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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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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우먼', 동이족 최초의 여장군 “1975년 초겨울이었지. 이곳(안양)에서도 ‘다자이(大寨)에서 배우자’는 운동에 따라 농지정리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어요.” 지난 2008년 11월, 필자는 중국 허난성(河南省) 안양(安陽)에서 열린 ‘갑골문 100주년’ 학술대회에 참가하던 중 인쉬(殷墟)박물관을 찾았다. 함께 간 이형구 교수(전 선문대)가 감회어린 표정으로 전시유물을 보고 있던 할머니 한 분을 소개해주었다. 150㎝나 될까말까한 평범한 촌로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할머니는 1949년 신중국 탄생 이후 첫 여성 고고학자로 이름을 알린 정전샹(鄭振香·당시 79살)이었다. 특히 이곳 인쉬에서 상나라의 여장군 부호(婦好)의 무덤을 조사한 고고학계의 여장부였다. 동이족의 일파가 세운 상(기원전 1600~1046년)은 한족의 나라인 하(夏·기원..
개도 원숭이도 금테 둘렀던 신라 “신라의 공기가 순수하고 물이 맑고 토질이 비옥하다. 불구자를 볼 수 없다. 만약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의 향기가 풍긴다. 전염병과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병이 걸린 사람은 그곳에 가면 곧 완치된다.” 아랍의 사학자인 알 카즈위니(Al Qazwini)는 1250년 발간된 에서 신라인의 생활상을 이렇듯 생생하게 전했다. 용연향(龍涎香)은 향유고래의 장 안에 있는 회색 또는 갈색의 물질이며, 사향의 향기를 내는 향료이다. 신라인들의 삶을 극찬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표현은 약과다. 9~12세기 사이 아랍의 지리학자들은 한결같이 신라를 ‘신비의 이상향’이자, ‘황금의 나라’로 표현한다. 심지어 신라인들은 금은으로 도배하고 산다는 표현도 많다. “(신라인들은) 집을 비단과 금실..
야합과 사랑 사이 ‘야합(野合)’이란 말이 있다. ‘정치적 야합’처럼 좋지 않은 목적으로 어울리는 관계라는 의미로 흔히 쓴다. 하지만 본디 야합의 뜻은 글자 그대로다.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들판에서 사랑을 나눈다는 뜻이다. 저 유명한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에는 야합의 생생한 현장이 포착돼있다. 작가는 교교한 초생달이 비치는 자정(삼경)에 남녀가 만나는 모습을 그렸다. 분명 부부는 아니다. 쓰개치마를 쓴 여염의 여인과 중치막을 입은 젊은 유생이 은밀히 만나는 장면이 분명하다. 유교적인 사회질서에 사로잡힌 조선 후기의 사회…. 하지만 아무리 억누른다 해도 남녀간 피어나는 사랑을 어찌할 것인가. 그림에는 두 사람의 ‘애절하고도, 위험한 사랑’을 알리는 시(詩)가 써있다. “달빛이 침침한 야삼경에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만이 ..
율곡도, 다산도 당한 신입생환영회 1494년(성종 25년), 금방 도총관(무관·장관급)으로 부임한 변종인이 분을 참지 못한채 임금을 찾았다. 그의 하소연은 기막힐 따름이었다. “글쎄 제가 훈련원에 앉아 있는데, 권지(權知) 등이 신에게 ‘허참례를 아직 올리지 않았다’며 예를 올리는커녕 마구 이름을 부르며 욕했습니다. 대체 이럴 수가 있습니까.” 변종인이 누구인가. 참판을 지낸 재상이었다. 게다가 도총관은 정2품인 장관급 무관벼슬이었다. 반면 변종인을 희롱한 ‘권지’는 지금의 시보(試補) 혹은 수습(修習)이었다. 과거급제 후 정식벼슬을 받기 전에 실무를 배우고 있던 수습관원이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권지 등이 금방 도총관으로 임명된 변종인을 보고 불러세웠다. “이봐! 신래(新來·신참)!” 이들은 ‘허참례’, 즉 ‘밥 한끼, 술 한 잔..
