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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발굴, 고대사의 블랙박스를 열었지만… 1971년 7월 공주에서는 한국 고고학사에 길이남을 발굴이 있었습니다. 공주 무령왕릉 발굴이었습니다. 배수로 공사중 우연히 현현한 무령왕은 '내가 무덤의 주인공'임을 선언하고 나선 첫번째 임금이었습니다. 특히 무덤벽이 완전히 밀봉된채 발견되었기 때문에 도굴의 화를 입지않았다는 점에서도 엄청난 화제를 뿌렸습니다. 무덤벽을 메웠던 벽돌을 들어내자 '1500년동안 밀폐된 공간의 기운'이 바깥 공기와 만나 '쏴아아' 하는 소리를 냈습니다. 무덤에는 '사마왕(무령왕)이 62세를 일기로 돌아가셔서 이 자리에 묻혔다'는 내용을 담은 지석이 확인됐습니다. 그러나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습니다 이 발굴은 고고학 발굴사에 길이남을 흑역사였기 때문입니다. 하루밤에 유물 수습을 끝내고, 빗질까지 해서 말끔히 정리해버린, 아 이..
진시황릉 왜 발굴을 포기했나 “무덤조성에 죄인 70만명을 동원했다. 구리물을 부어 틈새를 메워 외관을 놓았다. 모형으로 만든 궁궐과 백관, 그리고 온갖 기기묘묘한 형상의 물건들을 설치했다. 자동발사되는 활을 장치했고, 수은을 주입하여 강과 바다를 조성했다. 풀과 나무를 심은 묘지는 마치 산과 같았다.”( ‘진시황 본기’) 기원전 246년 등극한 진시황은 불멸을 꿈꾸며 37년 동안 자신의 무덤을 조성했다. 시황제의 뒤를 이은 진2세는 아버지의 장례가 끝난 뒤 무덤문을 닫아버렸다. 1974년 여름, 우물을 파려던 농부들에게 발견된 병마용 군단.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이를 두고 세계 8대 불가사의라 극찬했다. 무덤의 구조를 알고 있던 노예들과 기술자들의 비밀누설이 두려워 모조리 질식사시킨 것이다. 이후 진시황릉 관련 기록들은 처..
황금보검의 주인공은 금수저가 아니었다 1973년 경주 계림로에서 발굴된 무덤(계림로 14호분)은 희한했습니다. 적석목곽분치고는 상당히 작았는데, 그 안에 성인 남자 두 명이 누워있던 흔적이 있었습니다. 오른쪽 남자는 대도를 찬 흔적이 있었는데, 왼쪽 남자가 달고 있던 유물이 군계일학이었습니다. 길이 36㎝에 불과했지만 눈부신 황금보검이었습니다. 분명 신라 고유의 제품은 아니었습니다. 1928년 옛 소련 카자흐스탄 보로보에에서 확인된 검의 파편과 비슷했습니다. 이밖에도 비슷한 양식의 벽화 그림들이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깁니다. 무덤의 주인공은 왜 외국산 황금보검을 차고 있었을까요. 서역인이 이역만리 신라의 수도 경주에 묻힌 것일까요. 아니면 신라인일까요. 신라인이라면 당시로서는 해외명품이었던 황금보검을 찰만큼 금..
훈족-흉노-신라가 황금보검의 계보인가 1973년 경주 계림로에서 발굴된 무덤(계림로 14호분)은 희한했습니다. 적석목곽분치고는 상당히 작았는데, 그 안에 성인 남자 두 명이 누워있던 흔적이 있었습니다. 오른쪽 남자는 대도를 찬 흔적이 있었는데, 왼쪽 남자가 달고 있던 유물이 군계일학이었습니다. 길이 36㎝에 불과했지만 눈부신 황금보검이었습니다. 분명 신라 고유의 제품은 아니었습니다. 1928년 옛 소련 카자흐스탄 보로보에에서 확인된 검의 파편과 비슷했습니다. 이밖에도 비슷한 양식의 벽화 그림들이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깁니다. 무덤의 주인공은 왜 외국산 황금보검을 차고 있었을까요. 서역인이 이역만리 신라의 수도 경주에 묻힌 것일까요. 아니면 신라인일까요. 신라인이라면 당시로서는 해외명품이었던 황금보검을 찰만큼 금..
