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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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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도, 다산도 당한 신입생환영회 1494년(성종 25년), 금방 도총관(무관·장관급)으로 부임한 변종인이 분을 참지 못한채 임금을 찾았다. 그의 하소연은 기막힐 따름이었다. “글쎄 제가 훈련원에 앉아 있는데, 권지(權知) 등이 신에게 ‘허참례를 아직 올리지 않았다’며 예를 올리는커녕 마구 이름을 부르며 욕했습니다. 대체 이럴 수가 있습니까.” 변종인이 누구인가. 참판을 지낸 재상이었다. 게다가 도총관은 정2품인 장관급 무관벼슬이었다. 반면 변종인을 희롱한 ‘권지’는 지금의 시보(試補) 혹은 수습(修習)이었다. 과거급제 후 정식벼슬을 받기 전에 실무를 배우고 있던 수습관원이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권지 등이 금방 도총관으로 임명된 변종인을 보고 불러세웠다. “이봐! 신래(新來·신참)!” 이들은 ‘허참례’, 즉 ‘밥 한끼, 술 한 잔..
호빗, 인간과 비인간 사이 지난 2003년,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650㎞ 떨어진 플로레스섬의 리앙 부아 동굴에서 수수께끼 같은 화석이 발견됐다. ‘호미닌(인류의 총칭)’ 화석이었다. 과학자들은 화석에 발견된 장소의 이름을 따 ‘호모 플로렌시스’라고 한 뒤 ‘호빗(hobbit)’이라는 애칭을 달아주었다. ‘호빗’은 1937년 발표된 J R R 톨킨의 소설()에서 처음 등장하고, 영화 에서 묘사된 난쟁이족이다. 이 화석은 어른 여성의 것이었는데, 키가 약 1m 가량의 단신이었다. 뇌의 용적이 불과 420CC였다. 그래서 호빗이라는 별명을 붙인 것이다. 호빗의 연대는 9만5000년 전~1만7000년 전 사이였다. 과학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모 플로렌시스’ 화석을 복원한 모습. ‘호빗’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도서출판 주류성 제공..
삼정승 배출한 성균관 1582학번 “아이고. 벌써 49년이 흘렀네. 그 때(임진년) 태어난 자들도 백발이 되었을 텐데….” 1630년 4월 어느 날. 백발이 성성한 노인 12명이 관인방(寬仁坊·관철동) 충훈부(忠勳府) 건물로 속속 모였다. 손에 손에 술 한 병씩 든 채…. 이들은 1582년(임오년) 사마시(생원·진사시)에 합격했던 동기생들이었다. 이른바 ‘(15)82학번 동기모임’이 열린 것이다. 원래 동기생 수는 200명이었다. 하지만 합격한 지 48년이나 지났으므로 많은 동기들이 세상을 떠났다. 더욱이 재경(在京) 동문들만이 참석대상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12명 만이 모인 것이다. 이조판서 정경세가 남긴 글을 통해 이날 동기모임의 자초지종을 읽어보자.(윤진영의 에서) 48년만에 만난 성균관 1582학번의 동기모임. 품계에 따라 앉아..
김부식의 '막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치(한나라 여태후)와 무조(무측천·측천무후) 같은 이에 이르러 어리고 나약한 임금을 만나 조정에 임하여 천자처럼 행하였다. 양(陽)은 굳세고, 음(陰)은 부드러운 게 하늘의 이치다. 사람으로 말하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다. 어찌 늙은 할멈이 안방에서 나와 나라의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를 지은 김부식은 를 쓴 뒤 맨 끝에 이런 평론을 달았다. 전형적인 남존여비 사상을 풀어놓은 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한 것이다. 김부식은 한 술 더 뜬다. 선덕여왕을 두고 “에 이르기를 ‘암탉이 새벽을 알린다(빈계지신·牝鷄之晨)’고 했다.”고 표현하면서…. 요즘 같으면 큰일 날 ‘막말’을 역사서에 버젓이 기록해놓은 것이다. 그러고보니 이 ‘..
