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372) 썸네일형 리스트형 죽음의 섬이 된 '레즈비언' 섬 “제발 레스보스 섬 주민들에게만 ‘레즈비언’이라는 말을 쓰게 해달라.” 2008년 에게해의 레스보스(Lesbos) 섬주민들이 그리스의 동성애 단체인 레즈비언 협회를 상대로 ‘레즈비언’ 단어의 사용 금지 소송을 제기했다. 레스보스 주민을 뜻하는 ‘레즈비언(Lesbian)’ 용어를 동성애자들에게 빼앗겨 정신적·도덕적인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소송은 아테네 법원에 의해 기각됐다. 영국의 더타임스도 이 사건을 그해 ‘세계 10대 황당·엽기 소송’에 등재했다. 주민들 스스로를 ‘난 레즈비언입니다’라 소개해야 했던 게 불편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동성애자를 지칭하는 유럽행 난민들의 첫 기착지인 그리스 레스보스 섬을 출발해 아테네 피레우스 항구로 향하는 배 위에서 한 소년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해를 지켜보고.. '코드 애덤' 사건을 아십니까 1981년 7월 27일 6살 꼬마 애덤 월시(사진)는 엄마를 따라 미국 플로리다 주 헐리우드의 시어스 백화점을 찾았다. 꼬마는 엄마가 계산하는 사이 비디오 게임방에서 놀고 있었다. 마침 비디오게임방에서 다툼이 벌어졌고 보안요원은 그 안에 있던 아이들을 모두 내보냈다. 다른 아이들과 함께 엉겁결에 게임방을 나온 애덤이 실종되기까지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창졸 간에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가 애타게 찾았지만 소용 없었다. 사건발생 14일 후인 8월10일 백화점에서 190㎞나 떨어진 수로에서 심하게 훼손된 꼬마의 시신이 발견됐다. 유력한 용의자는 오티스 툴이라는 인물이었다. 그의 캐딜락 승용차에서 피묻은 카펫 등을 발견했다. 그러나 경찰은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다. 카펫은 물론 승용차까지 잃어버린 것이다. 19.. 소동파는 왜 고려를 증오한 '혐한파'가 되었을까 소동파를 아십니까. 북송시대의 대문호입니다. 당대 고려에서는 소동파 열풍에 휩싸였습니다. 고려의 문호 이규보는 '소동파의 문장은 금은보화가 가득 찬 부잣집 같다'고 했고, 이제현은 '소동파 가문의 3명, 즉 소순 소동파 소철 등을 가리켜 천리마와 봉황 같다'고 극찬했습니다. 아니 오죽했으면 김부식의 아버지 김근은 두 아들의 이름을 소식(소동파)과 소철 형제의 이름을 따서 부식과 부철로 지었겠습니까. 요즘 중국에서 한류가 유행이라지만 고려시대 때는 소동파를 대표로 하는 '송류'가 풍미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있습니다. 고려와 고려인들이 그토록 존경하고 사랑했던 소동파가 고려와 고려인들을 무지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아니 싫어한 정도가 아니라 혐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소동파는 왜 그렇게 고려를.. 약사불 앞에 선 아픈 정치인들 “약사(藥師)는 의사의 이름을 빌렸다. 악귀를 물리치고, 온갖 재앙에서 보호받고, 극락왕생을 원하는 자는 약사여래의 이름을 부르면 구제받는다.”() 약사여래는 ‘약사’라는 이름만 불러도 온갖 질병과 모든 재난을 없앤다는 부처님이다. 학문적 연구에 치중했던 초기 불교가 대중과의 괴리감 탓에 인기를 잃자 ‘기복신앙’을 받아들인 것이다. 약사신앙으로 병을 고쳤다는 신묘한 기록이 등에 보인다. “선덕여왕의 병이 깊어지자 밀본법사를 불렀다. 법사가 여왕의 침실 밖에서 을 읽은 뒤 지팡이를 던지자 늙은 여우 한 마리를 찔러 뜰 아래로 내던지니 여왕의 병이 나았다.”( ‘신주·밀본최사’조). 지난 13일 서울 능인선원에서 모습을 드러낸 세계최대규모의 약사대불. 약사여래는 중생의 병을 치료한다는 치유의 부처로 알려져 .. 