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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동에 왜 고구려 최전방 초소가 있었나 ‘한강을 확보하라.’ 예나 지금이나 한강은 번영의 상징이 틀림없다. 고대사를 살펴봐도 그렇다. 한성백제(BC 18~AD 475년)의 굳건한 500년 도읍지가 바로 한강이었다. 고구려는 장수왕 때 백제의 한강을 빼앗으며(475~551년) 최절정기를 이뤘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자는 신라였다. 고구려·백제로부터 한강을 확보한 신라는 3국통일의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지금도 2,000년의 역사를 넉넉한 품으로 가득 담고 묵묵히 흐르는 한강. 한성백제의 수도인 풍납토성과 강 건너 아차산, 그리고 지금은 아파트 숲으로 변해버린 구의동은 5~6세기대 한강을 둘러싼 그 피비린내 나는 3국 전쟁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구의동 구릉에서 노출된 고구려 최전방 초소. 지금은 아파트 촌으로 변모해있다. ◇개발의 지도에서 외로..
이성계의 불온한 대권출정식 지금부터 80여 년 전 금강산 월출봉에서 희한한 유물 세트가 발견됩니다. 태조 이성계와 두번째 부인 강씨의 이름을 새긴 사리장엄구였습니다. 즉 이성계가 불사리를 봉안한 의식이 1391년 5월 이곳 금강산에서 벌어졌음을 알린 유물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의식에 1만 여 명의 지지자가 따라나섰다는 것입니다. 1391년 5월이면 조선이 개국하기 1년 2개월 전입니다. 이성계는 왜, 그것도 금강산에서 불사리를 모시는 성대한 의식을 치렀을까요. 더욱이 사리기를 보면 ‘미륵의 하생을 기다린다’고 했답니다. 이성계가 기다린 미륵의 하생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요. 또하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조강지처가 시퍼렇게 살아있었던 때, 이성계는 왜 두번째 부인인 강씨만 데리고 금강산에 올랐을까요. 금강산에서 발..
이성계가 조강지처 홀대한 까닭 “…수문하시중 이성계(守門下侍中 李成桂) 삼한국대부인 강씨(三韓國大夫人 康氏)….” 1932년 10월 금강산 월출봉에서 우연히 이성계 사리함에서 보이는 명문 내용이다. 이성계와 이성계의 부인인 강씨가 사리장엄구 봉안 불사를 주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두 사람이 사리함을 봉안했던 1391년 5월이면 이성계의 첫번째 부인인 한씨(신의왕후)가 시퍼렇게 살아있었던 때였다. 그렇다면 조강지처인 한씨는 팽개치고 두번째 부인인 강씨(신덕왕후)만 명문에 새긴 이유는 뭘까. 이성계와 부인 강씨(신덕왕후)는 '미륵의 하생'을 기다리며 1만명과 함께 불사리를 봉안하는 의식을 치렀다. 금강산에서 펼쳐진 의식에 첫번째 부인인 한씨(신의왕후)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당시 병중이던 한씨는 4개월만에 승하했다...
'만능 뮤지션' 공자의 음악 철학 옛 사람들은 악기 하나, 노래 하나에도 심원한 뜻을 새겼다. 삼국사기 잡지 ‘악(樂)’편에서 현금(玄琴·거문고)을 설명한 내용을 보자. “금의 길이 석자 여섯 치 여섯 푼은 366일을 상징하는 것이고, 너비 여섯 치는 천지와 사방을 뜻하며 위가 둥글고 아래가 네모난 것은 하늘과 땅을 본받은 것이다.” 가야금도 마찬가지. “가야금은 중국 악부의 쟁(箏)을 본떠 만들었는데, 열두 줄은 사시(四時), 기둥의 높이 3촌은 삼재(三才), 즉 天·地·人을 뜻하는 것이다.” 가야국 악사인 우륵이 가실왕의 명을 받아 12곡을 지었다. 그 후 우륵은 가야가 어지럽게 되자 신라(진흥왕)에 투항했다. 광주 신창동에서 출토된 현악기를 복원한 모습. 진흥왕은 주지·계고·만덕을 보내 우륵의 업을 전수받게 했다. 그런데 세 사람이..
