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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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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최후의 고백' 새삼스러운 궁금증 하나. 복숭아 나무는 못된 귀신을 쫓아내고 요사스런 기운을 없애주는 상사로운 나무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 조상들은 절대 이 복숭아를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일까. 여기에는 동이족의 ‘슬픈 전설’이 숨겨져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이가 전설 속 ‘동이족의 명궁’인 ‘예’라는 인물이다. 때는 바야흐로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요 임금 시절이었다. 그 당시엔 태양이 10개나 있었다. 동방의 천제 제준과 태양의 여신 희화 사이에 난 자식들이었다. 10개의 태양은 세 발 달린 신성한 까마귀, 즉 삼족오였다. 이들은 어머니 희화가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 하루에 하나씩 교대로 떠올랐다. 그 일을 수만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괴한 일이 일어났다. 2000여 년 전 경남 다호리 일대를 ..
'막말, 항명, 풍문' 탄핵도 허하라! “그의 살코기를 씹어먹고 싶습니다.(欲食其肉)” 1497년(연산군 3년) 사간원 정언(정 6품) 조순이 ‘막말’을 해댄다. 갓 서른이 된 사무관(조순)이 칠순을 넘긴 노(老) 재상 ‘노사신’을 겨냥,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그것도 임금 앞에서…. 무슨 사연일까. 사건은 연산군이 신임 고양군수로 ‘채윤공’을 임명하면서 비롯됐다. 임금의 잘못을 간언하고(사간원) 관료들의 비행을 적발하는(사헌부) 대·간관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글도 모르는 채윤공이 어찌 고을을 다스리겠느냐’는 것이었다. 채윤공은 노사신의 최측근이었다. 노사신은 “대간이 무슨 공자님도 아니고…. 남의 벼슬길까지 막느냐”고 적극 변호했다. “대간이라는 자들은 남을 고자질해서 명성을 얻는 자들”이라는 극언을 퍼부으며…. 그러자 조순 등이 ‘간신..
김일성의 '논개작전' 철원 동주산성(해발 360m)에 서면 철책너머 저 까마득한 북쪽에 지평선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둑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군사분계선 너머 갈 수 없는 땅, 그곳이 바로 평강고원이다. 야트막한 봉우리 두 개가 여렴풋 하고, 그 너머엔 제법 거대한 산 하나(장암산·해발 1052m)가 버티고 있다. 산인지, 혹은 고지인지 모를 두 봉우리 중 하나는 낙타고지(432.3m)요, 또 하나는 오리산(453m)이다. 한국전쟁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낙타고지는 그렇다치고, 여기서는 오리산(鴨山)을 주목하자. ■아! 평강고원 왜냐? 이 야트막한 오리산과 그 너머 검불랑(680m)은 지금도 내부에서는 끓고 있는 휴화산이다. 인류가 처음 등장했던 4기 홍적세(200만년~1만 년 전) 때 이 오리산과 검불랑에서 최소한..
신라를 울린 '효녀지은' 이야기 “얘, 지은아. 예전엔 밥은 거칠었지만 맛은 좋았는데, 요즘에 먹는 밥은 좋기는 하지만 밥맛은 예전같지 않구나. 마치 칼날로 간장을 찌르는 것 같고….” 신라 진성왕(재위 887~897년)대의 일이다. 경주 분황사 동쪽 마을 살던 효녀 지은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눈이 먼 홀어머니를 모셔야 했다. 32살이 되도록 시집도 가지 못했다. 지은의 삶은 고단했다. 날품팔이와 구걸로 어머니를 봉양했지만 그 또한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부잣집에 몸을 팔아 종이 되었다. 지은은 몸을 판 조건으로 쌀 10여 섬을 마련했다. 하루종일 주인집에서 일한 뒤 저녁에 밥을 지어 어머니를 주었다. 하지만 3~4일 후 어머니는 밥맛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허구헌날 거친 밥만 먹다보니 윤기가 흐르는 쌀밥을 뱃속이 ..
