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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녀자 정치'를 욕보이지 마라 중국 역사를 쥐락펴락한 여인 둘을 꼽자면 바로 여태후(한나라)와 무측천(당나라·대주)이다. 여태후는 한고조 유방의 정부인이다. 한나라 창업의 공신인 한신과 경포, 팽월을 제거하고 통치의 초석을 마련한 여걸이다. 여태후의 계책에 말린 한신은 죽어가며 이렇게 말했다. “내 아녀자(여후)에게 속았구나. 이것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랴.(乃爲兒女子所詐 豈非天哉)” 당나라 고종과 무측천의 무덤인 건릉 ■사람돼지와 토사구팽 그러면서 한신은 그 유명한 토사구팽(兎死狗烹)의 고사를 남겼다. 물론 한고조는 한신의 도움으로 천하를 얻었다. 하지만 창업 이후, 한신처럼 빼어난 인물은 걸림돌일 뿐이었다. 여태후는 한나라를 위협할 수 있는 한신을 도모한 것이다. 창업공신인 경포와 팽월도 여태후의 계책에 목을 내놓고 말았다. 남..
'오방낭'을 위한 변명 우리 전통옷의 특징이 하나 있다. 호주머니가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 마고자에 달린 호주머니는 뭐냐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마고자는 임오군란의 배후로 지목돼 청나라에 유폐된 흥선대원군이 1885년 귀국하면서 입은 청나라 옷(마괘)에서 유래됐다. 이전엔 남녀노소가 별도의 주머니를 달고 다녔다. 주머니의 유래는 뿌리깊다. “신라 혜공왕(재위 765~780)은 어릴 때 비단주머니(錦囊)를 차고 여자아이처럼 놀았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천마총에서 출토된 황금허리띠에도 이런저런 장식품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고려 때도 허리띠에 갖가지 장식에 향이 든 비단주머니(錦香囊)을 찼는데, 많을수록 귀하게 여겼다.() 자연스레 옷과 장식품은 당대의 멋과 전통을 담은 패션이 된 것이다. 특히 색깔에 심오한 뜻을 새겼..
정유라의 말(言)과 말(馬) 1412년 칠성군 윤저가 태종이 주최한 연회에서 감히 임금을 향해 ‘후궁을 그만 들이라’고 쓴소리를 했다. 아무리 임금이 ‘과인의 잘잘못을 한번 고해보라’고 상을 차려준 자리였지만 ‘제발 여자 좀 작작 밝히라’는 직격탄을 날렸으니 분위기가 일순 싸해졌다. 그러나 태종은 “신하의 도리를 다했다”는 칭찬과 함께 임금의 애마, 즉 안장 얹은 말 한 필을 하사했다. 윤저는 손사래를 쳤지만 태종은 “사양 마라. 받았다가 내일 다른 사람에게 넘겨도 된다”고 권했다. 윤저는 한마디 직언의 대가로 ‘대통령 전용 승용차’를 선물로 받은 것이다. 심지어 ‘기분이다. 까짓것 되팔아도 좋다’는 허락까지 얻었으니…. 차가 없던 시절 말 한 필의 가치는 지금의 최고급 승용차에 비견될 수 있다. 왕·귀족들은 앞다퉈 좋은 말을 구해..
18세기 가왕(歌王) 밴드의 '나는 가수다' 경연 “당세의 가호(歌豪) 이세춘은 10년간 한양 사람들을 열광시켰지.(當世歌豪李世春 十年傾倒漢陽人) 기방을 드나드는 왈자들도 애창하며 넋이 나갔지.(靑樓俠少能傳唱 白首江湖解動神) 18세기 사람인 신광수(1712~1775)가 남긴 의 ‘증가자이응태(贈歌者李應泰)’라는 시의 구절이다. 무슨 내용인가. 신광수는 호걸가수 이세춘의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거듭했으며, 10년간이나 유흥업소에서 애창됐음을 전하고 있다. 신광수가 이 시를 지은 것이 1761~63년 사이였다. 따라서 이세춘은 1750~60년 사이 조선의 가왕(歌王)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단원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월야선유도’. 달밤에 대동강변에서 벌어지는 선상연회의 장면이다. 이세춘 그룹의 게릴라콘서트도 이같은 분위기에서 펼쳐졌을 것이다. ..