호빗, 인간과 비인간 사이 지난 2003년,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650㎞ 떨어진 플로레스섬의 리앙 부아 동굴에서 수수께끼 같은 화석이 발견됐다. ‘호미닌(인류의 총칭)’ 화석이었다. 과학자들은 화석에 발견된 장소의 이름을 따 ‘호모 플로렌시스’라고 한 뒤 ‘호빗(hobbit)’이라는 애칭을 달아주었다. ‘호빗’은 1937년 발표된 J R R 톨킨의 소설()에서 처음 등장하고, 영화 에서 묘사된 난쟁이족이다. 이 화석은 어른 여성의 것이었는데, 키가 약 1m 가량의 단신이었다. 뇌의 용적이 불과 420CC였다. 그래서 호빗이라는 별명을 붙인 것이다. 호빗의 연대는 9만5000년 전~1만7000년 전 사이였다. 과학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모 플로렌시스’ 화석을 복원한 모습. ‘호빗’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도서출판 주류성 제공..
삼정승 배출한 성균관 1582학번 “아이고. 벌써 49년이 흘렀네. 그 때(임진년) 태어난 자들도 백발이 되었을 텐데….” 1630년 4월 어느 날. 백발이 성성한 노인 12명이 관인방(寬仁坊·관철동) 충훈부(忠勳府) 건물로 속속 모였다. 손에 손에 술 한 병씩 든 채…. 이들은 1582년(임오년) 사마시(생원·진사시)에 합격했던 동기생들이었다. 이른바 ‘(15)82학번 동기모임’이 열린 것이다. 원래 동기생 수는 200명이었다. 하지만 합격한 지 48년이나 지났으므로 많은 동기들이 세상을 떠났다. 더욱이 재경(在京) 동문들만이 참석대상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12명 만이 모인 것이다. 이조판서 정경세가 남긴 글을 통해 이날 동기모임의 자초지종을 읽어보자.(윤진영의 에서) 48년만에 만난 성균관 1582학번의 동기모임. 품계에 따라 앉아..
김부식의 '막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치(한나라 여태후)와 무조(무측천·측천무후) 같은 이에 이르러 어리고 나약한 임금을 만나 조정에 임하여 천자처럼 행하였다. 양(陽)은 굳세고, 음(陰)은 부드러운 게 하늘의 이치다. 사람으로 말하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다. 어찌 늙은 할멈이 안방에서 나와 나라의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를 지은 김부식은 를 쓴 뒤 맨 끝에 이런 평론을 달았다. 전형적인 남존여비 사상을 풀어놓은 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한 것이다. 김부식은 한 술 더 뜬다. 선덕여왕을 두고 “에 이르기를 ‘암탉이 새벽을 알린다(빈계지신·牝鷄之晨)’고 했다.”고 표현하면서…. 요즘 같으면 큰일 날 ‘막말’을 역사서에 버젓이 기록해놓은 것이다. 그러고보니 이 ‘..
응답하라 1937년 “이것은 발해 온돌이고, 요 밑에는 옥저 온돌이고….” 지난 2007년 7월 22일, 연해주 체르냐치노 마을 유적을 발굴 중이던 정석배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깜짝 놀랐다. 같은 주거지에서 1m 깊이를 두고 발해(698~926)와 옥저시대(기원전 3~기원후 3세기)의 온돌(쪽구들)이 차례로 발굴된 것이다. 4일 뒤인 26일 필자는 경향신문의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기획팀 일원으로 이곳을 찾았다가 이 흥미진진한 유구를 직접 볼 수 있었다. 주거지 1기의 바닥에서 옥저 온돌이 발견됐고, 바로 그 1m 위에 발해 온돌이 차례로 확인됐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이 마을은 옥저시대 사람들의 터전이었다는 것. 그러다 옥저가 사라진 지 400년 뒤에 이 마을엔 발해 사람들이 둥지를 틀었다는 것. 발해인들은 옥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