'밀정' 속 독립투사 김시현의 이승만 암살미수 사건 2015년 5월 최근 매우 흥미로운 사진 한 장이 공개됐다. 미국 뉴저지에 사는 수집가(김태진 국제지도수집가협회 한국대표)가 미군 첩보부대(CIC)의 사진첩에 수록된 사진을 언론에 배포한 것이다. 1952년 6월25일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일어난 이승만 대통령 암살시도 장면을 포착한 찰나 사진이다. 6·25 2주기 행사에서 연설 중이던 대통령의 바로 뒤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권총을 겨누기 직전의 극적인 순간이 담겨 있다. 범인은 일제강점기 때 의열단원으로 활약했던 독립투사 출신의 호호백발 노인 유시태(당시 62)였다. 하지만 이 저격사건은 미수에 그쳤다. 유 노인이 방아쇠를 당겼지만 발사되지 않은 것이다. 63년 만에 공개된 사진과 관련된 뉴스는 이렇게 과거의 가십거리 쯤으로 거론된 뒤 마무리됐다. 의열..
'박애주의자' 묵자는 왜 독가스를 발명했을까. 중국이 최근 발사한 양자위성에 모쯔, 즉 묵자(墨子)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묵자는 바로 겸애론을 주장한 춘추전국시대 사상가입니다. 좀 뜬금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국은 왜 인공위성 이름에 공자·노자와 어깨를 나란히 한 철학·사상가의 이름을 붙였을까요. 그런데 이유가 있었습니다. 묵자는 철학·사상가이기도 했지만 불세출의 과학자이면서 무기개발자이기도 했습니다. 묵자는 기하학·역학·광학·수학에서 뛰어난 이론을 전개했으며, 그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무기를 여럿 개발했습니다. 역사상 최초로 독가스를 전쟁에 사용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묵자가 누구입니까. 나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라고 외쳤던 겸애론자 아닙니까. 평화와 사랑을 부르짖으면서 독가스를 만들고, 그 외에 다른 신형무기까지 개발했다니요...
몰락한 '우생순 신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2008년 8월 어느 날이었다. 헝가리와 치른 베이징 올림픽 여자핸드볼 3~4위 결정전을, 그것도 녹화중계로 보던 필자는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마침 곁에 아무도 없었으니까 망정이지 남우세스러울뻔 했다. 종료 1분을 남기고 33-28로 승리가 확정적이었을 때였다. 임영철 감독이 작전타임을 불렀다. “너희들 내가 왜 교체하는 줄 알지.” 1995년 헝가리-오스트리아 세계선수권대회 결승에서 헝가리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 여자핸드볼 선수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당시 한국은 러시아 독일 헝가리 덴마크 헝가리 등을 연파하고 8전승 우승의 신화를 이뤘다. 그러면서 오성옥·오영란·홍정호 등 30대 선수들을 대거 투입했다. 동메달 획득의 순간을 노장 선수들에게 양보하고자 한 것이다. 감독이 이해를 구하자 그때까..
'우생순' 신화는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기사는 1995년 헝가리와 오스트리아가 공동주최한 세계여자핸드볼 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제가 쓴 기사입니다. 한국선수들이 8전승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혹독한 훈련을 거쳤는지를 보여주는 기사입니다. 이듬해 열린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한국팀은 덴마크에 아깝게 져 은매달을 땄습니다.) 여자핸드볼이 세계최강의 전력을 갖추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강훈련의 연속, 사제 간의 강한 믿음이 있었기에 세계선수권대회 사상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11월 중순 태릉 선수촌 체력단련장, 임오경은 악에 바쳤다. 45도로 기울어진 ‘시트업’에 거꾸로 누워 윗몸 일으키기를 해야 했다. 하지만 남자의 억센 두손이 위에서 임의 양어깨를 부여잡았다. 정형균 감독은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