응답하라 1937년 “이것은 발해 온돌이고, 요 밑에는 옥저 온돌이고….” 지난 2007년 7월 22일, 연해주 체르냐치노 마을 유적을 발굴 중이던 정석배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깜짝 놀랐다. 같은 주거지에서 1m 깊이를 두고 발해(698~926)와 옥저시대(기원전 3~기원후 3세기)의 온돌(쪽구들)이 차례로 발굴된 것이다. 4일 뒤인 26일 필자는 경향신문의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기획팀 일원으로 이곳을 찾았다가 이 흥미진진한 유구를 직접 볼 수 있었다. 주거지 1기의 바닥에서 옥저 온돌이 발견됐고, 바로 그 1m 위에 발해 온돌이 차례로 확인됐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이 마을은 옥저시대 사람들의 터전이었다는 것. 그러다 옥저가 사라진 지 400년 뒤에 이 마을엔 발해 사람들이 둥지를 틀었다는 것. 발해인들은 옥저..
박정희의 XXX 따러 왔시요. “청와대를 까러 왔수다.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시요.” 1968년 1월22일 저녁 7시. 방첩대 사령부 식당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북한 유격대원 김신조(당시 27살)의 얼굴은 오기에 가득 찼다. 그는 스스로의 표현대로 “작전에 실패한 적군의 자존심으로 도끼눈을 뜬 채” 기자들의 질문에 당당하게 대답했다. “비록 투항했지만, 전향한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영문도 모르는 기자회견장에 개끌리듯 끌려나와 대답을 강요하는 것은 결국 날 무시하고 깔보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러니 격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지요.” 당시 기자회견장의 분위기를 떠올린 김신조의 후일담이다.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 그것도 ‘청와대를 습격해서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다’니….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게다가 김신조 일당이 제지 당한 곳이 청와대와 직선..
치욕의 병자호란 속 '귀중한 1'승 “상(인조)이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三拜九叩頭)를 행했다.” 1637년 1월30일은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치욕적인 날이다. 말이 ‘조아린다’는 것이지 사실은 머리를 찧어 피가 밸 정도로 용서를 비는 절차였다. 이나마 다행이었을까. 청나라는 사실 항복의 예를 갖출 때, 삼배구고두보다 더 지독한 의식을 요구했던 것 같다. 즉 인조가 두 손을 묶고, 구슬을 입에 문채 빈 관을 싣고 나가 항복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옛날 진나라 3세황제가 된 자영(子영)이 노끈을 목에 걸고 백마가 끄는 흰 수레를 타고 유방(한 고조)에게 항복한 것과 같은 것이다. 한마디로 죽여든 살리든 알아서 해달라는 무조건 항복의 의미였다. 하지만 청 태종은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은 것 같다. 항복일을 이틀 남..
고구려의 청야전술 vs 미군의 교살작전 “지금 한나라 군사들이 군량을 천 리나 옮겼기 때문에 오래 견딜 수 없습니다. 만약 성 주위에 해자(垓子·도랑)를 깊게 파고 보루를 높이며 들판의 곡식을 비워 대비하면(若我深溝高壘 淸野以待之) 그들은 반드시 한 달을 버티지 못하고 굶주려서 돌아갈 것입니다. 그 틈에 공격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서기 172년 11월, 고구려 신대왕이 비상대책위원회를 연다. 막강한 한나라가 많은 군사를 이끌고 처들어온 것이다. 그 때 국상 명림답부가 주장한 전법이 바로 ‘청야(淸野)전술’이었다. 과연 그 말이 맞았다. 맞대응을 피하고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자 한나라 군사들은 굶주림에 시달려 철수하기 시작했다. 명림답부는 수천의 기마병을 이끌고 철수하는 적군을 좌원(坐原)에서 맹공했다. 전의를 상실한 한나라군은 대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