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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박명인가. 지광국사현묘탑의 팔자 미인박명인가. 지광국사현묘탑을 두고 하는 말이다. ‘미인’이란 우리나라 부도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라는 뜻이고, ‘박명’은 그만큼 탑의 팔자가 기구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절이 완전히 불타는 수모를 묵묵히 지켜보았을 탑은 한일합병 직후인 1912년 산산이 분해 되어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돌아온다. 그런데 연구자 이순우가 발굴공개한 자료, 즉 후지무라 토쿠이치라는 일본인이 쓴 ‘현묘탑 강탈시말’이라는 글을 보면 90년간 베일에 쌓였던 현묘탑 반출의 이력이 낱낱이 드러난다.(이순우의 ·하늘재) 경복궁 내에 서있는 지광국사현묘탑. 지금 해체 복원작업 중이다. 이 글은 후지무라가 편찬한 ‘거류민지석물어(居留民之昔物語·1927년간)’에 들어있다. 그가 밝힌 전말은 이렇다.1911년 9월쯤 모리라는 인물이 ..
지광국사는 왜 원주에 왕찰을 지었나 “금년(1609년) 가을 휴가를 얻어 와서 얼마동안 있었다. 마침 지관(智觀)스님이 찾아와 ‘기축년(1589년)에 법천사에서 1년 주석했다’고 했다. 그 말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스님과 함께 길을 나섰다. ~난리(임진왜란)에 불타서 무너진 주춧돌과 함께 절터의 흔적이 토끼와 사슴이 다니는 길에 남아 있었다.” 풍운아 허균(1569~1618)은 ‘유원주법천사기(遊原州法泉寺記)’에서 원주 법천사를 둘러본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허균의 기록 덕분에 이로써 법천사는 1589년까지 존속하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됐으며 1609년에는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법천사는 이후 중창됐다는 기록이 없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처량한 신세를 면치 못한다. 그저 남아 있는 지광국사현묘탑이나 당간지주, 그리고 사찰에 사용되..
녹두장군 전봉준, 그 최후의 순간 1894년 11월 동학농민군 2차 봉기에 나섰다가 패한 전봉준 장군(1855~1895)은 전북 순창군 상치면 피노리에 이르렀다. 동지인 김개남 장군이 은신해 있다는 태인으로 가는 도중에 옛 친구인 김경천을 만나러 간 것이었다. 김경천은 원래 전봉준의 부하였다가 농민군이 대패한 이후 피노리에 피신중이었다. 당시 조정은 전봉준의 목에 현상금을 걸어놓고 있었다. 원하면 군수 자리까지 준다는 매혹적인 조건이었다. 천금의 현상금에 눈이 먼 김경천은 이웃인 한신현에게 밀고했다. 한신현은 김영철·정창욱 등 마을 사람들과 전봉준이 쉬고 있던 주막을 포위했다. 전봉준이 위기를 감지하고 담을 넘어 도망가려 했지만 젊은이들(혹은 관군)이 내리친 몽둥이에 맞아 체포됐다. 김경천의 배신과 관련해서는 여러 후일담이 있다. 하나의..
핫도그에 개고기 있었을까 "음식에 개라니…. 안될 말이다.” 이슬람 국가인 말레이시아가 ‘핫도그(hotdog)’ 이름을 ‘핫소시지’로 바꿀 것 같다. 이슬람 문화권은 (犬)를 부정한 동물로 여긴다. 말레이시아 이슬람개발부는 “도그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음식메뉴는 ‘할랄(이슬람 음식)’ 인증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하기야 이상하기는 하다. 언제, 어디서부터 소시지를 끼워 먹는 빵 음식을 ‘핫도그’라 했을까. 설이 난무하다보니 딱 이거다 할 주장을 찾기 어렵다. 다만 1600년대 말 독일 바이에른주 코르부크의 정육업자인 요한 게오르그 라너가 독일산 개인 ‘닥스훈트’를 닮은 소시지를 만들었다는 설이 그나마 그럴 듯 하다. 허리가 길고 다리가 짧은 독일개와 비슷한 소시지라는 의미에서 ‘닥스훈트 소시지’ 혹은 ‘작은 개 소시..
