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

(1360)
원숭이 돌도끼와 사람의 돌도끼는 같다? 땅속에서 출토된 돌도끼는 예부터 하늘의 신물(神物)로 여겨졌다. 번개와 벼락신인 뇌공이 내려준 뇌부(雷斧)라 해서 신성시했다. 갈아 먹으면 말끔히 낫는다는 믿음 때문인지 임질(요로결석?)을 앓던 조선 세종 임금을 위해 돌도끼를 찾아 바쳤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카푸친 원숭이가 돌도끼를 만드는 모습 "임질을 앓은 사람들은 ‘이 병은 비록 나았다가도 발작한다’고 한다.” “찌르고 아픈 증세가 즉시 발작하곤 한다.”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 더욱 심하다.”(
진시황 시대 '개그콘서트'와 김제동 요즘의 개그맨이나 예능인이라 할만한 사람들이 2500~2600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사마천 같은 역사가는 그런 이들을 골계가라 했습니다. 음악에 능하고, 우스갯소리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골계가들은 군주의 곁에 머물며 군주의 귀를 즐겁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역할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군주가 잘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신랄한 풍자와 멋들어진 해학으로 군주를 올바른 길로 이끌었습니다. 직접적인 말이 아니었습니다. 은유법과 반어법을 섞어가며 절묘한 말솜씨로 군주의 그릇된 마음을 되돌려놓았습니다. 요즘으로 친다면 풍자개그였던 셈이죠. 심지어 우전이라는 골계가는 천하의 폭군이라는 진시황 앞에서 스스로 직접 ‘짠’ 개그로 멋들어진 ‘개그콘서트’를 선보였습니다. 호위군사들을 위한 개그코너였습니다. 최근 ..
개그맨도 역사서의 주인공이다. 요즘의 개그맨이나 예능인이라 할만한 사람들이 2500~2600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사마천 같은 역사가는 그런 이들을 골계가라 했습니다. 음악에 능하고, 우스갯소리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골계가들은 군주의 곁에 머물며 군주의 귀를 즐겁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역할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군주가 잘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신랄한 풍자와 멋들어진 해학으로 군주를 올바른 길로 이끌었습니다. 직접적인 말이 아니었습니다. 은유법과 반어법을 섞어가며 절묘한 말솜씨로 군주의 그릇된 마음을 되돌려놓았습니다. 요즘으로 친다면 풍자개그였던 셈이죠. 심지어 우전이라는 골계가는 천하의 폭군이라는 진시황 앞에서 스스로 직접 ‘짠’ 개그로 멋들어진 ‘개그콘서트’를 선보였습니다. 호위군사들을 위한 개그코너였습니다. 최근 ..
히틀러 생가와 중앙청 철거 ‘평화, 자유, 민주주의를 위해. 파시즘은 절대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숨져간 수백만이 일깨워준다.’ 오스트리아의 국경도시인 브라우나우 암 인의 잘츠브르거 포르슈타트 15번가에 기념비가 하나 서있다. 아돌프 히틀러의 생가(사진)임을 알려주는 비석이다. 1889년 4월 세관원이던 아버지(알로이스 히틀러)가 게스트 하우스였던 3층짜리 노란색 건물의 방을 빌렸다. 이곳에서 히틀러를 낳았다. 비록 어린 히틀러가 불과 3년 살았을 뿐이지만 히틀러 생가로 유명해졌다. 나치시대 히틀러가 태어난 방은 성지가 됐고, 아돌프 히틀러 거리와, 아돌프 히틀러 광장까지 생겼다. 1938년 히틀러의 개인비서 마틴 보르만은 이 집을 사들여 공공도서관으로 꾸몄다. 미군은 2차대전 막바지 독일군에 의해 파괴될 뻔 했던 생가를 지켰다..
