접촉선’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유엔측의 강경한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유엔군측과 공산군측은 한 달 전(7월10일) 정전회담을 시작하면서 그때까지 군사분계선 설정 등 핵심의제를 두고 팽팽한 접전을 벌여왔다. 공산군측은 전쟁 이전의 상태인 38도선을, 유엔군측은 현재의 양측 접촉선(현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획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조이는 이날 “더는 공산군측의 의도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면서 “앞..
코끼리가 유배를 떠난 까닭은? “(코끼리가) 사람을 해쳤습니다. 사람이라면 사형죄에 해당됩니다. 전라도의 해도(海島)로 보내야 합니다.” 1413년(태종 13년)의 일이다. 병조판서 유정현의 진언에 따라 ‘코끼리’가 유배를 떠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다.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인 원의지(源義智·아시카가 요시모치)가 ‘동물외교’의 일환으로 바친 코끼리였다. 문제의 코끼리가 그만 공조판서를 지낸 이우(李玗)를 밟아죽인 것이다. 이우가 “뭐 저런 추한 몰골이 있냐”며 비웃고 침을 뱉자, 화가 난 코끼리가 사고를 친 것이다. 가뜩이나 1년에 콩 수백석을 먹어대서 단단히 미운털이 박혔는데, 살인까지 저질렀으니…. 코끼리의 유배지는 전라도 장도(獐島)였다. 6개월 후 전라 관찰사가 눈물겨운 상소문을 올린다. “(코끼리가) 좀체 먹지않아 날로 ..
'왕수석' 정약용의 무단이탈기 만약 대통령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던 청와대 왕수석이 근무지를 무단이탈했다면? 그것도 야당의 집중공격을 받고 있던 수석이 3일이나 잠수를 탔다면? 다산 정약용(1762~1863년)을 두고 하는 얘기다. 요즘 같으면 도하 각 언론에 ‘왕(정조)의 남자’ 정약용의 근무지 무단 이탈 소식을 대서특별하며 난리를 피웠을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1797년 단옷날을 앞둔 초여름이었다. 당시 36살의 다산은 훌쩍 도성을 빠져나갔다. 당시 승정원 좌부승지로 일했던 다산으로서는 명백한 근무지 이탈이었다. “~법에는 벼슬하는 자라면 임금을 뵙고, 허락을 구하지 않고서는 도성 문을 나설 수 없었다. 그러나 뵙고 재가를 얻을 수 없었으므로 그대로 출발했다.” 다산의 열초산수도. 다산이 고향마을 앞을 흐르는 한강(열수)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