원숭이 돌도끼와 사람의 돌도끼는 같다? 땅속에서 출토된 돌도끼는 예부터 하늘의 신물(神物)로 여겨졌다. 번개와 벼락신인 뇌공이 내려준 뇌부(雷斧)라 해서 신성시했다. 갈아 먹으면 말끔히 낫는다는 믿음 때문인지 임질(요로결석?)을 앓던 조선 세종 임금을 위해 돌도끼를 찾아 바쳤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카푸친 원숭이가 돌도끼를 만드는 모습 "임질을 앓은 사람들은 ‘이 병은 비록 나았다가도 발작한다’고 한다.” “찌르고 아픈 증세가 즉시 발작하곤 한다.”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 더욱 심하다.”(
진시황 시대 '개그콘서트'와 김제동 요즘의 개그맨이나 예능인이라 할만한 사람들이 2500~2600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사마천 같은 역사가는 그런 이들을 골계가라 했습니다. 음악에 능하고, 우스갯소리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골계가들은 군주의 곁에 머물며 군주의 귀를 즐겁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역할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군주가 잘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신랄한 풍자와 멋들어진 해학으로 군주를 올바른 길로 이끌었습니다. 직접적인 말이 아니었습니다. 은유법과 반어법을 섞어가며 절묘한 말솜씨로 군주의 그릇된 마음을 되돌려놓았습니다. 요즘으로 친다면 풍자개그였던 셈이죠. 심지어 우전이라는 골계가는 천하의 폭군이라는 진시황 앞에서 스스로 직접 ‘짠’ 개그로 멋들어진 ‘개그콘서트’를 선보였습니다. 호위군사들을 위한 개그코너였습니다. 최근 ..
개그맨도 역사서의 주인공이다. 요즘의 개그맨이나 예능인이라 할만한 사람들이 2500~2600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사마천 같은 역사가는 그런 이들을 골계가라 했습니다. 음악에 능하고, 우스갯소리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골계가들은 군주의 곁에 머물며 군주의 귀를 즐겁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역할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군주가 잘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신랄한 풍자와 멋들어진 해학으로 군주를 올바른 길로 이끌었습니다. 직접적인 말이 아니었습니다. 은유법과 반어법을 섞어가며 절묘한 말솜씨로 군주의 그릇된 마음을 되돌려놓았습니다. 요즘으로 친다면 풍자개그였던 셈이죠. 심지어 우전이라는 골계가는 천하의 폭군이라는 진시황 앞에서 스스로 직접 ‘짠’ 개그로 멋들어진 ‘개그콘서트’를 선보였습니다. 호위군사들을 위한 개그코너였습니다. 최근 ..
히틀러 생가와 중앙청 철거 ‘평화, 자유, 민주주의를 위해. 파시즘은 절대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숨져간 수백만이 일깨워준다.’ 오스트리아의 국경도시인 브라우나우 암 인의 잘츠브르거 포르슈타트 15번가에 기념비가 하나 서있다. 아돌프 히틀러의 생가(사진)임을 알려주는 비석이다. 1889년 4월 세관원이던 아버지(알로이스 히틀러)가 게스트 하우스였던 3층짜리 노란색 건물의 방을 빌렸다. 이곳에서 히틀러를 낳았다. 비록 어린 히틀러가 불과 3년 살았을 뿐이지만 히틀러 생가로 유명해졌다. 나치시대 히틀러가 태어난 방은 성지가 됐고, 아돌프 히틀러 거리와, 아돌프 히틀러 광장까지 생겼다. 1938년 히틀러의 개인비서 마틴 보르만은 이 집을 사들여 공공도서관으로 꾸몄다. 미군은 2차대전 막바지 독일군에 의해 파괴될 뻔 했던 생가를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