구의동에 왜 고구려 최전방 초소가 있었나 ‘한강을 확보하라.’ 예나 지금이나 한강은 번영의 상징이 틀림없다. 고대사를 살펴봐도 그렇다. 한성백제(BC 18~AD 475년)의 굳건한 500년 도읍지가 바로 한강이었다. 고구려는 장수왕 때 백제의 한강을 빼앗으며(475~551년) 최절정기를 이뤘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자는 신라였다. 고구려·백제로부터 한강을 확보한 신라는 3국통일의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지금도 2,000년의 역사를 넉넉한 품으로 가득 담고 묵묵히 흐르는 한강. 한성백제의 수도인 풍납토성과 강 건너 아차산, 그리고 지금은 아파트 숲으로 변해버린 구의동은 5~6세기대 한강을 둘러싼 그 피비린내 나는 3국 전쟁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구의동 구릉에서 노출된 고구려 최전방 초소. 지금은 아파트 촌으로 변모해있다. ◇개발의 지도에서 외로..
이성계의 불온한 대권출정식 지금부터 80여 년 전 금강산 월출봉에서 희한한 유물 세트가 발견됩니다. 태조 이성계와 두번째 부인 강씨의 이름을 새긴 사리장엄구였습니다. 즉 이성계가 불사리를 봉안한 의식이 1391년 5월 이곳 금강산에서 벌어졌음을 알린 유물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의식에 1만 여 명의 지지자가 따라나섰다는 것입니다. 1391년 5월이면 조선이 개국하기 1년 2개월 전입니다. 이성계는 왜, 그것도 금강산에서 불사리를 모시는 성대한 의식을 치렀을까요. 더욱이 사리기를 보면 ‘미륵의 하생을 기다린다’고 했답니다. 이성계가 기다린 미륵의 하생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요. 또하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조강지처가 시퍼렇게 살아있었던 때, 이성계는 왜 두번째 부인인 강씨만 데리고 금강산에 올랐을까요. 금강산에서 발..
이성계가 조강지처 홀대한 까닭 “…수문하시중 이성계(守門下侍中 李成桂) 삼한국대부인 강씨(三韓國大夫人 康氏)….” 1932년 10월 금강산 월출봉에서 우연히 이성계 사리함에서 보이는 명문 내용이다. 이성계와 이성계의 부인인 강씨가 사리장엄구 봉안 불사를 주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두 사람이 사리함을 봉안했던 1391년 5월이면 이성계의 첫번째 부인인 한씨(신의왕후)가 시퍼렇게 살아있었던 때였다. 그렇다면 조강지처인 한씨는 팽개치고 두번째 부인인 강씨(신덕왕후)만 명문에 새긴 이유는 뭘까. 이성계와 부인 강씨(신덕왕후)는 '미륵의 하생'을 기다리며 1만명과 함께 불사리를 봉안하는 의식을 치렀다. 금강산에서 펼쳐진 의식에 첫번째 부인인 한씨(신의왕후)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당시 병중이던 한씨는 4개월만에 승하했다...
'만능 뮤지션' 공자의 음악 철학 옛 사람들은 악기 하나, 노래 하나에도 심원한 뜻을 새겼다. 삼국사기 잡지 ‘악(樂)’편에서 현금(玄琴·거문고)을 설명한 내용을 보자. “금의 길이 석자 여섯 치 여섯 푼은 366일을 상징하는 것이고, 너비 여섯 치는 천지와 사방을 뜻하며 위가 둥글고 아래가 네모난 것은 하늘과 땅을 본받은 것이다.” 가야금도 마찬가지. “가야금은 중국 악부의 쟁(箏)을 본떠 만들었는데, 열두 줄은 사시(四時), 기둥의 높이 3촌은 삼재(三才), 즉 天·地·人을 뜻하는 것이다.” 가야국 악사인 우륵이 가실왕의 명을 받아 12곡을 지었다. 그 후 우륵은 가야가 어지럽게 되자 신라(진흥왕)에 투항했다. 광주 신창동에서 출토된 현악기를 복원한 모습. 진흥왕은 주지·계고·만덕을 보내 우륵의 업을 전수받게 했다. 그런데 세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