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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엔 갈매기가 없다 누정(樓亭)은 예부터 서민의 공간이 아니었다. 2000년 전의 역사서인 를 보면 “황제가 신선들이 좋아하는 오성십이루(五城十二樓)를 짓고 기다렸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 동성왕과 무왕은 궁성에 못을 파고 누각을 세워 기이한 짐승을 기르고, 군신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도 있다. 궁중의 휴식공간이던 이같은 누정은 후대에는 음풍농월하던 사대부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가장 유명한 정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압구정일 것이다. 지금도 ‘부티’나는 동네의 상징으로 운위되고 있으니 말이다. 압구정(狎鷗亭)은 송나라의 어진 재상 한기의 서재 이름에서 땄다. 명나라 예겸(1415~1479)이 중국을 방문한 한명회에게 붙여주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압구정. 훗날 3000냥을 들여 꾸민 것을 그렸다.|간송미술관 소장 “기심(機..
보일듯이 보이지 않던 따오기의 울음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 따옥 따옥 소리 처량한 소리….’ 192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한정동의 동시 ‘따오기’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읊었다. 일본에서 발견된 새라서 ‘니포니아 니폰(Nipponia nippon)’이라는 학명이 붙었다. 훗날 동요로 거듭난 ‘따오기’가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애환을 표현한 노래로 금지곡이 됐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1960~70년대엔 ‘보일듯 보이지 않는…’의 가사 때문에 ‘미니스커트’의 다른 말로 전용되기도 했다. 몸길이가 70㎝에 이르는 따오기는 ‘황새의 재판’ 설화에서 뇌물공여자로 등장한다. 꾀꼬리·뻐꾸기와 목소리 소송을 벌이던 따오기는 ‘재판관’ 황새를 찾아가 개구리를 바쳤다. 뇌물공세는 주효했다. 재판관 황새는 곱디고운 꾀꼬리·뻐꾸기의..
'18년 기러기 아빠' 다산의 꾸지람 '하피첩'이라는 보물이 있습니다. 지난 2004년 폐지 할머니의 수레에서 우연히 발견된 유물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편지입니다. 유배생활중인 다산은 아내 홍씨가 보내온 다홍치마를 재단해서 두 아들에게 전하는 편지 4책과 외동딸에게 주는 매조도 그림을 그려 보냈습니다. 딸에게 준 매조도(매화병제도)는 고려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었지만 아둘 둘에게 보냈다는 편지 4첩은 기록으로만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폐지 할머니의 수레에서 4책 중 3책이 극적으로 발견된 것입니다. 다산은 이 책을 이라 했습니다. 붉은 다홍치마에 쓴 편지라는 뜻입니다. 다산이 이 편지 글에서 전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책에서는 그래도 정제된 말씨를 쓰지만 다른 편지글에서는 두 아들을 사정없이 꾸짖는 내용도 심심찮게 있습..
교황은 왜 고려국왕에게 친서를 보냈나 지금까지 한반도를 방문한 첫번째 서양인은 스페인의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인 1593년 12월 왜군을 따라 조선 땅을 밟았다. 그러나 이 기록이 수정될 운명에 놓였다. 바티칸 비밀문서 수장고에서 “1333년(충숙왕 복위2년) 로마 교황 요한 22세가 사절단을 고려에 파견한다”는 친서의 필사본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금속활자의 비밀들’의 제작팀과 세계종교평화협의회측이 각기 다른 경로로 확보한 라틴어 친서는 경천동지할 내용을 담고 있다. 바티칸 비밀수장고에 있었던 교황의 친서. 1333년 고려왕(충숙왕)에게 교황사절단을 파견하면서 보낸 친서다.|다큐멘터리 영화 ‘금속활자의 비밀들’ 우광훈 감독 제공 “존경하는 고려국왕께…”로 시작하는 서한은 “고려왕도 기독교..
