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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대통령과 '참새' 시민 32년 고구려 대무신왕은 부여군의 반격에 고전하다가 수렁에 빠졌다. 그러자 대무신왕은 허수아비 부대를 진열해놓고는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다. 364년 신라 내물왕은 왜병의 공격에 맞서 허수아비 수천개를 토함산에 세워놓고 용맹한 군사 1000명을 매복시켰다. 깜빡 속은 왜병은 신라 매복병에 말려 전멸당하고 말았다. 또 있다. 당나라의 작은 마을 현령 장순은 난을 일으킨 안록산 부대와 60일이나 맞서 싸웠으나 화살이 바닥났다. 장순은 꾀를 냈다. 홍성담 작가의 박대통령 풍자그림 ‘세월오월’. 대통령을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종에 따라 움직이는 허수아비로 그렸다.|연합뉴스 야음을 틈타 볏짚으로 만든 허수아비 1000개를 내려보냈다. 적의 공격인줄 착각한 안록산 부대는 화살 수십만개를 쏘았다..
앙드레 김 '김봉남'과 차은택 '민머리' ‘(앙)뇽하세요. (드)자이너에요. (레)이름은요. (김)봉남이에요.’ 한때 유행했던 ‘앙드레김’ 소재의 4행시다. 이 4행시의 유래를 알면 좀 씁쓸하다. 1999년 8월 24일 옷로비 사건을 다룬 국회청문회장에 색조 화장에 하얀 재킷을 입고 출석한 이가 있었다. 디자이너 앙드레 김씨였다. 김씨는 증인선서에서 ‘주민번호 350824…이름 앙드레김’이라 했다. 목요상 국회 법사위원장이 ‘예명 말고 본명을 대라’고 닥달했다. 그러자 앙드레 김씨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김봉남’이라 답했다. 세련미의 극치를 자랑한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나이가 벌써 64살이고, 본명 또한 그렇게 토속적이라니…. 방청석은 웃음바다로 변했고, ‘앙드레 김’은 아무 잘못도 없이 ‘김봉남’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놀림감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도 '넘버 3' 진성여왕은 자진 하야했다. 897년 신라 진성여왕이 하야를 선언합니다. 국정 파탄의 책임을 “과인이 부덕한 탓”이라고 돌리고 깨끗히 물러납니다. 여왕에게 아들이 2명 이상 있었지만 오빠의 서자(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줍니다. 진성여왕은 왜 자신사퇴, 즉 하야의 길을 선택했을까요. 진성여왕 시대의 신라에는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왜 서라벌 번화가에 ‘여왕이여~ 당신 측근들의 국정농단 때문에 곧 망할 것’이라는 벽보가 붙었을까요. 진성여왕은 역사가 김부식의 평가처럼 음란하고, 게다가 측근정치에 휘말려 나라를 망국의 길로 접어들게 만든 혼군이었을까요. 표면적인 기록을 보면 마냥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한 평가를 내려서는 안됩니다. 그래도 진성여왕은 모든 책임을 지고 깨끗히 자리에서 물러났으니까요. ..
‘넘버 3’ 황제와 ‘구천구백세’ 실세 1624년(인조 1년) 반정 이후 새 임금(인조)의 즉위를 중국 조정에 고하고 귀국한 홍익한(1586~1637)은 매우 의미심장한 명나라 소식을 전한다. “글쎄, 중국 명나라에서 지금 천하의 권세를 가진 첫번째는 태감 위충현이고, 둘째는 객씨이고, 셋째가 황제(희종)이라 합니다.”() 지금 명나라의 권력서열을 따지면 ‘넘버 1’은 환관 위충현, ‘넘버 2’는 황제의 유모(객씨)이며, 만백성의 어버이여야 할 황제는 ‘넘버 3’라는 이야기가 퍼졌다는 것이다. 황제는 1620년 부왕인 광종이 즉위 29일만에 급서하자 16살의 나이에 아무런 준비없이 황위에 올랐다. 목공일에 빠져 모든 정사를 환관 위충현과 유모 객씨에게 넘겼다. 청나라 시대 환관. 황제의 측근에서 종종 실권을 휘둘렀다. 그 같은 위충현과 객씨의..