압구정엔 갈매기가 없다 누정(樓亭)은 예부터 서민의 공간이 아니었다. 2000년 전의 역사서인 를 보면 “황제가 신선들이 좋아하는 오성십이루(五城十二樓)를 짓고 기다렸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 동성왕과 무왕은 궁성에 못을 파고 누각을 세워 기이한 짐승을 기르고, 군신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도 있다. 궁중의 휴식공간이던 이같은 누정은 후대에는 음풍농월하던 사대부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가장 유명한 정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압구정일 것이다. 지금도 ‘부티’나는 동네의 상징으로 운위되고 있으니 말이다. 압구정(狎鷗亭)은 송나라의 어진 재상 한기의 서재 이름에서 땄다. 명나라 예겸(1415~1479)이 중국을 방문한 한명회에게 붙여주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압구정. 훗날 3000냥을 들여 꾸민 것을 그렸다.|간송미술관 소장 “기심(機..
보일듯이 보이지 않던 따오기의 울음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 따옥 따옥 소리 처량한 소리….’ 192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한정동의 동시 ‘따오기’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읊었다. 일본에서 발견된 새라서 ‘니포니아 니폰(Nipponia nippon)’이라는 학명이 붙었다. 훗날 동요로 거듭난 ‘따오기’가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애환을 표현한 노래로 금지곡이 됐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1960~70년대엔 ‘보일듯 보이지 않는…’의 가사 때문에 ‘미니스커트’의 다른 말로 전용되기도 했다. 몸길이가 70㎝에 이르는 따오기는 ‘황새의 재판’ 설화에서 뇌물공여자로 등장한다. 꾀꼬리·뻐꾸기와 목소리 소송을 벌이던 따오기는 ‘재판관’ 황새를 찾아가 개구리를 바쳤다. 뇌물공세는 주효했다. 재판관 황새는 곱디고운 꾀꼬리·뻐꾸기의..
'18년 기러기 아빠' 다산의 꾸지람 '하피첩'이라는 보물이 있습니다. 지난 2004년 폐지 할머니의 수레에서 우연히 발견된 유물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편지입니다. 유배생활중인 다산은 아내 홍씨가 보내온 다홍치마를 재단해서 두 아들에게 전하는 편지 4책과 외동딸에게 주는 매조도 그림을 그려 보냈습니다. 딸에게 준 매조도(매화병제도)는 고려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었지만 아둘 둘에게 보냈다는 편지 4첩은 기록으로만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폐지 할머니의 수레에서 4책 중 3책이 극적으로 발견된 것입니다. 다산은 이 책을 이라 했습니다. 붉은 다홍치마에 쓴 편지라는 뜻입니다. 다산이 이 편지 글에서 전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책에서는 그래도 정제된 말씨를 쓰지만 다른 편지글에서는 두 아들을 사정없이 꾸짖는 내용도 심심찮게 있습..
교황은 왜 고려국왕에게 친서를 보냈나 지금까지 한반도를 방문한 첫번째 서양인은 스페인의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인 1593년 12월 왜군을 따라 조선 땅을 밟았다. 그러나 이 기록이 수정될 운명에 놓였다. 바티칸 비밀문서 수장고에서 “1333년(충숙왕 복위2년) 로마 교황 요한 22세가 사절단을 고려에 파견한다”는 친서의 필사본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금속활자의 비밀들’의 제작팀과 세계종교평화협의회측이 각기 다른 경로로 확보한 라틴어 친서는 경천동지할 내용을 담고 있다. 바티칸 비밀수장고에 있었던 교황의 친서. 1333년 고려왕(충숙왕)에게 교황사절단을 파견하면서 보낸 친서다.|다큐멘터리 영화 ‘금속활자의 비밀들’ 우광훈 감독 제공 “존경하는 고려국왕께…”로 시작하는 서한은 “고려왕도 기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