신라왕릉, 도굴에서 살아남은 비결 “청일전쟁 이후 일확천금을 꿈꾸고 온 일본인들이…무덤 속에 금사발이 묻혀있다던가 혹은 금닭이 운다던가 하는 전설을 퍼뜨리며….”( ‘고분발굴만담’, 1932년) 일제강점기에 경주의 고분을 발굴했던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는 일본인들에 의해 자행된 무자비한 도굴행각을 개탄하는 글을 발표했다. 일본인조차 낙랑고분과 가야고분, 고려고분 등이 무차별 싹쓸이 도굴로 난도질당하는 모습을 안타까워했던 것이다. 이렇게 일본인마저 한숨 쉰 이 아수라장에서 살아남은 고분들이 있었다. 4세기 후반~6세기 전반 사이에 왕경(경주) 안에 조성된 왕릉급 무덤들이었다. 적석목곽분이라는 묘제 덕분이었다. 돌로만 쌓은 고구려·백제의 적석총과 달리 이 시기 신라 무덤은 관을 묻고 그 위에 자갈돌과 흙을 차례차례 두텁게 쌓은 형태였다... 연산군은 왜 두려운 것은 역사 뿐이라 했나 이번 주 팟 캐스트는 입니다. 그렇습니다. 희대의 폭군이라는 연산군은 왜 역사가 두렵다고 했을까요. 또하나 궁즘증이 생깁니다. 역대 임금들은 왜 사관을 싫어했을까요.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 역시 예외는 아니었답니다. 사관의 입시를 막고 정사를 논했답니다. 태종은 사관은 보기 싫으니 편전에서 나가라고 명했답니다. 그러나 사관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관의 위에는 하늘이 있다고 당당히 말했답니다. 그렇다면 사관들은 왜 임금이 싫다는데 목숨을 걸고 역사를 기록했을까요.하나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역사와 사관을 싫어했던 임금들이라도 역사와 사관을 존중했다는 겁니다. 예컨대 중종 임금은 임금의 곁에서 일거수일투족 기록하고야 마는 귀찮은 사관들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 붓과 먹으로 모든 나의 과실을 숨김없.. '난신적자'에겐 공소시효가 없다 기원전 621년 춘추시대 진(晋)나라 문공은 천토(踐土)라는 곳에서 천자(주나라 양왕)을 위해 회맹식을 열었다. 제후 가운데 최고 실력자인 문공이 다른 제후들을 거느리고 천자(양왕)를 위해 베푼 충성맹세의 장이었다. 역사는 이 사건을 ‘천토지맹(賤土之盟)’이라 일컫는다. 이로써 진 문공은 춘추시대 제후국을 대표한 첫번째 ‘춘추5패’가 됐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공자가 쓴 역사책인 가 이 역사적인 팩트를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대신 “천자가 하양(河陽)이라는 곳으로 사냥을 나갔다”고만 기록했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역사’가 아닌 명백한 왜곡이었다. 공자는 과연 왜 그랬을까. 1905년 을사늑약 장면을 그린 당대의 풍자그림. 왜병의 총칼 앞에서 서명하는 을사오적과 고종 황제, 그리고 회심의 미소를.. 거세당한 사마천이 죽지 않은 이유 2017학년부터 한국사가 수능과목에 포함된다고 합니다.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고 봐야죠. 하지만 여전히 역사는 암기과목으로 기억됩니다. 그 지긋지긋한 '태정태제문단세~'로 이어지는 암기의 행렬이 뇌를 떠나지 않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역사란 과연 암기과목이고 어려운 것일까요. 지금으로부터 2000년도 훨씬 지난 시기에 역사가 재미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를 쓴 사마천이라는 분이죠. 알다시피 남성의 중요부위를 잘리는 형벌, 즉 궁형의 처벌을 받고도 '발분의 저작'이자 '불후의 역사서'인 사기를 남긴 분입니다. 사마천은 왜 거세형을 당했으며, 왜 그런 치욕을 받고도 살아남으로 했을까요. 그가 남긴 는 천하의 역사서라 할까요. 이번 주 팟캐스트의 주제입니다./경향신문 이기환 논설위원 .. 이전 1 ··· 122 123 124 125 126 127 128 ··· 172 다음