'한마디 농담'으로 세워진 나라 “얘들야, 앞의 말은 농담이었느니라.(前言戱之耳)” 공자님이 순간 진땀을 흘리면서 “내 말이 농담이었다”고 서둘러 변명한다. 제자 자유(子游)가 정색을 하며 대들었는데, 그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공자 ‘농담사건’의 사연을 들어보자. 공자가 어느날 제자 자유가 다스리고 있던 고을인 무성(武城)에 갔다. 마침 고을 곳곳에서 비파를 타며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요순시대의 고복격양가(鼓腹擊壤歌)와 같은 태평성대의 노래소리였다. 공자가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 농을 던졌다. “어째 닭 잡는데 소잡는 칼을 쓰는 것 같구나.(割鷄 焉用牛刀)” 춘추시대 진나라의 봉지. 춘추 5패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했던 진나라는 주나라 천자의 농담 한마디 덕분에 건국됐다. (출처:인성핑의 , 시공사, 2003년) ■공자의 ‘..
공자의 역사왜곡과 '춘추필법' 1508년, 치세 3년째를 맞이한 중종 임금이 승정원과 예문관에 뜻깊은 선물을 하사했다. 붓 40자루와 먹 20홀을 나눠준 것이다. 중종은 그러면서…. “임금의 허물을 간하는 신하를 직신이라 했고, 잘못을 알면서도 아첨을 선(善)이라 고하는 자는 유신(諛臣)이라 한단다. 그 옛날 당나라 태종이 겉으로는 넓은 도량을 갖고 있었지만 ‘부끄러운 덕(慙德)’도 아울러 있었으니 과인은 그를 본받지 않으련다. 그대들은 숨김없이 말아라. 비록 지나친 말이 있다해도 죄를 가하지 않으련다.” 이른바 ‘정관의 치’라는 태평성대를 이끈 성군의 상징인 당 태종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으니 본받지 않겠다? 중종은 두 형제를 무참히 죽이고 황제에 등극한 당 태종을 ‘부끄러운 덕’이라 폄훼한 것이다. 사관들은 ‘사관의 직필’을 상징하..
그렇다면 세종도 '종북파'다 “하늘이 하늘이 된 까닭을 아는 사람은 왕업을 이룰 수 있지만 하늘이 하늘이 된 까닭을 모르는 사람은 왕업을 이룰 수 없습니다.(知天之天者 王事可成 不知天之天者 王事不可成)” 기원전 204년. 한나라 고조 유방의 유세객이었던 역이기가 주군인 유방을 설득한다. 초나라 항우의 기세가 대단했을 때였다. 역이기는 항우의 총공격을 받고 고전하던 유방이 진나라 시절부터 엄청난 식량창고가 있던 오창(敖倉·지금의 허난성 룽양현 동북쪽)을 포기하려 하자 긴급 상소문을 올린 것이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덧붙인다. “옛말에 ‘천하에 왕노릇 하는 사람은 백성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백성은 양식을 하늘처럼 떠받는다(王者以民人爲天 而民人以食爲天)’고 했습니다.” 선조임금은 스스로 ‘이민위천’을 실천하지 않아 전쟁까지 불렀다고 한탄했..
금관총은 '소지왕릉'이다? ‘저 아이들, 무슨 일이지?’ 1921년 9월24일 아침 9시, 경주 노서리 마을을 순시 중이던 미야케 요산(三宅與三) 순사(경주경찰서)의 눈에 심상찮은 장면이 포착됐다. 매립된 흙 속에서 3~4명의 아이들이 뭔가 열심히 찾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보니 아이들 모두 청색 유리옥을 들고 있었다. ‘청색구슬? 혹시 고분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신라가 천년고도임을 알고있던 미야케의 머리가 순식간에 돌아갔다. “얘들아. 이 흙은 어느 집에서 파서 옮겨온 거야?” “저기 저 술집이요.” 아들이 가리킨 곳은 봉황대 바로 아래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박문환의 집이었다. 미야케가 주막집 증축을 위한 터파기 작업을 벌이던 박문환의 집 뒷마당으로 출동했다. 금관총 발굴 당시의 모습을 그린 그림. 박문환의 술집을 확장하는 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