미인박명인가. 지광국사현묘탑의 팔자 미인박명인가. 지광국사현묘탑을 두고 하는 말이다. ‘미인’이란 우리나라 부도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라는 뜻이고, ‘박명’은 그만큼 탑의 팔자가 기구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절이 완전히 불타는 수모를 묵묵히 지켜보았을 탑은 한일합병 직후인 1912년 산산이 분해 되어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돌아온다. 그런데 연구자 이순우가 발굴공개한 자료, 즉 후지무라 토쿠이치라는 일본인이 쓴 ‘현묘탑 강탈시말’이라는 글을 보면 90년간 베일에 쌓였던 현묘탑 반출의 이력이 낱낱이 드러난다.(이순우의 ·하늘재) 경복궁 내에 서있는 지광국사현묘탑. 지금 해체 복원작업 중이다. 이 글은 후지무라가 편찬한 ‘거류민지석물어(居留民之昔物語·1927년간)’에 들어있다. 그가 밝힌 전말은 이렇다.1911년 9월쯤 모리라는 인물이 ..
지광국사는 왜 원주에 왕찰을 지었나 “금년(1609년) 가을 휴가를 얻어 와서 얼마동안 있었다. 마침 지관(智觀)스님이 찾아와 ‘기축년(1589년)에 법천사에서 1년 주석했다’고 했다. 그 말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스님과 함께 길을 나섰다. ~난리(임진왜란)에 불타서 무너진 주춧돌과 함께 절터의 흔적이 토끼와 사슴이 다니는 길에 남아 있었다.” 풍운아 허균(1569~1618)은 ‘유원주법천사기(遊原州法泉寺記)’에서 원주 법천사를 둘러본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허균의 기록 덕분에 이로써 법천사는 1589년까지 존속하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됐으며 1609년에는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법천사는 이후 중창됐다는 기록이 없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처량한 신세를 면치 못한다. 그저 남아 있는 지광국사현묘탑이나 당간지주, 그리고 사찰에 사용되..
녹두장군 전봉준, 그 최후의 순간 1894년 11월 동학농민군 2차 봉기에 나섰다가 패한 전봉준 장군(1855~1895)은 전북 순창군 상치면 피노리에 이르렀다. 동지인 김개남 장군이 은신해 있다는 태인으로 가는 도중에 옛 친구인 김경천을 만나러 간 것이었다. 김경천은 원래 전봉준의 부하였다가 농민군이 대패한 이후 피노리에 피신중이었다. 당시 조정은 전봉준의 목에 현상금을 걸어놓고 있었다. 원하면 군수 자리까지 준다는 매혹적인 조건이었다. 천금의 현상금에 눈이 먼 김경천은 이웃인 한신현에게 밀고했다. 한신현은 김영철·정창욱 등 마을 사람들과 전봉준이 쉬고 있던 주막을 포위했다. 전봉준이 위기를 감지하고 담을 넘어 도망가려 했지만 젊은이들(혹은 관군)이 내리친 몽둥이에 맞아 체포됐다. 김경천의 배신과 관련해서는 여러 후일담이 있다. 하나의..
핫도그에 개고기 있었을까 "음식에 개라니…. 안될 말이다.” 이슬람 국가인 말레이시아가 ‘핫도그(hotdog)’ 이름을 ‘핫소시지’로 바꿀 것 같다. 이슬람 문화권은 (犬)를 부정한 동물로 여긴다. 말레이시아 이슬람개발부는 “도그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음식메뉴는 ‘할랄(이슬람 음식)’ 인증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하기야 이상하기는 하다. 언제, 어디서부터 소시지를 끼워 먹는 빵 음식을 ‘핫도그’라 했을까. 설이 난무하다보니 딱 이거다 할 주장을 찾기 어렵다. 다만 1600년대 말 독일 바이에른주 코르부크의 정육업자인 요한 게오르그 라너가 독일산 개인 ‘닥스훈트’를 닮은 소시지를 만들었다는 설이 그나마 그럴 듯 하다. 허리가 길고 다리가 짧은 독일개와 비슷한 소시지라는 의미에서 ‘닥스훈트 소시지’ 혹은 ‘작은 개 소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