'아녀자 정치'를 욕보이지 마라 중국 역사를 쥐락펴락한 여인 둘을 꼽자면 바로 여태후(한나라)와 무측천(당나라·대주)이다. 여태후는 한고조 유방의 정부인이다. 한나라 창업의 공신인 한신과 경포, 팽월을 제거하고 통치의 초석을 마련한 여걸이다. 여태후의 계책에 말린 한신은 죽어가며 이렇게 말했다. “내 아녀자(여후)에게 속았구나. 이것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랴.(乃爲兒女子所詐 豈非天哉)” 당나라 고종과 무측천의 무덤인 건릉 ■사람돼지와 토사구팽 그러면서 한신은 그 유명한 토사구팽(兎死狗烹)의 고사를 남겼다. 물론 한고조는 한신의 도움으로 천하를 얻었다. 하지만 창업 이후, 한신처럼 빼어난 인물은 걸림돌일 뿐이었다. 여태후는 한나라를 위협할 수 있는 한신을 도모한 것이다. 창업공신인 경포와 팽월도 여태후의 계책에 목을 내놓고 말았다. 남..
'오방낭'을 위한 변명 우리 전통옷의 특징이 하나 있다. 호주머니가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 마고자에 달린 호주머니는 뭐냐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마고자는 임오군란의 배후로 지목돼 청나라에 유폐된 흥선대원군이 1885년 귀국하면서 입은 청나라 옷(마괘)에서 유래됐다. 이전엔 남녀노소가 별도의 주머니를 달고 다녔다. 주머니의 유래는 뿌리깊다. “신라 혜공왕(재위 765~780)은 어릴 때 비단주머니(錦囊)를 차고 여자아이처럼 놀았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천마총에서 출토된 황금허리띠에도 이런저런 장식품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고려 때도 허리띠에 갖가지 장식에 향이 든 비단주머니(錦香囊)을 찼는데, 많을수록 귀하게 여겼다.() 자연스레 옷과 장식품은 당대의 멋과 전통을 담은 패션이 된 것이다. 특히 색깔에 심오한 뜻을 새겼..
정유라의 말(言)과 말(馬) 1412년 칠성군 윤저가 태종이 주최한 연회에서 감히 임금을 향해 ‘후궁을 그만 들이라’고 쓴소리를 했다. 아무리 임금이 ‘과인의 잘잘못을 한번 고해보라’고 상을 차려준 자리였지만 ‘제발 여자 좀 작작 밝히라’는 직격탄을 날렸으니 분위기가 일순 싸해졌다. 그러나 태종은 “신하의 도리를 다했다”는 칭찬과 함께 임금의 애마, 즉 안장 얹은 말 한 필을 하사했다. 윤저는 손사래를 쳤지만 태종은 “사양 마라. 받았다가 내일 다른 사람에게 넘겨도 된다”고 권했다. 윤저는 한마디 직언의 대가로 ‘대통령 전용 승용차’를 선물로 받은 것이다. 심지어 ‘기분이다. 까짓것 되팔아도 좋다’는 허락까지 얻었으니…. 차가 없던 시절 말 한 필의 가치는 지금의 최고급 승용차에 비견될 수 있다. 왕·귀족들은 앞다퉈 좋은 말을 구해..
18세기 가왕(歌王) 밴드의 '나는 가수다' 경연 “당세의 가호(歌豪) 이세춘은 10년간 한양 사람들을 열광시켰지.(當世歌豪李世春 十年傾倒漢陽人) 기방을 드나드는 왈자들도 애창하며 넋이 나갔지.(靑樓俠少能傳唱 白首江湖解動神) 18세기 사람인 신광수(1712~1775)가 남긴 의 ‘증가자이응태(贈歌者李應泰)’라는 시의 구절이다. 무슨 내용인가. 신광수는 호걸가수 이세춘의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거듭했으며, 10년간이나 유흥업소에서 애창됐음을 전하고 있다. 신광수가 이 시를 지은 것이 1761~63년 사이였다. 따라서 이세춘은 1750~60년 사이 조선의 가왕(歌王)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단원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월야선유도’. 달밤에 대동강변에서 벌어지는 선상연회의 장면이다. 이세춘 그룹의 게릴라콘서트도 이같은 분위기에서 펼쳐졌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