홀연히 나타난 백제 무령왕, 그 분은 누구인가 숱한 이야깃거리를 남긴 무령왕릉 발굴로 수수께끼 같은 한국 고대사의 블랙박스가 열렸습니다. 108종 3000여 점에 이르는 유물이 쏟아졌습니다. 백제 25대 왕 무령왕은 그렇게 1450년 만에 현현했습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무령왕은 헌헌장부의 미남자였습니다. “이름은 사마 혹은 융이라 했으며 키가 8척이고 눈매가 그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 민심이 따랐다”는 것입니다. 무령왕이 즉위할 당시 백제는 존망의 위기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습니다. 한성백제 멸망 후 공주로 도읍지를 옮긴 지 불과 30년도 안된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무령왕은 불구대천의 원수국인 고구려와 어깨를 나란히 했고 왜와 신라 등과도 나름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무엇보다 중국 양나라에 국서를 보내 “이제 민심을 수습해서 다시 강국이 ..
얼음창고에 27개월간 안치된 백제왕비 1996년 여름, 공주 정지산 유적을 발굴 중이던 이한상(당시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사)은 몇가지 의문이 들었다. 해발 67m 구릉인 이 산의 정상부가 왜 이리 평탄할까. 약 800여 평이었는데 마치 학교운동장 같았다. 이런 가운데 유독 돌출돼있는 중심건물의 존재 또한 이상했다. 기와를 얹은 이 건물엔 적심도, 초석도 없었으며 무려 45개의 기둥들이 3열로 박혀있었다. 내부 공간이 거의 없을 정도였으니 이걸 건물이라고 세웠나, 무슨 조화인가. 정지산 유적의 건물터. 어름창고와 빈전의 흔적이 보인다. 무령왕비의 시신도 이곳에서 27개월동안 안치된 뒤 장례식을 치렀을 것이다. 이렇게 고민하던 이한상의 뇌리를 스친 게 있었으니 바로 무령왕릉 출토 지석과 매지권, 그리고 왕비의 묘지(墓誌)이었다. 이에 따르면 무령..
신라 경주엔 황금칠을 한 기와집이 있었다. 880년 9월9일 신라 헌강왕은 월상루에 올라 경주 시내를 바라보며 대신들에게 물었다. “지금 민간인들이 초가가 아닌 기와집을 짓고(覆屋以瓦不以茅) 나무 대신 숯으로 밥을 짓는다는게 사실이냐”. 대신들은 “백성들의 삶이 풍족해진 것은 모두 전하 덕분”이라 입을 모았다. 는 “경주부터 동해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이 죽 이어졌으며 초가가 하나도 없었고, 풍악과 노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는 “전성기 경주엔 황금을 입힌 저택(金入宅) 39채를 포함해서 17만8936호가 있었다”고 정확한 숫자까지 기록했다. 신라시대와 견줄 수 없지만 지금도 경주엔 1만2000채에 이르는 기와집(한옥)이 있다. 정부가 ‘고도(古都)이미지 찾기 사업’의 하나로 적극 장려한 덕분이다. 특히 황남동·인왕동·구황동·교동 등..
경주의 지하수위 상승과 지진 징후 일본에서는 ‘진흙속 메기가 준동하면 지진이 발생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92년 교토의 후시미에 성을 쌓을 때 “반드시 메기를 막을 대책을 세우라”는 특명을 내린 이유였다. 지진의 전조현상으로 운위되는 일본의 지진운. 솜사탕 같은 구름이 지진의 전조라는 이야기다. 이후 지진을 일으킨 메기에게 벌을 내리고, 무거운 돌로 짓누르는 조형물이나 그림이 쏟아졌다. 메기, 즉 동물의 이상행동을 지진의 전조 현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지진의 전조를 허투루 넘기지 않고 대지진의 참사를 막아낸 사례가 있다. 1975년 2월4일 중국에서 일어난 규모 7.3의 하이청(海城) 대지진이다. 중국 지진국이 동물이상행동 정보를 수집한 것이 주효했다. 즉 1974년 12월부터 겨울인데도 뱀이 도로에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